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의열 투쟁의 선구자 '유리개걸지사' 기산도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의열 투쟁의 선구자 '유리개걸지사' 기산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출생, 의열투쟁에 한평생 바쳐 ||호남창의회맹소 기삼연의 종손, 장인은 의병장 고광순||을사오적 가운데 한 명인 군부대신 이근택 암살 주도||전라도 지역 돌며 독립자금 모아 상하이 임정에 송금||두 차례 옥고 모진 고문으로 불구…장흥서 외롭게 숨져
  • 입력 : 2020. 11.24(화) 16:23
  • 최도철 기자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당곤마을에 세워진 기산도 선생의 유언 '유리언걸지사 (流離焉乞之士 : 떠돌이 거지 지사)' 를 새긴 돌비석.

기산도 선생 영정

애국지사 기산도 선생의 묘(서울 현충원)

의열투쟁의 출발, 기산도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을사오적'을 앞세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기 위해 이른바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11월 20일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써 울분을 토로하였고, 11월 30일에는 전 탁지부대신 민영환이 자결로 항거한다.

을사오적 중 한 명이 대한제국의 국방 책임자 군부대신 이근택이었다. 이근택의 매국 행위에 대해서는 그의 노비조차 분노했다. 조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하여 집으로 돌아온 이근택은 집안사람들을 불러놓고 궁중에서 신조약을 '늑약'하던 일을 설명하면서 "내 다행히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부엌에서 들은 계집종이 식칼을 가지고 나와 꾸짖는 이야기가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오고, '이름 없는 비녀(婢女, 여종)'라는 제목으로 한때는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이근택의 처치는 장성 출신 기산도의 몫이 된다. 1906년 2월 16일 자정 무렵, 기산도는 이근철, 이범석과 함께 계동 마루턱 이근택의 집 담을 뛰어넘는다. 이들은 이근택의 침실을 급습한 뒤 이근택의 머리와 왼쪽 어깨, 오른쪽 팔과 등 10여 곳을 난자(亂刺)했다. 이근택과 그의 첩의 울부짖음을 듣고 하인을 비롯 경호 병사와 순검, 일제 헌병이 급히 달려왔지만, 기산도 일행은 이미 남쪽 밧줄을 타고 탈출한 뒤였다.

이근택 암살 사건은 곧바로 대한매일신보에 '李氏逢刺(이씨봉자)'란 제목하에 다음과 같이 대서 특필되었다.

"군부대신 이근택씨가 재작일 하오 12시경 그의 별실과 함께 막 옷을 벗고 취침하려 할 즘에 갑자기 양복을 입은 신원을 알 수 없는 3인이 칼을 들고 돌입하여 가슴과 등 여러 곳을 난자하여 중상을 입고 바닥에 혼절한 바, 그의 집 청지기 김가가 내실에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괴이히 여겨 탐문하고자 하니 갑자기 양복 입은 3명이 안에서 급히 나와 놀라 '누구냐' 하고 물은 즉 이들이 역시 칼로 김가를 타격하여 귀와 어깨에 부상을 입히고 곧바로 도망갔다. 이군대(李軍大, 이근택 군부대신)는 한성병원에서 치료중이나 부상이 극중(極重)하여 위험이 팔구분(八九分, 십중팔구)이라더라"

기산도 등의 이근택 격살은 이근택이 한성병원에서 살아나면서 실패로 끝났지만, 사건은 조정을 경악케 했다. 특히 을사오적 등 매국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 사건 이후 을사오적들은 불안에 떨었으며,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암살을 모면하기 위해 경호를 더욱더 강화한다. 이완용·박제순·이지용 등 오적 대신의 집에는 두 배나 많은 병사들이 배치되어 총을 메고 지켰다.

취조 중에 기산도는 "너희 오적을 죽이려는 것이 어찌 나 한 사람뿐이겠느냐. 단지 나는 너를 죽이려던 것이 서툴러 탄로나게 된 것만이 한스럽다"라며 당당했다.

떠돌이 거지지사로 불리다

기산도가 옥에서 풀려난 것은 1908년 2월 중순경이었다. 옥에서 풀려난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광주였다.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이 1월 2일(음력) 광주천에서 일제 경찰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삼연은 기산도의 종조부였다. 기삼연이 순국하자 광주의 선비 안규용이 관을 갖추고 시신을 수습하여 서탑등(현 사직공원)에 장례지냈는데, 장례 직후 쯤 내려온 것 같다.

이후 기산도의 활동은 연해주 일대에서 확인된다. 안중근 의사 의거 직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안중근과 왕래하고 있다"는 일제의 보고서도 있다. 1909년 안중근 의거 직후 얼마 되지 않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방랑 끝에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당곤 마을에 몸을 숨긴다.

