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백제의 마한 병합은 6세기 중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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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백제의 마한 병합은 6세기 중엽이었다
영산강 유역의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는 시점은||문헌에 기록된 백제 지방제도인 5방제 정비와||옹관고분이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는 6C 중엽||완주 배매산성, 순천 검단산성 등은 6C 초까지||영산강 유역 마한이 백제 영역이 아님을 보여줘||5C 말 제작된 나주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제작 기법·양식, 백제 출토 금동관과 크게 달라
  • 입력 : 2021. 03.03(수) 16:48
  • 편집에디터

나주 반남 고분과 대형 옹관. 나주시 제공

백제의 마한 병합 과정(출처, 임영진 마한연구원장)

나주 신촌리 출토 금동관

영암 내동리 출토 금동관(편)

옹관 발굴장면

고고학에서 본 백제의 마한 병합 시점

역사 문헌에서 백제가 언제 마한을 완전히 병합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고고학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임영진(마한연구원장, 전 전남대 교수)을 비롯한 고고학자들은, 백제의 마한 제국의 병합은 3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고 보고 있다. 1단계는 3세기 말 차령산맥까지이고, 2단계는 4세기 중엽 노령산맥까지이며 3단계는 6세기 중엽으로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남해안까지이다.

고대사회의 영역은 오늘날과 의미가 달랐고 잦은 전쟁으로 인해 영역이 수시로 변화하였기 때문에, 영역의 변화를 문헌 기록으로 정확하게 남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대국가의 영역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지배방식은 직접지배와 간접지배로 구분된다. 세력권이나 영향권 등은 영역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지배 방식이 아닌 서로 다른 영역을 가진 개별 세력 사이의 역학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광주·전남권 지역 즉 영산강 유역은 6세기 초까지는 백제의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력권 혹은 영향권 아래 있었다는 표현은 가능하지만, 직접 혹은 간접지배를 받았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백제의 영역 확산과정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고고학적 유물·유적으로 임영진은 성곽·고분·위세품 등을 들었다.

광주·전남지역과 가장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백제 성곽은 5세기 후반에 축성된 완주의 배매산성이다. 백제가 완주에 산성을 축성했던 것은 이 지역이 백제와 마지막 마한 제국 사이의 경계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광주·전남 지역에 축성된 백제 성곽은 6세기 초에 축성된 순천의 검단산성과 여수의 고락산성, 광양의 비로산성 등이다. 이들 산성이 광주·전남의 동부 지역에 축성되었던 것은 마지막 남은 영산강 유역의 마한 제국과 가야 제국과의 연계를 차단함과 동시에 양쪽을 함께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전북 완주의 배매산성을 비롯한 검단산성 등은 5세기 말 6세기 초까지도 영산강 유역의 마한이 아직 백제의 영역하에 들어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영산강 유역 마한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40미터 내외의 거대한 옹관고분의 축조를 든다. 영산강 유역인 반남면 소재의 옹관고분 중 덕산리 3호분은 남북 길이가 45미터 높이가 8미터나 되는 거대 봉분으로, 백제 무령왕릉보다도 크다. 당시 백제에서 축조되던 남북 길이 10~20미터 규모의 굴식돌방무덤(石室, 횡혈식 석실)과는 모습이 전혀 다른 무덤이다. 마한의 옹관고분과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은 백제와 마한이 각기 다른 통치 체제하에 있었고, 장례 문화 등 구성원들의 문화가 달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6세기 중엽이 되면 거대한 옹관고분은 더 이상 축조되지 않고 백제식 무덤인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면서, 백제를 상징하는 삼족토기 등의 백제 토기가 함께 묻힌다. 영산강 유역에서의 대형 옹관고분이 백제식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었음은, 6세기 중엽 영산강 유역의 지배 집단의 변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점이 된다. 이 시기가 바로 영산강 유역의 마한 제국이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는 시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17년 신촌리 9호분 을관에서 출토된 5세기 말에 제작된 국보 제295호 금동관은 한동안 백제왕의 하사품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금동관은 독립된 세력의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신하에게 하사될 수 있는 위세품은 아니다. 독립된 국가의 왕이 영역 내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신뢰와 영토수호 임무를 상징하는 칼이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 세력자에게 칼이 아닌 금동관이 제공되었다면 이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서 제공된 것이 아닌 독자적 관계 속에서 상호 공존과 협력 관계 유지를 위한 외교적 호의품으로 제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국보 제295호 금동관은 제작 기법과 양식의 특징이 백제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크게 달라 토착성을 지니고 있어, 백제왕의 하사품이 아닌 영산강 유역에서 제작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20년도에는 인근의 영암 내동리 쌍고분에서 거의 유사한 금동관편이 출토되어 동일 장인의 작품이라는 추정까지 하고 있다.

