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전등화' 조선의 운명을 건져낸 울돌목, 명량 대해전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풍전등화' 조선의 운명을 건져낸 울돌목, 명량 대해전
원균의 칠천량 전투 참패로 조선 수군 궤멸||이순신 3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수군 재건||조선의 명운을 가를 울돌목 명량해전 준비||生卽死 死卽生 정신무장, 울돌목 지형 이용||판옥선 13척으로 왜선 수백 척에 맞서 대승
  • 입력 : 2020. 08.11(화) 17:01
  • 편집에디터

1597년 9월 16일 조선의 운명을 가른 명량전투 대해전을 재현하고 있는 모습.

고뇌하는 이순신

명량대첩비

진도 벽파진 충무공 전첩비

13대 133, 기적 같은 승리

300척을 자랑하던 무적의 조선 수군은 이순신이 3도 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난 뒤인 1597년 7월 15일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 된다.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다 죽임을 당하였고, 300척을 자랑하던 무적의 조선 수군 함대는 하룻밤 사이에 160여 척이 격파된 후 남해 바다에 수장된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빠져나온 12척의 배만이 격침의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왜군은 칠천량 승리 뒤 한산도 일대와 고성 일대 포구에 남겨진 조선 수군의 배도 찾아내 모두 불태웠다. 7년 동안 단 한번 당한 참패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고,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가 된다.

7월 18일 패전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듣고 있으려니 통곡이 터져 나오는 것을, 이길 길이 없다."라고 적고 있다.

이 풍전등화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조선의 운명을 건져낸 전투가 남도 땅 해남과 진도 사이의 바닷길, 명량에서 벌어진 '명량대첩'이었다.

명량대첩은 이순신의 해전 가운데 가장 눈물겹고 감동적인 전투였다. 조선 수군이 사실상 궤멸 된 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수군을 동원해 일본 수군의 대함대에 맞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당시 명량해전 직전까지 이순신이 동원할 수 있었던 배는 판옥선 13척과 초탐선 뿐이었다. 초탐선은 첩보선으로 활용할 수는 있었지만, 승선 인원이 적고 무장력도 약해 실제 해전을 수행할 수 없는 수준의 배였다. 그에 반해 칠천량에서 승리한 일본 수군은 최소 133척 이상의 군함으로 이뤄져 있었다. 일본의 군함 수는 「이충무공전서」에는 333척, 「징비록」에는 200여 척, 「명량대첩비」에는 500여 척, 「난중일기」에는 133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이 일본군과 싸운 전투는 대략 23차례, 그는 모든 전투에서 이겼다. 그중 가장 빛나는 전투가 바로 최악의 조건에서 싸워 정유재란의 운명을 사실상 결정한 명량해전이었다. 그는 명량에서 자신의 모든 역량을 던져 꺼져가는 조선의 운명을 지켜냈다.

'난중일기'를 통해 본 명량대첩

울돌목이라 불리는 명량해협(鳴梁海峽)은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의 화원반도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이의 좁고 긴 바다다. 길이 1.5킬로미터인데 평균 폭이 500미터 정도이지만, 양쪽에 암초가 있어 좁은 곱은 300미터가 채 못 된다. 이 암초에 조류가 부딪히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울돌목'이라 불린다. 울돌목의 한자어가 '명량(鳴梁)'인데, 하루에 네 번 물길이 바뀌는 급류이고 좁은 물길이다. 싸움이 시작된 11시, 조류는 왜군에게 유리한 순류였고 조선 수군에게는 불리한 역류였다. 왜군은 그들에게 유리한 순류를 타고, 조선 수군을 향해 돌진해왔다.

명량대첩이 이루어진 9월 16일 그날의 모습을 가장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은 충무공 이순신이 직접 남긴 기록, 「난중일기」다. 난중일기 속에 남은 명량대첩을 살펴보자.

"이른 아침 별망(別望)군이 다가와 보고하기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우리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을 향해 오고 있다고 했다. 즉각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중과부적임을 알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2마장(800미터)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현자 등 각종 총통을 풍뢰(風雷, 바람과 우레)같이 쏘았고 배 위에 빽빽이 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그러나 적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배에 탄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면서,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요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하여 적을 쏘고 또 쏘아라.' 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본즉 먼바다로 물러서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그 틈을 타서 더 대들 것이니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내리는 깃발을 세우게 하고, 또 초요기(招搖旗)를 세웠더니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다가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안위야, 너는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하니 안위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장으로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원하지 않았으니 죄를 어찌 피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또한 급하니 우선 전공을 세우게 한다.'고 하였다.

두 배가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에 지시하여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가 붙듯이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돌덩어리로 무수히 마구 쳐대다가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3척의 적이 거의 다 엎어지고 쓰러질 때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들이 뒤따라와서 힘을 합해 적을 사살하니, 몸을 움직이는 적은 하나도 없었다. 투항한 왜인 준사(俊沙)는 안골포의 적진으로부터 항복해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더니 말하기를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저 자가 안골포 적장 마다시다.' 라고 했다.

나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를 던져 뱃머리로 낚아 올린 즉, 준사가 기뻐 날뛰면서 '바로 마다시다' 라고 말하므로 곧 명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이때 우리 배들은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북을 울리며 일제히 진격하여 지자·현자 포를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퍼부어 적선 31척을 쳐 깨뜨리자, 적선은 퇴각하여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우리 수군은 싸웠던 바다에 그대로 묵고 싶었으나, 물결이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인데다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唐笥島, 전남 신안군 암태면)로 옮겨 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천행(天幸)이었다."