1919년,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3·1운동에 참여한 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비밀자금을 모집, 송금하는 일을 한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군자금을 모금하고 있던 함평 출신 김철을 만나, '전라도 의무금 요구 특파위원'에 임명된다. 기산도는 1919년 5월부터 7월 하순까지 영광, 장성, 광양, 순천, 곡성, 구례, 임실, 남원 등 전라도 일대에서 500원이 넘는 독립자금을 모은다. 장성 월평리 사람 김요선은 자신의 소를 팔아 독립자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0월 21일 장성군 황룡면 관지리에서 체포되고, 3년 형을 선고받는다.

다시 투옥된 기산도는 가혹한 고문을 당한다. 매질에 의한 상처로 짓무른 그의 정강이에서 는 구더기가 우글거릴 정도였다. 기산도는 마지막 순간 입을 열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문다. 동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형기를 마친 후 출옥했지만, 말도 할 수 없고 한쪽 다리를 완전히 저는 불구자가 된다. 한쪽 다리로 전국을 방랑하다 1928년 12월 4일 장흥의 차디찬 객창(客窓)에서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떠도는 걸인 선비'로 자칭하여, '유리개걸지사기산도지묘(遊離丐乞之士 奇山度之墓)'란 나무비 하나만을 세워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유리개걸지사'는 '떠돌이 걸인'이라는 뜻이다. 을사오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기산도 열사의 최후가 너무도 안타깝다.

의재 기산도 선생 추모비

기산도의 혼이 잠든 현장, 고흥 당오리를 찾다

을사오적 중에서도 국민 밉상은 군부대신 이근택이었다. 이근택은 조선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와 결의형제를 맺고, 일제 추밀원장으로 한국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이 되어 거들먹거렸기 때문이다. 이근택도 국민 밉상임을 잘 알고 있었던 듯, 침실 주변에 군인 6명과 순검 4명을 배치하여 경호했고, 일제 헌병대 및 순사분파소와 비상 전화선을 연결해놓고 있었다. 이런 철통같은 이근택의 담을 뛰어넘어 안방에 침투, 이천만 백성의 체증을 뻥 뚫어준 자객이 장성 출신의 기산도다.

그러나 오늘 기산도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산도(奇山度, 1869∼1926)는 1869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서 태어난다. 본관은 행주, 호는 의재(毅齋)이다.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인 성재 기삼연의 종손이며, 기우만 의병의 참모를 지낸 재(宰)의 맏아들이다. 지리산 연곡사에서 순국한 의병장 녹천 고광순은 장인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이고, 장인은 일제가 호남의병의 수괴 중 한 분으로 꼽은 녹천 고광순이니, 기산도가 어떤 분위기에서 성장한 인물인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오늘 그가 태어난 장성 아곡리에는 그를 떠올릴 수 있는 흔적 하나 없다. 아곡리는 기산도만 태어난 마을이 아니다. 백비의 주인공인 아곡 박수량과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성재 기삼연이 태어난 청렴과 의열의 탯자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걸 다 걷어차고 홍길동 테마파크라니, 다소 황당하다.

필자는 기산도 열사를 아곡리가 아닌 밀양에서 만났다. 밀양은 의열단을 창설한 약산 김원봉과 석정 윤세주의 고향으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의열(義烈)'의 상징지다. 지금 윤세주가 태어난 집터에는 의열 기념탑이, 김원봉이 태어난 집터에는 의열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그런데 의열 기념관의 '의열투쟁 주요 연표'에 첫 출발을 장식한 분이 이근택의 격살을 기도했던 기산도였다. 그랬다. 장성 출신의 기산도는 한국 의열투쟁의 선구였다. 이후 나철·오기호 등이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오적의 암살을 기도했고, 전명운·장인환은 대한제국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안중근은 이토를 격살한다.

이근택의 격살을 기도한 장성 출신의 기산도는 의열투쟁의 맨 앞을 차지한 분이다. 그걸 남도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평생 살아 온 필자도 놓치고 있었으니, 기산도가 의열 투쟁의 선구였음을 아는 남도인들은 얼마나 될까? 그의 출생지 장성 아곡리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물 하나 없으니, 그가 남도인에게 잊힌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억에서 그를 몰아낸 것이다. 부끄럽다.

기산도를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장소는 그가 이근택 저격 후 10여 년간 숨어지낸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당곤마을이다. 지금 그곳 당오리 당곤마을 입구 도로변에는 의사를 기리는 추모비가 서 있고, 추모비 앞에는 '유리개걸지사(遊離丐乞之士)'라 새긴 유언비가 새겨진 돌비가 서 있다. 무덤 앞에 나무비를 세워달라고 했는데, 돌에 새겨져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의 시신은 장흥에 일시 묻혔다가 뒷날 양자 기노식씨에 의해 고흥으로 옮겨진다. 1963년, 정부는 그 업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고, 고흥에 있던 그의 유해가 1967년 국립묘지(현충원) 애국선열 묘역에 묻힌다.

의열 독립운동사의 출발이 된 장성 출신의 기산도, 그러나 그의 흔적은 고흥에 남은 추모비와 묘비 하나가 전부였다.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