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라의 현대미술 산책 11> 현대미술의 기억법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조사라의 현대미술 산책
조사라의 현대미술 산책 11> 현대미술의 기억법
수집과 기록, 재가공, 재인식…역사의 저장고 ‘아카이브’||2000년대 이후 아카이빙 전략 동시대 미술의 방법론 대두||광주비엔날레·베니스비엔날레 등 국제전에서 두드러져
  • 입력 : 2020. 09.06(일) 14:09
  • 편집에디터

앤디 워홀, '타임 캡슐–27' (재)광주비엔날레 제공

팝아트의 아이콘 앤디 워홀(Andy Warhol)에게는 매우 비밀스러운 작품이 하나 있다. 그의 사후까지 극소수 지인들 외에는 아무도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 온갖 기념품과 잡동사니 컬렉션 '타임캡슐-27'이 바로 그것이다. 앤디 워홀은 1974년부터 영수증, 신문 기사 등 잡다한 물건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1987년 사망하기까지 13년 동안 상자 가득 채워나갔다. 창고에는 600개 이상의 박스가 쌓여갔다. 그는 인생 전체를 아카이브 한 것이다. 당대 최고의 부와 명성을 누렸던 앤디 워홀은 왜 그토록 자신을 수집하고 기록 했던 걸까?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1995년 출간한 '아카이브 열병 : 프로이트적인 흔적'에서 부재하는 기록과 기억의 근원을 찾아 회귀하려는 아카이브를 향한 반복적인 강박을 '아카이브 열병'이라고 언급했다. 편집광적인 아카이브 '열병'이 후세대에게 팝아트 거장의 내밀한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앤디 워홀의 컬렉션은 거대한 인류 박물관을 연상케 한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 총감독의 2010광주비엔날레 '만인보'에서 공개된다. 지오니의 방법론은 2013베니스비엔날레 '백과사전식 전당'에서 더욱 확장되었다.

2000년대 이후 동시대 시각 예술 현장에서 아카이브가 전시 기획의 전략으로 작용하고 있다. 2004년 미술사학자 할 포스터(Hal Foster)가 옥토버지에 '아카이브 충동' 글을 게재하면서 촉발되었다. 오늘날 아카이브적 문법이 활성화된 원인은 1990년대 이후 인터넷 문화와 디지털 기술의 확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지와 텍스트, 영상이 무한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보다 역사와 기억, 자료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아카이브 전략은 기존 서사와 이미지, 사건 등을 가공 및 편집해 대안적 담론과 논의를 촉진하면서 현대미술의 영역을 확장해나간다. 특히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의 '아틀라스 어떻게 등 뒤에 세계를 짊어질까?'는 '아카이브 열병'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동시대 전시로 회자된다. 디디-위베르만은 2010-2011년 독일 근대 미술사학자이자 도상해석학 창시자인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에 대한 오마주적인 전시를 기획한다. 바르부르크의 미완성 프로젝트 '므메모시네', 다이어그램, 스케치북, 드로잉 등 각종 연구 자료 등을 선형적 연대가 아닌 현대미술과의 연관성에 천착하면서 과거와 도큐멘타에 대한 재해석과 재구성의 미학적 프레임을 구축해 선보였다.

이외에도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의 2008년 '아카이브 열병: 현대미술의 도큐먼트 사용'과 세계 각국 주요 전시를 한데 엮은 2008광주비엔날레 '연례보고'를 비롯해서 캐롤린 크리스토프 바카르기예프(Carolyn Christov-Bakargiev)의 2012년 카셀도큐멘타 등 과히 최근 10여 년 동안 동시대 미술계는 아카이브 열병으로 뜨거웠다. 시각 예술을 넘어 인류 지식을 수집 및 기록하면서 새로운 시공간을 창출하려는 인간 욕망이 투영된 집합체들이었다.

때론 동시대 미술에서 아카이빙 방법론은 인류 상처의 시각적 저장고로서 수면 아래 과거와 역사를 끊임없이 재인식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작가들은 역사 하부를 밝히고 데이터화하며 재가공하면서 갓 잡은 생선처럼 생명력 있는 작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다큐멘터리처럼 태평양 전쟁의 기억을 현재화하는 야나기 유키노리(Yanagi Yukinori), 레바논 현대사를 담은 왈리드 라드(Walid Raad), 전쟁 희생자를 다룬 토마스 히르슈호른(Thomas Hirschhorn) 등 작가들은 단순히 박제화된 사료로만 인식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다차원적인 관계를 유도하며 유영한다.

프로이드의 무의식처럼 소멸됐거나 비밀리에 감춰진 것을 발견하려는 본능이 개인과 집단, 민족의 기억들을 부단히 소환하면서 각인시키고 있다. 기록하고, 수집하며, 기억하려는 인간의 지독한 아카이브 '열병'과 '충동'으로 동시대 미술은 더욱 사회와 밀착하면서 다층적인 노정을 이어간다.

독일 ZKM이 2016년 '아비 바르부르크. 므네모시네 이미지 아틀라스'에 발행한 브로슈어 표지. ZKM 홈페이지 제공

토마스 히르슈호른, '박힌 페티시', 2006. (재)광주비엔날레 제공

마시밀리아노 지오니 기획의 2010광주비엔날레 '만인보' 전시 전경, (재)광주비엔날레 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