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장생포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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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장생포 노래
  • 입력 : 2020. 12.03(목) 11:25
  • 편집에디터

여수 선소 계선주(거북선과 판옥선을 묶은 기둥이라고 하나 벅수로 추정하기도 한다)-이윤선촬영

장생포는 지금의 여수 선소를 포함한 포구 이름이다. '곡(曲)' 혹은 '가(歌)' 등의 '노래'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장생포는 어떤 포구였으며 어떤 노래였을까? "시중 유탁(柳濯)이 전라도에 출진함에 위엄과 은혜가 겸비하여 군사들이 장군을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왜구가 순천부 장생포에 이르자 유탁 장군이 구원하러 감에 왜구들이 바라볼 뿐이었다. 장군이 곧바로 붙잡았다가 놓아주니 군사들이 매우 기뻐하며 이 노래를 지었다." '고려사악지'(1454년)의 기록, 이 노래가 <장생포>다. '전라도에 출진함'은 전라도 아닌 곳에서의 출진 예컨대 '합포(지금의 마산 합포구)만호'였을 때를 추정하게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김준옥 교수 등이 밝혀두었다. 유탁장군이 '합포만호'였던 충혜왕 때는 왜구 침입이 없었고 '전라양광도 도순문사'였던 충정왕 때와 전라도 만호로 임명된 공민왕 때 즉, 장생포 전투는 유탁 장군이 전라도 만호로 있던 공민왕 원년(1352)이라는 것이다. 1344년(충혜왕) 원나라로부터 '합포만호'로 임명되었고 1352년(공민왕 원년)에 전라만호가 되었다. 한편 다른 기록도 있다. "장성포(長省浦), 부의 60리에 있으니 고려 때 왜인이 침입해서 여기에 이르자, 유탁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치니 적들이 쳐다만 보다가 그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에 군사들이 크게 기뻐하며 노래를 지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1481년)의 기록이다.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는 기록이 핵심 정보다. 선학들이 밝혀둔 장생포의 위치를 추적해본다.

순천부 동쪽 60리 포구, 장생포의 위치

문헌에서 언급한 (순천)부 동쪽 60리 전후한 지역의 포구들은 만흥포(萬興浦), 기질을포(其叱乙浦), 탄잠포(呑潛浦), 성창포(城倉浦), 조음포(助音浦) 등이다. 용문포(龍門浦)는 부의 동쪽 55리, 며포(㫆浦)는 부의 동쪽 61리에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면 장생포가 몇 군데 등장하고 있지만 가장 유력한 정보는 전후맥락을 고려한 위치와 거리 정보다. 이런 점에서 유탁 장군의 이전 거처였던 합포만호를 포함, 울산 남구 장생포 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다수의 문헌자료들을 검토한 선학들의 견해는 지금의 여수반도 내 포구에 집중된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통일신라시대의 포구 검토가 도움이 된다. 변남주 교수가 발품을 팔아 전국의 포구를 조사했다(고석규 외, '장보고시대의 포구조사' 참고). 옛 기록에서 위치를 비정할 때 방위 호명은 해로(물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방위상 남동쪽이라도 물길에 따라 동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리서에 여수지역 포구를 모두 순천부의 동쪽으로 표기한 이유다. 용문포(龍門浦)는 『읍지』에도 부의 동쪽 55리로 나와 있는데 용인포, 용개라고 불렸으며 현재 '고돌산포'에 해당한다. 수군만호가 배치되어 있던 곳이다. 다음은 『읍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의 동쪽 60리라 한 곳이다. 만흥포(萬興浦)는 만흥개라고도 하는데 만흥동 만성리 해수욕장 부근이다. 탄잠포(呑潛浦)는 화양면 장수리 자매마을로 추정하고 있다. 조음포(助音浦)는 종화동의 종포, 종개, 쫑개로 추정하고 있다. 기질을포(其叱乙浦)는 모사포로 추정한다. 성창포(城倉浦)는 현재 어느 지역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중에서 장성포를 당연히 주목할 수밖에 없다. 순천부(팔마비)에서 여수 선소(장생포 내안)까지 동남향 직선거리를 재보니 27.46Km다. 60리는 관례적 환산법으로 계산하면 24km, 도량형법에 따르면 25.2Km에 해당한다. 약간 차이는 있지만 지리서의 설명과 부합한다. 『한국지명총람』15(전남편Ⅲ)에 의하면, "장생포는 장성포, 장성개와 같다. 쌍봉명 안산리, 소호리, 선원리, 학룡리, 시전리, 웅천리에 걸쳐있다. 고려 30대 충정왕 2년(1530년 표기는 1350년의 오기) 5월에 왜구가 병선 66척을 이끌고 침입하여 노략질 하는 것을, 전라 양광도 도수문사 유탁 장군이 정병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왜적의 배 한척을 무찌르고 왜적 13명을 죽이니, 그들이 놀라 달아나서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였으므로 유장군이 스스로 장생포 노래를 지어 부르고, 군사들이 기뻐하여 동동곡(動動曲)을 불렀으므로 더욱 이름났다." 장생포(長栍浦)라는 이름은 벅수(남해안 지역에서 장승을 부르는 말)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왜 여수에 벅수가 많은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다룬다.

