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준성(黃俊聖, 1879~1910)은 대한제국 국군의 참령(參領)이었다. 국권 피탈 과정에서 이루어진 군대 해산에 반대한 후 완도와 해남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저항하다 순국한 인물이다.
참령은 계급 체계상 현재의 소령에 해당되지만, 당시는 대대장으로 3품 품계였고, 장군으로 불렸다. 지금의 소령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급 군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의 황궁과 황실을 지켰던 박승환 시위대 1연대 1대대장이 군대 해산에 반대하고 자결하였는데, 당시 계급이 참령이었다. 참령 이상으로 의병장이 된 분은 만주에서 활동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와 황준성, 두 사람뿐이다. 이동휘는 군대 해산 당시 참령으로 강화진위대 대장이었다.
연합의진 대장으로 추대
황준성은 순종실록 융희 2년(1908) 2월 10일 자에 "탈옥하려 한 황준성을 유배 10년에 처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동휘나 박승환과는 달리 오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황준성은 전북 진안군 남면 오정리(현 백운면 오정리) 출신이지만,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 그 가계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의 출생연도마저도 각각 제각각이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1880년생으로, 백과사전에는 미상으로, 각종 자료에는 1878년생 혹은 1879년생으로 나오기도 한다.
황준성은 군대 해산 직후 전북 익산에서 윤현보·이봉오·추기엽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지만 체포·투옥된다. 당시 최고법원인 평리원(平理院, 1899~1907년 사이 존재)은 그에게 내란죄를 적용하여 유배 10년을 선고한다. 그가 완도군 군내면 죽청리(현 완도읍 죽청리)로 유배왔고, 남도와 인연을 맺은 이유다. 군내면 죽청리에는 완도향교가 있었다. 유배생활 중인 그는 향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국권회복의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향교에서 가르쳤던 제자 중 한 명이 후일 대흥사 주지가 된 박영희, 즉 응송 스님이다.
황준성이 완도향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1908년 이봉오·추기엽(참위 출신) 등이 전주지방재판소에서 1년 유배형을 받고 완도군 군외면 황진리에 유배온다. 황준성은 이듬해인 1909년 6월 유배지를 탈출, 의병항쟁에 나선다.
당시 완도 지역에는 김성택(강성택으로도 활동) 의병장이 수십 명의 의병들과 함께 고금도·청산도와 해남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황준성은 과거 신분을 잊고 김성택 의병 부대에서 활동하자, 김성택은 그에게 의진의 대장을 맡아줄 것을 간청한다. 여기에 유배형이 끝난 후 남도 곳곳에서 활약하던 추기엽 의병장이 완도로 돌아와 자신의 의진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하였고, 인근 지역에서 활약하던 황두일 의병장도 의진을 이끌고 와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공훈전자사료관의 「폭도에 관한 제표」를 보면 추기엽과 황두일은 각각 당시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있었다.
1909년 7월 7일 황준성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김성택·추기엽·황두일 부대가 연합한 '황준성 연합의진'이 결성된다. 그 결성지가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의 생명을 구했던 해남군 북평면 이진 마을이었다. 이진 마을은 황두일 의병장의 고향이기도 했다.
연합의진의 대장이 된 황준성은 다음날인 7월 8일, 미황사 및 대둔사(현 대흥사) 부근에 병력을 배치한 후 연합의진이 본부로 정한 심적암(深寂庵)로 향한다. 그날 황준성 부대는 일진회 회원인 박원재와 일본 헌병의 밀정인 진태진을 해남군 현산면 초평리에서 처단하여 일제 앞잡이 노릇하던 무리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일방적 패배, 심적암 전투
7월 8일 저녁 식사는 푸짐했다. 해남군 현산면 읍호리 이참판 댁에서 소 한 마리와 백미 두 섬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저녁 일본 헌병대는 황준성이 인솔하는 150여 명의 의병진이 해남 대둔사 심적암에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한다. 의병들의 동태를 비밀리에 살피던 밀정의 밀고가 들어간 것이다.
