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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마한, 백제 병합 시기 - 사서에 보이는 마한과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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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마한, 백제 병합 시기 - 사서에 보이는 마한과 백제

이병도 박사 4세기 병합설 역사교과서에 반영
마한 백제 병합시기 연구자에 따라 다른 견해
삼국사기에 기술된 병합연도인 기원후 9년은
특정소국 병합 또는 온조왕 치적 서술로 보여
중국 사서에 3세기 말까지 마한제국 건재 기록

게재 2021-02-17 16:09:28
나주 반남면 고분군은 대안리 12호분(국가사적 제76호), 신촌리 8호분(국가사적 제77호), 덕산리 14호분(국가사적 제76호) 등 총 34호분으로 이뤄졌다.
나주 반남면 고분군은 대안리 12호분(국가사적 제76호), 신촌리 8호분(국가사적 제77호), 덕산리 14호분(국가사적 제76호) 등 총 34호분으로 이뤄졌다.
서울 석촌동 2호분
서울 석촌동 2호분
마한의 멸망 연대를 서기 9년으로 서술한 삼국사기
마한의 멸망 연대를 서기 9년으로 서술한 삼국사기

백제의 건국

『후한서』 동이열전을 보면 "마한에 54개 소국이 있었고, 백제는 그 54개 소국 중 하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백제는 마한 54개 소국 중 하나로 출발했다가 이후 고대 왕국으로 성장한 후 마한을 병합한다. 따라서 마한과 백제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백제가 언제 어떤 정치 집단에 의해 고대국가로 성장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12세기에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BC 18년에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그의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해 위례성에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백제의 최고 지배층을 형성한 집단 중 일부가 고구려와 관련을 가진 이주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는 고조선의 멸망 이후 파상적으로 남하해온 북방 이주민들이 토착 주민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정치세력들이 이미 성장하고 있었다. 온조는 그 이주민 집단의 우두머리로 토착 세력을 누르고 정치 지배권을 장악한 후 후대에 백제 왕실에 의해 혈연적·관념적인 시조로 인식된 존재로 보인다. 즉 백제는 기원 이전 시기부터 마한의 한 세력으로 자체 성장하던 정치체가 모체가 되고, 그 후 고구려계 이주민 세력이 결합됨으로써 성립한 국가라고 볼 수 있다.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온조로 대표되는 고구려계 이주민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 유적에서 확인된 고구려식 돌무지무덤(積石塚)을 통해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하지만 이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중심 지역과 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임진강 유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3세기 전반의 돌무지무덤과 연결되고 있다. 이는 고구려 이주민들이 바로 한강 이남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한동안 임진강 유역에 머물렀음을 보여준다. 바로 내려올 수 없었던 것은 당시 강남 위례성 일대에 마한 54개 소국의 하나인 마한 백제국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한 백제국은 한강 하구 김포 지역에서 성행하고 있던 분구묘 세력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울 강남 지역에 정착한 후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성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대국가 백제는 선주민인 마한 백제국 세력이 3세기 중엽 경 임진강 유역에서 서울 강남으로 남하한 고구려 이주민 집단과 연합하여 건국한 나라였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고 있는 유적이 이미 언급한 서울 석촌동의 돌무지무덤(사적 제243호)이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마한과 백제

마한과 백제가 어떤 관계였는지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삼국사기』의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마한과 백제와의 관련을 기록한 사서의 양이 매우 적고, 기록의 내용도 기원 전후의 백제 온조왕대에 한정되어 있다. 몇몇 기록을 살펴보자.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10년(기원전 9) 조에는 "10년 가을 9월 왕이 사냥을 나가 신령스러운 사슴을 잡아 마한에 보냈다"는 기록이, 온조왕 18년(기원전 1년) 조에는 "말갈이 갑자기 이르렀다. 왕이 병사를 이끌고 칠중하에서 맞서 싸워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온조왕 24년(기원후 6) 조에는 임금(온조왕)이 웅천에 목책을 세우니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항의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왕(온조)이 처음에 강을 건너왔을 때에 발을 디딜 곳이 없어서, 내가 동북의 1백리 땅을 내주어 편하게 살게 하였다. 이는 왕을 후하게 대접한 것이니, 왕은 마땅히 보답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라가 완비되고 백성들이 모여드니 스스로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을 크게 쌓고 우리 땅을 침범하려 하는데, 이것을 의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질책하는 내용이다. 그러자 온조가 부끄럽게 여겨 목책을 헐어버렸다는 것이다. 온조왕 당시 백제는 사슴 뿐만 아니라 적의 추장을 체포하여 마한에 보내고 있고, 마한왕이 백제왕을 질책하고 있다. 『삼국사기』 온조왕대의 세 기록은 마한이 백제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한과 백제 사이의 국력이 역전된 것은 온조왕 26년(기원후 8)부터다. 『삼국사기』 온조왕 26년 조에 "겨울 10월, 임금이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병사를 내어 몰래 마한을 공격하여 국읍을 병합했지만,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만은 항복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사냥으로 위장한 후 마한을 기습하여 국읍을 빼앗았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1년 뒤인 온조왕 27년 조에는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해서 그 백성을 북쪽으로 옮기었다. 이것으로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라고 마한 멸망을 기록하고 있다. 기원후 9년의 일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사서인 『삼국사기』는 마한이 백제 온조왕에 의해 기원후 9년에 멸망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5년조에 "가을 8월,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쳐 항복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69년조에 "임금이 마한과 예맥의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사금 5년은 기원후 61년이고, 태조왕 69년은 기원후 121년이다. 이 두 기록은 백제가 온조왕대에 멸망했다는 서기 9년보다 52년과 112년이 지난 뒤의 기록이다.

