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일제가 한말 호남의병 거괴로 칭한 나주출신 형제 의병장 김태원·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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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일제가 한말 호남의병 거괴로 칭한 나주출신 형제 의병장 김태원·김율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 합류, 무동천·토천 전투 대승 이끌어 ||김태원, 기삼연 순국후 동생 율과 함께 ‘호남의소’ 조직 항일투쟁||1908년 어등산서 일군과 전투, 부하 23명과 함께 장렬한 최후 ||김태원의 손자 김갑제, 1980년 5·18민중항쟁 진실 알리기도
  • 입력 : 2020. 05.05(화) 17:50
  • 편집에디터

한말 호남 최대 의병항쟁지 가운데 한 곳인 광주 광산구 어등산 전경.

광주 서구 농성광장 김태원 의병장 동상

형제가 의병장이 되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전라도 의병들을 토벌한 기록인 '전남폭도사'를 보면, 일제는 우리 의병을 폭도나 비도 혹은 적으로, 의병장을 적장이나 수괴(首魁) 혹은 거괴(巨魁)로 표현하고 있다.

'전남폭도사'는 1913년 일경 전라남도 경무과에서 작성한 기록인데, 1906년부터 1907년을 제1기, 1908년을 제2기, 1909년을 제3기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각 시기별 거괴로 제1기에는 최익현·고광순·기삼연을, 제2기에는 김태원·김율을, 제3기에는 전해산·심남일·안규홍을 꼽고 있다. 일제가 제2기의 거괴로 꼽은 김태원과 김율은 형제다.

일제는 이들 형제를 동학당 이후 가장 용맹하고, 그 신출귀몰함이 난형난제(難兄難弟)라고 칭하면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참봉이라 호칭되던 김태원이 인솔하는 의병부대를 '참봉진', 박사로 불리던 김율 의병부대를 '박사진'이라 불렀다.

1908년 일제가 거괴로 지목한 죽봉 김태원(金泰元, 1870~1908), 그는 1870년 나주시 문평면 북동리 상하마을(갈마지 마을)에서 태어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비분강개 중 1907년 장성에서 기삼연이 거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규합하여 '호남창의회맹소'에 합류, 선봉장이 된다.

9월, 고창 문수사 전투를 시작으로 법성포, 장성, 영광, 함평, 담양 등지에서 일군 토벌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특히 1908년 설날 담양 무동촌(현 담양군 남면 무동리)에서 '의병잡는 귀신'으로 소문난 길전(吉田)이 이끈 광주수비대를 격파하였고, 이어 2월 24일 장성 토천(土泉)에서 일군과 공방전을 벌여 대승을 거둔다. 무동촌 전투와 토천 전투는 한말 의병사의 쾌거다.

무동촌에서 길전이 이끄는 광주수비대를 격파하던 날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이 순창에 은신 중 체포되자, 기삼연을 구하기 위해 30여 의병을 이끌고 광주 경양역까지 추격한다. 그러나 기삼연은 이미 광주경찰서로 호송된 뒤였다. 일군은 김태원 부대가 기삼연을 탈옥시키려는 움직임을 눈치채고 다음 날 정식 재판 없이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에서 총살한다. 기삼연이 순국하자, 김태원은 의병장이 되어 동생 율(聿, 1881~1908)과 함께 독립부대인 '호남의소'를 이끈다.

일제는 김태원·김율 의병부대를 잡기 위해 제2 특설순사대를 편성하고, 광주수비대와 헌병을 총 출동시킨다. 그런 가운데, 3월 29일 김율이 광주군 소지면 신기리(현 송정)에서 일군에 붙잡혀 광주감옥에 수감되고, 형 태원도 광주 박산마을 뒤 어등산에서 거미줄처럼 쳐놓은 일제 밀정의 제보로 출동한 일군에 의해 순국한다. 1908년 4월 25일, 서른아홉의 나이였다. 다음 날 일제는 형 태원의 시신을 확인한 김율마저 총살한다. 이로써 김태원·김율 형제의 의병 활동은 끝이 나지만, 김태원의 부하였던 조경환, 오성술, 전해산 등이 독립부대를 결성하면서 1909년까지 계속된다.

한말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은 "기발한 전략을 많이 이용하여 1년여 동안 수백의 일병을 죽였으며, 부하를 엄히 다스려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고 김태원 의병부대를 평가했다. 정부는 김태원과 아우 김율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두 형제의 충절을 기린다.