<장생포>는 북소리와 관련된 노래이자 연희(演戱)

여수시 쌍봉면 시전리 텃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를 '둥둥골'이라 한다. 둥둥골 뒤편이 고락산(鼓樂山)이다. 한국향토문화대전에 의하면 북소리에서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최인선 교수에 의하면, 고락산성은 중간에 본성이 있고 산의 정상부(해발 335m)에 보루를 갖추고 있는 백제산성이다. 테뫼식 산성으로 산 자체가 성이었다는 뜻이다. 한편 여수 진남관 북쪽은 종고산(鐘鼓山)이다. 한산대첩 때 산이 스스로 울어 충무공 이순신이 붙인 이름이라고 전한다.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웅웅웅 소리를 낸다 한다. 이 또한 북소리 울려 진군하는 진남(鎭南) 혹은 승전고(勝戰鼓)와 관련지어 해석하는 것이니 <장생포>를 북과 연결 지어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고락산성(鼓樂山城)에 왜 북 고(鼓)자를 붙였는가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장생포>의 발생이 유탁 장군과 그 군사들의 승전가였다는 점을 참고하면 자연스럽게 북(鼓)과 관련된 것임을 이해할 만하다. 괘락산(掛樂山)이라고도 하는데 테뫼식 즉,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둘러 발권식 산성, 시루성, 머리띠식 산성이라고 부른다는 점 참고하면 고락산성의 의미를 더욱 이해할 수 있다. 산 자체가 큰 북의 형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수 장생포를 배경으로 고려말엽에 지어져 대중 사이에 유포된 노래가 <장생포>라고 주장하는 배경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백제 때의 산성이기에 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측면에서 호명의 의미가 크다. 왜구를 물리치고 불렀다는 장생포 노래, 그와 관련하여 불려지거나 춤으로 추었다는 장소를 현재의 여수 장성마을로 비정한 것은 이런 전거들을 바탕으로 한 주장이다.

남도인문학팁

장생포라는 노래에 대하여

<장생포>는 고려 후기 유탁(柳濯, 1311~1371)장군이 장생포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불렀던 노래다.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김준옥 교수가 장생포곡, 장생포의 창작자, 창작연대, 창작지 등을 분석한바 있다. 장생포 전투는 유탁이 전라도 만호로 있던 공민왕 원년(1352)에 일어났으며 노래 <장생포>는 당시 유행하던 민요를 유탁장군과 군사들이 전승의 기쁨을 만끽하며 함께 불렀던 대중가요라고 했다. 동의한다. 민요가 작자 없이 구전 전승되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일명 '노가바(노래가사 바꾸어 부르기)'를 하는 것이므로 당시의 승전 내용을 기왕의 민요 리듬이나 선율 예컨대 오늘날로 말하면 산아지타령 등에 맞춰 노래하고 연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옛 문헌에 나오는 장생포, 장생포가, 장생포곡, 장룡성포, 장생곡, 특히 장생포 등곡은 장생포 외 다른 곡이라는 뜻일 수도 있으니, 모두 노래 이름이 달리 표현된 것일 뿐 넓은 범주에서는 같은 곡이다. 사실 노래만이 아닌 콘텍스트로서의 '장생포'다. <장생포>와 고려가요 <동동>의 상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는 시간을 갖겠다.

여수 선소 앞바다-이윤선촬영

여수선소 앞바다(옛 장생포)-이윤선촬영

여수선소, 옛 장생포 앞바다-이윤선촬영

옛 포구 1.용두포, 2.서안포, 3.성생포, 4.내례포, 5.용문포, 6.만흥포, 7.조양포, 8.장성포(장생포), (통일신라시대의 포구조사에서 캡춰)

순천부(팔마비)에서 여수 선소까지 직선거리 27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