마한은 『삼국사기』에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 기원후 9년에 백제에게 멸망하였는가? 멸망했다면 이후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마한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는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에 백제에 병합되었다는 현재의 '통설'을 물론이고, 고고학을 바탕으로 한 최근의 신설인 '마한독자설' 하고도 전혀 맞지 않다. 따라서 다수의 연구자들은 후대(3세기 말경)에 일어난 중부지역 마한 병합과 관련된 사실들을 시조인 온조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소급해서 서술했다고 보고 있다. 만약 온조왕대의 기록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마한 전체의 멸망 혹은 통합이 아닌 마한 54개 소국 중 작은 1개 소국의 멸망 내지 통합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온조왕대 기록을 가지고 백제가 기원후 9년에 마한 전체를 통합했다고 볼 수는 없다.

중국 사서에 보이는 마한

『삼국사기』의 마한 관련 기록은 백제 온조왕 27년 이후 '백제본기'에서는 사라진다. 온조왕이 마한을 멸망시켰다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조왕 27년 이후에도 마한은 이미 살펴본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고구려본기에 여전히 등장하고 있고, 중국 문헌에도 등장한다.

이미 살핀 『삼국지』 와 『후한서』 동이전 이외에 서진(265~317)에서 동진(317~420)까지 156년의 역사를 기록한 『진서』 동이열전 마한조에는 함녕(咸寧) 3년(277)을 시작으로 태희(太熙) 원년(290)에 이르기까지 마한이 9차례에 걸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은 최소한 마한이 290년까지 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진서』 장화전(張華傳)에는 "동이 마한의 신미 등 여러 나라는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있으며, 유주(현 베이징)에서 4천여 리 떨어져 있다. 역대로 내부하지 않던 20여 국이 함께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받쳐 왔다(東夷馬韓 新彌諸國 依山帶海 去幽州四千餘里 曆世未附者 二十餘國並遣使朝獻)"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껏 조공을 받치지 않던 마한의 신미제국이 282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음을 보여준다. 『진서』 동이열전의 마한과 구분되는 다른 지역의 마한에서 사신을 보냈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장화전에 나오는 신미국은 『삼국지』나 『후한서』에 나오는 마한 54국과는 다른 이름이다. 신미국을 영산강 유역이 아닌 서해안 일대에 분포한 마한 제국의 하나로 보는 견해(이병도 1959)가 발표된 이후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중 하나가 신미제국을 '신미의 여러나라'란 의미로 『삼국지』나 『후한서』 마한조의 마한과는 별개의 정치체로 보면서 이를 해남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했다(강봉룡 2006). 최근의 연구 성과는 『진서』 동이열전에 보이는 마한은 천안 지역의 목지국이 중심이었고, 『진서』 장화전에 보이는 '신미제국'의 마한은 서남 연해안을 끼고 노령·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영산강 유역, 즉 전라도 일대의 신미국이 중심인 마한 연맹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한이 언제 백제에 병합되었는지의 논쟁은 아직도 뜨겁다. 이미 살핀 것처럼 『삼국사기』에 보이는 백제의 마한 병합년도인 기원후 9년은 마한의 특정 소국의 병합이거나 온조왕의 업적을 높이기 위해 후대의 사실을 앞당겨 서술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다. 중국 사서인 『삼국지』나 『후한서』 및 『진서』는 3세기 말까지도 마한 제국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