13대 133의 싸움은 이렇게 끝이 난다. 그리고 세계 해전 사상 전무후무한 10:1의 절대 불리한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다. 이순신은 일기에서 천행이라 했지만, 이순신의 뛰어난 전술·전략과,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어 낸 리더십이 이루어 낸 기적같은 승리였다.

이순신이 명량에서 지켜 낸 것은 스스로의 안위나 따르던 병사들의 목숨만은 아니었다. 그가 지켜낸 것은 숨이 멎기 직전의 '조선의 운명'이었다.

명량대첩 해전사 기념관

해남 문내면 동외리 충무사

명량, 현장을 찾다

명량 부근에는 당시의 대첩을 기억하는 각종 기념물이 건립되어 있다. 진도대교를 건너 삼별초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용장산성을 지나면 나오는 벽파진도 그중 하나다. 벽파진은 진도대교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배들이 들렀던 주요 기항지였을 뿐 아니라 해남과 진도를 연결하는 중심 항구였다. 그러나 오늘 진도대교가 놓이면서 벽파진은 원래의 역할을 잊은 채 500여 년 전 이곳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역사만을 품고 있었다.

벽파진은 명량대첩이 일어나기 전날까지 16일간 이순신의 수군이 머물렀을 뿐 아니라 9월 7일과 9일 두 차례 왜군과 전투를 치른 현장이기도 했다. 이곳 벽파진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바위 정상에는 두 차례의 전투뿐만 아닌 명량대첩까지 상세하게 기록한 비가 서 있다. 이은상이 글을 짓고 진도 출신인 소전 손재형이 글을 쓰고, 진도군민들이 1956년 세운 벽파진전첩비다. 벽파진전첩비의 몸돌을 받치고 있는 거북 즉 귀부는 바닥돌을 깎아내어 만들었는데, 규모가 엄청나다.

전첩비에는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이더니라.…… 예서 머무신 16일 동안 사흘은 비 내리고 나흘은 바람 불고 맏아들 회와 함께 배 위에 앉아 눈물도 지으셨고, 9월 초7일 적선 13척이 들어옴으로 물리쳤으며,…… 삼백 척 적의 배들 산같이 깔렸더니 울돌목 센 물결에 거품같이 다 꺼지고 북소리 울리는 속에 저 님 우뚝 서 계시다. 거룩한 님의 은공 어디다 비기오리. 피 흘린 의사혼백 어느 적에 사라지리. 이 바다 지나는 이들 이마 숙이옵소서." 라고 새겨져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후 이곳 벽파진을 찾아 눈물을 흘린다.

명량대첩을 기록한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는 조선 숙종 14년(1688) 건립된 것으로 전라우수영 성터가 있는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서 있다. 예조판서 이민서가 글을 짓고 판돈녕부사 이정영이 글을 썼는데, 전자(篆字)는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의 글씨다. 대첩비 옆은 이순신을 기린 사당 충무사로 전국 21개 사당 중 하나다.

그런데 대첩비는 일제 강점 시기 큰 시련을 겪는다. 일제는 왜군에게 가장 큰 상처를 안긴 이순신의 흔적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처음 폭파 계획을 세웠다가 여의치 않자, 서울로 옮겨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묻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우수영 지역 유지들은 명량대첩비를 되찾기 위해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조직하고 전라남도 경찰부와 조선총독부에 수소문한 끝에 대첩비의 소재를 알아낸다. 그러나 운반 수단이 여의치 않았던 당시 대첩비를 우수영으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미군정청의 협조를 얻어 비석을 미군 트럭에 실어 서울역으로 옮긴 후 목포까지는 열차로, 목포에서 선박을 이용하여 우수영 선창으로 가져온 후, 1947년 문내면 학동리 충무사 경내에 다시 세운다. 그리고 2011년 원래의 위치인 현 위치로 되돌아온다.

이제 명량대첩의 현장을 찾아보자. 명량대첩의 현장, 그 현장에 명량대첩의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 명량대첩 기념공원(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산 36)이다. 기념공원에는 '명량대첩 해전사 기념전시관'이 있고, 임진왜란 당시 국난을 극복한 가장 큰 역할을 호남사람들이 해냈다는 이순신의 말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를 새긴 비도 서 있다. 멀리 명량을 바라보는 진도 땅 산 정상부에는 60미터 높이의 '명량대첩 승전 전망대'도 보인다.

명량대첩의 영웅은 누가 뭐래도 이순신이다. 이곳에는 최대·최소 규모의 이순신 동상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진도대교 넘어 진도 녹진 바닷가에 서 있는 이순신 동상이 '지휘하는 이순신상'인데, 총 높이 30미터로 국내 최대 크기다. 동상은 치열한 해상전투가 벌어질 당시 왼손에 칼을 잡고 오른손으로 지휘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동상에는 울돌목 바다의 거세고 빠른 유속과 해전의 긴박감을 이끄는 장군의 비장함이 묻어있다. '지휘하는 이순신상' 맞은편인 해남 우수영에 세워진 동상이 '고뇌하는 이순신상'이다. 고뇌하는 이순신 동상은 높이 2m로, 국내 이순신 동상 중 가장 작다. 우수영 바다 속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는데, 밀물 때 발목까지 물이 차올라 마치 바다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썰물 때는 주춧돌 아래까지 물이 빠진다. 평상복 차림에 칼 대신 지도를 들고 있는 모습의 동상은 13척의 적은 병력으로 133척을 무찌르기에 앞서 외롭게 고민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상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다.

울돌목, 명량에 가면 해전에 앞서 고뇌하는 이순신과 해전을 지휘하는 이순신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