해남 수비대장 요시하라(吉原) 대위는 병력 21명과 경찰관 3명 및 헌병 4명과 함께 연합토벌대를 편성, 심적암을 급습한다. 7월 9일 새벽 4시 30분, 의병들이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연합토벌대는 사격을 개시하였고, 전투는 2시간 30분 만에 연합토벌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다.
당시 심적암에서 잠들어 있던 의병 68명 중 24명이 사망하고, 8명이 포로로 잡힌다. 화승총 47정과 군도 5개도 빼앗긴다. 황준성 의병진의 참패였다. 황준성은 제자인 박영희와 탈출에 성공하여 위기는 모면했지만, 의병 수습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다가 일제가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전라도 의병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었다. 더 이상 의병진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황준성은 의진을 해산한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박영희에게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대둔사에 들러 머리를 깎고 몸을 숨기라 명한다.
일제는 황준성 대장의 소재지를 파악하기 위해 밀정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체포된 의병들에게 심한 고문을 가하였다. 그는 더 이상 부하들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고 결심하고 해남 경찰서에 자진 출두한다. 1909년 12월 7일이었다.
황준성은 이듬해인 1910년 2월 26일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대구공소원과 고등법원에 항소, 상고하였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그해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32살이었다.
당시 17세였던 소년 의병 박영희는 이름을 학규, 위 등으로 바꿔 다른 지역 사찰에 숨어지내다 1911년 대둔사로 출가한다. 그는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조국 광복에 헌신했다. 그가 대둔사 응송(應松) 큰스님이다. 응송 스님은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지만, 1930년대의 친일 행적이 밝혀지면서 2010년 서훈이 취소된다.
황준성의 부장이었던 추기엽은 1909년 7월 18일 부하들에게 피살당한다. 심적암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이진 마을 출신 황두일은 어떻게 되었을까? 현장을 탈출한 뒤 최후까지 저항하였지만, 결국 일제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 기간에 체포되고 만다. 호남 의병을 제압한 일제는 1910년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南韓暴徒大討伐記念寫眞帖)』을 발행하였는데, 당시 붙잡힌 대표적인 호남 의병장인 안규홍·심남일 등 16명의 단체 사진이 '폭도거괴(暴徒巨魁)'라는 이름으로 실려있다. 이 16명의 사진 속에 황두일도 포함되어 있다. 수형인명부를 보면 황두일은 10년형을 선고받고 있지만,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황준성은 독신으로 후사가 없어 재판기록 이외에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제자 응송 스님의 노력으로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다. 훈장과 훈장증은 한동안 응송 스님이 보관하였고, 스님마저 세상을 뜨자 그의 양자인 박정부가 보관중에 있다. 전해줄 후손마저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0년 대구 감옥에서 숨진 그의 시신이 묻힌 장소도 알지 못한다. 아직도 그의 영혼은 구천을 떠돌고 있다.
심적암에서 순국한 24명 의병의 시신은 현무교 부근, 지금의 대흥사 매표소 뒤편에 집단 매장되었다고 한다. 황준성이 이끈 연합의병 68명이 주둔했던 전투지 심적암은 도솔봉 자락 관음암 위쪽에 터만 남아 있다. 현장에는 항일 의병투쟁 최후 격전지 '대흥사 심적암지'란 제목을 단 간단한 안내판이 서 있어 심적암 전투의 현장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심적암은 1909년 7월 9일 의병들의 격전지만은 아니었다. 1933년 8월 11일, 전남운동협의회 대표인 황동윤·김홍배·오문현·이기홍 등이 모여 비밀 회합을 가진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했다. 안내판에는 이에 관한 내용은 없다. 언제 심적암이 사라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1933년 이후인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 심적암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흔적은 허물어진 축대와 돌로 만들어진 샘터가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