어등산에서 최후를 맞다

한말 남도는 최대 의병항쟁지였다. 그중 최대 격전지는 김태원 의병장이 일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23명의 부하와 함께 전사한 어등산이다. 어등산에서의 격전은 김태원 부대만이 아니었다. 김태원 의진의 선봉장이었다가 독립의군을 이끈 조경환 의병장 부대원 20여 명과 양동환 의병부대 10여 명도 어등산에서 전사한다. 형 김준의 죽음을 확인하러 갔다가 총살당한 김율의 순국지도 어등산이었다. 어등산은 김태원 의병장을 비롯, 50여 명 이상이 전사한 전국 최대 격전지 중 한 곳이다. 일제는 김태원 의병장을 총살했던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 했다.

"박산동은 광주군 어등산록에 있는 한 마을로서 앞에는 황룡강이 흘러서 적의 근거지로서는 자못 중요한 지점이었다. 수색대는, 석전(石田) 중위가 이끄는 기병대와 같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오후 4시 30분경 목적지에 다다라 제1 수색대는 좌익으로부터 제2 수색대는 우익, 석전 기병대는 우측 배면, 제3 수색대는 좌측 배면 등 사면을 포위하는 형세를 갖추고서 곧바로 맹렬한 사격을 교환하였는데, 오후 7시까지 적은 전부 궤산하였다. 이때 제3 수색대의 전방 약 300m 지점의 바위굴로부터 비교적 미복을 입은 폭도 1명이 도주하자, 이를 수괴로 인정한 수색대 일본인 순사 와좌(窪佐) 병위는 삼택(三澤) 기병 일등졸과 같이 비 오듯 쏟아지는 탄환을 무릅쓰고 급히 추격하여 생포하려 하였다. 그러나 교묘하게 도주하여 추격이 어려워지자 사격이 가능한 지점에서 곧바로 사격을 가하여 이를 죽였다. 적이 궤산한 후에 시신을 검토했는데, 은색 두루마기와 흰색 비단의 저고리를 착용하였고, 쌍안경 1개, 조선도 1개, 자석 1개, 화약통 1개, 서류 약간을 소지하였다. 피체된 의병의 증언에 의하면 이 사람이 바로 적장 김태원으로 판명되었고, 그가 휴대한 쌍안경은 본년 2월 2일 무등산 전투에서 전사한 길전(吉田) 수비대의 군조(軍曺) 천만포건(川滿布建)이 휴대하다 빼앗긴 것으로, 이후 그는 항상 이 이기(利器)에 의하여 멀리서부터 일본군의 행동을 볼 수 있어서 진퇴를 교묘히 할 수 있어서 토벌대는 적지 않은 고충을 일찍부터 겪어오다가 이번에 그가 죽으면서 함께 이를 탈환할 수 있었다. (제2순사대에 관한 편책, 내부 경무국,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08)

당대의 유학자 오준선은 그의 저서 '후석유고'에 이날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연초부터 '김태원 잡기 15일 작전'을 3번이나 실시한 일본군 기병대와 제2 순사대가 이날 박산마을을 사방에서 포위하자, 이를 알아차린 의병장 김태원은 부하들에게, "나의 죽음은 의병을 일으킨 날에 이미 결정하였다. 다만 적을 멸하지 못하고, 장차 왜놈의 칼날에 죽게 되었으니 그것이 한이다.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으니 뒷일을 힘써 도모함이 옳다"며 부하들에게 피신을 명령한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대장을 홀로 남겨둘 수 없다"며 기어이 남겠다는 부하 김해도 등 23명은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다 모두 함께 순국하였다."

앞서 한 달 전 일군에 체포되어 광주감옥에 갇혀 있던 김태원의 동생 김율 의병장은 관찰사가 신문하려 하자, "너는 왜놈의 앞잡이로서 감히 백성 앞에 나설 면목이 있느냐"라며 큰소리로 호통을 치는 등 죽음을 앞두고서도 독립정신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 김율 역시 형의 시신을 확인시킨 일본 군경에 의해 형의 순국 다음 날인 4월 26일 어등산에서 총살당한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호남 제일의가(湖南第一義家)로 기려야

김태원의 처 낙안 오씨는 어린 남매를 키운 후 1919년 3월 1일 "나라가 망했으니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며 남편의 뒤를 이어 자결한다.

김태원 의병장의 아들 동술은 일제 경찰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고, 반신불구가 된다. 외동 따님은 이름을 바꾸어 신분을 숨긴 채 부산으로 시집간 뒤 소식이 끊긴다. 1975년 농성광장에 김태원 의병장 동상이 세워진다는 소식을 접한 부산의 외손자가 찾아와 손자 김갑제를 처음 만난다. 가슴 저린 통한의 가족사다.

