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박용수> 어떤 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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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박용수> 어떤 광부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
  • 입력 : 2020. 10.28(수) 13:15
  • 편집에디터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
"스무 살까지만 해도 나만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서른 살 즈음에 내 속에 나 말고도 또 다른 내가 숨 쉬고 있는 거예요."

순수한 아이였다. 꼭 다문 입, 동그란 눈, 야무진 아이였다. 십여 년 전 반장이었던 모습이 그랬다. 호기심 많아서 세상 신비한 보물은 다 캘 듯한 소녀였다.

"그게 바로 사회적 자아였던 것 같아요."

소주 몇 잔 홀짝이는 꼭 다문 입술에서 여고생의 모습이 엿보였다.

"개인적 자아, 열 살 무렵 나도 모르는 사이, 그 녀석은 내 안에 자리를 잡았어요. 그리고 서서히 저를 괴롭혔죠. 나에게 자신이 원하는 걸 보채기도 하고 포기하도록 했어요. 자꾸 요구하고 좌절하도록 한 것이지요. 끊임없이 힘을 키워가며…. 그러는 사이 그럴싸하게 세상 사는 방어기제를 만들기도 했어요. 20대까지만 해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단지 지시를 충실히 따르면 되는 실무자로 살았기 때문에 개인적 자아만 잘 관리하고 다독이면 충분했거든요."

지도를 펼쳐본다고 세상이 다 보이는 것은 아닐 터이다. 크게는 볼지라도 말이다. 디테일하게 보려면 최소한 배낭을 메고 직접 산에 올라야 한다.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쑥 자란 것처럼 보였다. 감 하나 대추 한 알이 여물기까지 수많은 천둥과 벼락이 들어가야 한다는 시가 떠올랐다. 왜 인간은 시련을 겪어야 익어가는 것일까.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오늘의 몫을 캐내는 일이지 싶구나. 이미 캐낸 채탄은 어제가 되고 또 캐내야 할 내일이 있는 것 말이다. 캐낸 만큼 넓어지기도 하지만 비워지기도 하지. 삶이란 그렇지 않겠니."



"어느 날, 친구와 대판 다퉜어요. 넌 왜 너만 생각하느냐는 거에요. 그럼 자기가 자기를 생각하지, 누가 생각하느냐고 말했지요. 나는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저보고 아이래요. 아이, 다 참아도 아이라는 말을 듣고는 견딜 수 없었어요.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죽겠다고 마음먹으니, 개인적 자아가 슬금슬금 물러나더군요. 그러면서 미안하데요."

순진한 아이였는데, 겉모습이 성숙해진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세계를 찾는 광부지만, 그 황금을 혼자 캐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괭이질을 했어요. 위로 아래로 좌우도 살펴야 한다는 것을 서른이 되어서야 알았어요.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또 그들과 사회적 네트워크가 단단해지면서 새롭게 숨을 쉬고 있는 더 성숙해진 자아를 발견했어요. 더 넓어진 공간만큼 숨쉬기도 편했고 활동하기도 좋았어요. 그게 바로 사회적 자아였어요"

그녀의 표정이 많이 밝아 보였다. 자아의 껍질을 뚫고 나오기까지 고통이 심했을 것이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이것이 십 대, 또는 이십 대 때 다 만들어져 각자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더군요. 남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도 하고 자신의 지위도 확보하고 인정도 받고, 그러는 게 다 사회적 자아가 작동한 것에서 나온 것 같아요. 내 안에는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과 어울리며 만들고 키워가야 할 내가 있는 것 같아요."

제법 취기가 몰려오는지 입가에 옅은 미소가 흘렀다. 긴장이 좀 풀렸는지 딱딱하게 굳어 보이던 자세가 제법 유연해졌다.

"표층적 자아와 심층적 자아, 그러니까 도덕과 욕망, 자아와 초자아 사이에서 탁구공처럼 왔다 갔다 하며 사는 게 우리네 삶이지 싶다. 나 역시 도덕적 존재로서 미학과 자유인으로서 본능 사이에 조화를 이루고 살고 싶거든."

"무작정 채굴만 했어요. 선생님, 근데 서서히 보여요. 어떻게 괭이를 휘두르고 무엇을 캐야 할지 말이에요.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를 조화시켜 나가야 해요. 동생은 아직 어리지만, 형과 비슷해지도록 더욱 보살펴서, 친구처럼 서로 지낼 때, 비로소 한 사람의 내가 만들어지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평생 삶을 캐는 광부들인지 모른다. 모두 황금을 찾아 죽음도 불사하고 치열하게 생의 갱도 속으로 들어간다. 갱도는 또 얼마나 길고 어두우며 차갑던가. 파고 또 파도 끝이 닿지 않는 피안, 우리가 캐낸 것은 황금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흙과 자갈이고 바위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깊숙이 생을 파고든 광부였다. 삶에 정답이 없듯 인생이라는 갱도 속에서는 어떤 광부든지 초짜이다.

그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조금 흔들렸지만, 자신감은 훨씬 있어 보였다. 문을 열려다 한번 휘청거린다. 붙잡으려는 내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 같은 내 사회적 자아….'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