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도철 국장 |
새맑은 하늘아래 파랗게 치솟는 벼들을 보노라니, 황금물결 일렁이는 가을날의 풍요가 그려지다가도, 쌀을 천시하는 몹쓸 세상을 살아야 하는 농부들의 그늘진 눈빛들이 떠올라 괜스레 한숨이 새나온다.
쌀은 단순한 곡물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삶과 역사를 담아온 생명의 줄기이자 문화의 뿌리이다. 하지만 그런 쌀을 지켜온 농민들의 현실이 참으로 고단하다.
찬 이슬 맞고 논을 살펴야 하는 새벽, 타는 듯한 태양 아래 논두렁 따라 골백번 허리를 굽혀야 하는 한낮, 돌아서면 우북해지는 두렁길 잡초 베는 해거름….
젊은이들은 죄다 떠나버려 늙발까지 그렇게 피땀으로 지킨 한 톨 쌀이 제값을 받지 못한 채 창고에 쌓이고 또 쌓여, 수입쌀과 정책 사이에서 이름도 없이 묻혀간다.
논은 물을 품고, 농부는 생명을 품는다. 하지만 쌀값 하락, 과잉 생산, 소비 감소라는 숫자의 함정 속에 농심은 속절없이 타들어만 가고 있다.
누군가는 말한다. “쌀이 남아 돈다”고.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남는 건 쌀이 아니라, 방치된 구조이고, 부족한 건 수요가 아니라 공감이다. “왜 농민을 보호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똑부러지게 답해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이 땅의 시간을 지켜온 사람들입니다.”라고.
농정은 조정될 수 있어도 농심은 무너지면 되살릴 수 없다. 쌀 한 톨에 담긴 땀방울과 그 곡선 아래 감춰진 주름을 우리는 결코 외면해선 안 된다.
새 정부가 들어섰으니 이 나라의 농정도 확 바뀌길 기대한다. 아니 반드시 바뀌어야만 한다.
이 나라 대통령이 농정 공약에서 “농업은 더 이상 사양산업이 아니다. 식량주권이 걸린 국가안보의 핵심산업이다”, “기후위기 시대,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해 K-농업강국을 만들겠다”, “농정 대전환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겠다”는 등 온갖 혹할만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종잇장이나 마이크만으로는 새 정부 농정의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질 않는다. 농부들의 한숨을 지우고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한낮 땡볕아래 일하다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같은 속시원한 정책을 기대한다.
농심이 메마른다는 것은 우리 식탁이 위태로워진다는 뜻이며, 공동체의 뿌리가 흔들린다는 말과 같다. 농민이 떠난 땅에는 기계는 남을지 몰라도, 온기와 숨결은 사라지고 만다.
쌀값을 지키는 일은 단순한 경제가 아니라 생명을 존중하는 가장 기본적인 약속이다. 올해는 여태까지와는 확연히 달라졌으면 좋겠다. 애를 써서 키운 농산물들이 제 대접을 받아 이 땅의 농부들이 환하게 웃으며 어깨춤 신명나게 추는 ‘사람사는 세상’이 오길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