백제의 영산강 유역까지의 영역 확산과정을 살피는데 광주·전남지역에서의 백제 성곽과 영산강 유역의 대형 옹관고분의 굴식돌방무덤으로의 변화 그리고 신촌리 출토 금동관과 최근 영암 내동리 쌍무덤 출토 금동관편 등은 큰 도움이 된다. 즉 이들 유적·유물은 영산강 유역의 마한이 백제와는 달리 6세기 초까지 단절없는 토착성을 지닌 채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5세기 말 6세기 초에 성행하였던 40미터 전후의 거대한 옹관고분들이 6세기 중엽경부터 비교적 규모가 작은 백제 고분 양식인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는 것은, 백제의 영산강 유역 마한의 병합이 6세기 중엽 무렵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백제가 마한의 마지막 영역을 4세기 중엽에 병합했다는 이병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학설이다.

6세기 중엽에서야 백제 지방으로 편입

백제가 영산강 유역을 완전히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가장 유력한 기준은 영산강 유역을 백제의 지방으로 편제했다는 점일 것이다. 백제의 지방제도는 『양서(梁書)』에 전해지는 22담로(擔魯)와 『주서(周書)』 등에 보이는 5방(方)이 있다.

『양서』에 의하면, 백제는 전국에 22담로를 설치하고 그곳에 왕의 자제나 종족(宗族)을 보내 다스렸다. 담로는 성왕(聖王, 재위 523~554)대에 5방 제도가 시행되면서 사라진다.

『양서』의 담로 기록은 521년 무령왕대에 파견된 백제 사신이 양나라 왕조에 전한 바에 의거해서 기록된 것으로 파악된다. 521년 양나라에 파견된 백제 사신의 모습이 '양직공도(梁職貢圖)'에 나오고 있고, 양직공도에도 22담로가 소개되고 있다. 담로는 후대의 군(郡)에 해당되는 행정단위다. 따라서 22담로를 통해 521년 당시의 백제의 대체적인 영역을 설정해 볼 수 있다.

6세기 전반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475년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이므로, 당시 백제의 영역은 충청도와 전라도가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이 지역들은 통일신라 시대 지방제도인 9주에 대비시켜보면 충청도는 웅주(熊州)에, 전북은 전주(全州)에, 전남은 무주(武州)에 해당된다. 그런데 통일신라 시대 지방제도를 보면 웅주에는 13군이, 전주에는 10군이 그리고 무주에는 13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중 웅주의 13군과 전주의 10군을 합하면 23군이 되는데, 이는 521년 당시 존재했던 22담로와 거의 일치한다. 이는 6세기 전반 백제가 22담로제를 실시하여 지배한 영역이 충청도와 전북지역에 한정되었음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전남지역은 적어도 521년까지는 백제의 지방제도 안에 포함되지 않은, 즉 백제의 영역이 아니었음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전남권이 백제의 지방제도 안에 편입된 시점은 언제일까?

성왕 16년(538) 백제는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다. 사비로 천도한 이후 전반적인 제도개혁이 이루어졌고, 이 무렵 5방제가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5방제란 전국을 중방과 동방·서방·남방·북방으로 나누고, 그 각 방을 다시 수개의 군으로 나눈 지방제도다. 5방 중 중방은 전북지역, 북방은 부여 이북의 충청도 지역, 남방은 전남지역, 서방은 서해안 지역, 동방은 부여 동쪽의 충청도 지역을 대상으로 편제한 행정단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영산강 유역 일대에 설치된 남방 소속의 군현으로는 발라군(發羅郡)·수천현(水川縣)·아로곡현(阿老谷縣)·복룡현(伏龍縣)·두힐현(豆肹縣)·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실어산현(實於山縣) 등이 보인다. 이제까지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던 나주에는 발라군을 설치했는데 영산강 유역 마한의 맹주지였던 반남면 일대에는 하위의 행정단위인 반나부리현으로 편제했다. 이는 백제에 끝까지 대항했던 마한 세력에 대한 철저한 응징으로 보인다.

5방제의 성립은 전남지역에 대한 편제가 마무리 된 시점, 즉 백제의 사비 천도 직후인 6세기 중엽에야 가능했다. 이는 6세기 중엽에야 영산강 유역의 마한이 백제에 완전히 병합되었음을 의미한다. 고고학에서 보면 6세기 중반경에 옹관고분과 영산강식 돌방무덤 등 영산강 유역 마한인들의 토착문화가 사라지고 전형적인 백제식 고분인 굴식돌방무덤이 영산강 유역에 두루 축조되기 시작한다.

즉 영산강 유역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는 시점은 문헌에서 보는 5방제라는 백제 지방제도의 정비 및 옹관고분이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는 6세기 중엽임을 알 수 있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