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서원(書院)과 문림(文林)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 오피니언

서원(書院)과 문림(文林)

게재 2020-11-15 16:22:42
최도철 미디어국장
최도철 미디어국장

언제부턴가 쉬는 날이면 절집을 기웃거리거나, 사당이나 향교, 서원이나 박물관에 발을 들여놓는 게 일상의 작은 기쁨이 됐다. 시쳇말로 나름 '소확행'이다.

스님이나 문화해설사, 학예사를 만나 말씀이라도 들을라치면 작은 수첩을 꺼내 적바림을 하는 것도 솔찬한 즐거움이다.

며칠 전 신문 지역면에 광주 광산과 이웃 장성이 서원문화를 교류한다는 짤막소식이 실렸다.

광산과 장성에는 황룡강 물길을 따라 30여 리 거리에 호남의 양대 거유(鉅儒) 고봉 기대승과 하서 김인후를 모시는 서원이 있다. 월봉서원과 필암서원이다.

고봉(高峰)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퇴계와의 철학적 논쟁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대 총장쯤 되는 58세 성균관 대사성 이황과 수습 사무관 정도 되는 32세 과거 급제자 기대승이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두고 논변을 시작한 것이다.

퇴계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무려 13년 동안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당대 선비들이 이 글을 베끼고 나눠 읽으면서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더해 갔다.

월봉서원은 너브실마을 돌담길 지나 부드러운 산비탈에 있다. 서원의 중심에는 정조(正祖)가 기대승을 두고 '빙심설월(氷心雪月)'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빙월당'이 있고, 기라성 같은 문사들이 자연을 벗 삼아 누렸던 이른바 '계산풍류'의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하서(河西)는 문묘(文廟)에 배향된 18명현 가운데 유일한 호남사람이다. 서른 살에 급제해 홍문관 박사가 된 김인후는 다섯 살 어린 세자의 시강(侍講)을 맡는다. 훗날 인종이 된 세자는 존경과 신뢰의 증표로 묵죽도를 그려 스승에게 주었고, 김인후는 신하로서 절의를 지키겠다는 뜻이 담긴 시를 쓴다.

제자와 스승, 세자와 신하의 자리를 떠나, 대나무와 바위처럼 변치 않는 믿음과 존경의 마음을 주고받은 것이다. 훗날 정조는 군신간의 지극한 사랑에 감동해 '경장각'이라는 이름을 내려 묵죽도를 보관토록 한다.

필암서원의 정문 누각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확연루(廓然樓) 현판이 걸려 있다. '넓게 텅 비어 있다'는 뜻으로 하서의 정신과 삶이 담겨 있다.

두 서원의 문화교류를 계기로 서원의 빗장을 활짝 열어 안동이나 영주처럼 호남의 선비문화와 사상이 현창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