김태원 의병장의 손자 갑제는 1980년 5월 민주항쟁의 한복판에 나선다. 5월 26일 계엄군의 탱크 진입을 온몸으로 막기 위한 '죽음의 행진'에 참가한다. 홍남순 변호사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김성룡 신부와 함께 광주를 탈출, 서울로 올라가 김수환 추기경에게 광주의 진실을 전한다. 할아버지의 뜨거운 피가 손자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호남의병사의 권위자인 순천대학교 홍영기 교수는 '만고의 충절이다'며 "죽봉 김태원, 청봉 김율 일가는 마땅히 '호남제일의가(湖南第一義家)'로 기려야 한다"고 말한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였던 민세 안재홍은 김태원 아들 동술에게 '정의로움을 태산과 같이 무겁게 생각하라'라는 뜻을 지닌 '의중태산(義重泰山)'이라는 휘호를 써 보낸다.

한말 의병들의 은거지 어등산 토굴

나주 남평 갈마지마을 김태원 의병장 생가터

나주 남산공원 김태원 의병장 기적비

함평공원에 세워진 김태원죽봉의사충혼비

김태원·김율, 현장을 찾다

김태원·김율 형제 의병장을 품고 있는 현장은 많다. 출생지인 나주 문평에는 생가터가, 나주 남산에는 '죽봉김태원장군기적비'와 김태원의 시를 새긴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그리고 두 분의 순국지인 어등산에는 그의 혼이 남아 있고, 광주 농성광장에는 김태원 의병장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 앞길 죽봉로는 김태원 의병장을 기리는 도로다.

김태원·김율 형제 의병장이 태어난 곳은 전남 나주군 거평면 북동리 갈마지 마을이다. 오늘 거평면은 문평면으로 바뀌어 문평면 관할이지만, 나산읍내에서 더 가깝다. 형제 의병장이 태어나고 자란 당시의 생가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없어졌고, 지금 파란 양철 지붕은 뒤에 만든 집이니, 생가가 아닌 생가터만 남은 셈이다.

복원된 나주읍성의 남문인 남고문(南顧門)에서 나주중학교 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 올라가면 나주 시민공원으로 조성된 남산이 나온다. 남산에도 김태원 의병장을 기리는 '죽봉김태원장군기적비'와 형 태원이 동생 율에게 순국 한 달 전에 써준 시를 새긴 '죽봉선생 친필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시비에 새겨진 시의 제목은 '사랑하는 아우에게 주다'라는 뜻의 '여사제심서(與舍弟心書)'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國家安危在頃刻) 의기남아가 어찌 앉아 죽기를 기다리겠는가(意氣男兒何待亡) 온 힘을 쏟아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이니(盡忠竭力義當事) 백성을 건지려는 뜻일 뿐 명예를 위하는 것은 아니라네(志濟蒼生不爲名). 전쟁은 죽으려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가는 것이 옳으리라(兵死地含笑入地可也)" 무신(1908)년 2월 19일 형 준이 쓰다.

형은 이미 두 형제 앞에 죽음이 있을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을 알고 거병했지만, 죽음 앞에 두려움이 없을 수 없다. 형은 독립의진을 이끌고 있는 동생에게 "나라의 안위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사나이는 전장에서 나아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웃음을 머금고 죽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격려를 보낸다. 뜨거움이 담긴 비장한 시다.

김태원 의병장의 순국지는 어등산이다. 1908년 4월 25일 23명의 부하와 함께 치열한 접전 끝에 산화한다. 일제는 먼저 체포된 동생 김율로 하여금 형의 시신을 확인시킨 후 총살한다. 동생 김율이 산화한 곳도 어등산인 셈이다. 김태원의 무덤은 한때 그곳 어등산에 묻혔지만, 최대 의병 격전지 어등산에서 형제 의병장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의병들의 은신처인 토굴만이 남아 당시의 이야기를 전해 줄 뿐이다. 호남대학교 운동장 쪽에 '어등산 한말 호남의병전적지'라 새긴 비가 서 있다.

죽봉로가 시작되는 광주시 서구 농성광장에는 죽봉 김태원 장군 동상이 서 있다. 왼손에 총을 들고 두 눈 부릅뜬 채 바라보고 있는 곳은 장군이 순국한 어등산이다. 1975년 뜻있는 이들의 정성을 모아 처음 건립된 후, 1998년 오늘의 모습으로 재건립된다. 동상은 조각가 전병근의 작품이다. 동상 바로 밑에는 남도 의병사 최고 권위자인 홍영기 교수가 짓고, 학정 이돈홍의 글씨로 새긴 죽창 모습의 기념비가 함께 서 있다. 동상의 기단부에는 형 태원이 동생 율에게 준 편지가 새겨져 있는데, 명필이다.

1908년 설날 벌어진 무등산 자락 전투 현장인 담양 무동촌에는 '김태원의병장전적비'가 서 있고 담양초등학교 안남분교(지금은 폐교)에는 김태원 의병장 동상이 서 있다.

척화비가 남아 있는 함평공원에는 오세창의 글을 새긴 '김태원죽봉의사충혼비(金泰元竹峰義士忠魂碑'도 서 있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