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나주 송죽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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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나주 송죽마을
이돈삼 / 여행전문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 입력 : 2020. 03.26(목) 13:26
  • 편집에디터

동백꽃 낙화

동백꽃이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진녹색 이파리 사이에서 빨갛게 피어난 꽃이 시선을 오래 붙든다. 후두둑- 소리를 내며 통째로 떨어지는 꽃봉오리도 매혹적이다. 어느새 동백꽃 무더기가 땅에 지천으로 깔렸다. 빨간 융단이라도 깔아놓은 것 같다. 꽃으로 깔아놓은 레드카펫이다. '꽃탄자'다.

봄이 무르익으면서 연출한 풍경이다. 절로 발걸음이 오래 머문다. 이내 마음도 한없이 늘어진다. 데바쁜 건 동박새뿐이다. 연신 재잘거리며 포르릉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시 나뭇가지로 내려앉는다. 꽃이 달곰한 모양이다.

모름지기 꽃은 활짝 피었을 때 아름답다.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동백꽃은 떨어진 꽃으로도 우리를 황홀하게 해준다. 시나브로 내 가슴에도 빨간 동백꽃 한 송이가 피어난다. 꽃으로, 낙화로, 내 마음의 꽃으로 세 번 만나는 동백꽃이다.

내 마음이 금세 금사정의 동백나무로 향한다.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금사정에 있는 나무다. 피맺힌 사연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동백나무다. 꽃이 다른 데보다 더디 핀다. 남도의 동백꽃이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낼 때 하나씩 피기 시작한다. 더 선명하게, 더욱 처연하게.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애절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동백 아가씨'가 귓전에 맴돈다. 나도 언제부턴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빨갛게 멍이 든…. 온몸에 전율이 일어난다. 빨간 동백꽃이 눈에 선하다.

금사정의 동백나무는 키가 6m, 뿌리 부분의 둘레가 2.4m에 이른다. 어른 두 명이 두 팔을 서로 벌려야 겨우 닿을 정도다. 그럼에도 세월의 풍상이 비켜 간 듯하다. 나무의 근육이 울퉁불퉁 튼실하다. 폭은 동서 7.6m, 남북 6.4m로 넓다. 사방으로 가지를 고르게 펼치고 있다.

나무의 나이가 500살이 넘었다. 이파리도, 꽃도 싱싱하다.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외려 젊은 나무가 피운 꽃보다 더 낫다. 새빨간 꽃잎에 노란 꽃술이 선명한 색의 대비를 이뤄 더욱 강렬하다. '누구보다도 그대를 사랑한다'는 꽃말처럼 정열적이다.

붉디붉은 꽃봉오리가 후두둑- 떨어진다. 목이 부러지듯 떨군 꽃봉오리가 땅에 널브러진다. 애틋하다. 동백꽃이 시인 묵객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땅에 떨어진 동백 꽃봉오리가 연보랏빛 봄까치꽃, 노란 민들레꽃과 어우러져 처연하게 빛난다. 그 모습이 마음 깊은 데까지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금사정의 동백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사연이 꽃보다 더 애절하다. 1519년(중종 14년), 개혁정치를 주창하던 정암 조광조(1482∼1519)가 유배길에 오른다. 당시 정암은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벼슬아치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력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하지만 훈구세력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다.

정암을 따르던 유생들은 울분을 참지 못했다. 태학관 유생들이 임금에게 정암의 억울함을 주청했다. 죽음을 무릅쓴 호소였다. 하지만 묵살당했다. 정암은 37살 나이로 화순 능주에 유배돼 죽임(賜死)을 당했다.

정암을 따르던 많은 유생들은 엄습해오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낭당히 맞설 수 없었다.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속에 품었던 뜻을 잠시 접고, 도성을 떠났다. 유생을 대표해 상소를 올린 임붕, 나일손, 정문손, 김식, 진이손, 진삼손, 정호 등 11명이 그들이다.

낙향한 유생들은 금강십일인계를 조직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지만, 절의만은 굳게 지키며 살자고 결의했다. 모임 장소로 영산강변을 정하고, 그 자리에 금사정(錦社亭)을 세웠다. 정자 앞에는 동백나무를 심었다.

유생들에게 동백나무는 지조와 절개의 다른 이름이었다. 현실정치의 높은 벽을 실감한 유생들은 동백꽃의 비장함에 자신들을 빗댔다. 한겨울 추위가 혹독할수록 더 붉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동백꽃을 흠모했다. 사철 짙푸른 이파리를 떨구지 않는 동백나무의 한결같은 생명력도 닮고 싶었다. 유생들에게 동백나무는 새로운 희망의 싹이었다.

풍진 세상을 다 겪은 금사정 동백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고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양새도 반원형으로 소담스럽다.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제515호)로 지정한 이유다. 군락지가 아닌, 동백나무 한 그루로 천연기념물이 된 유일한 나무다.

금사정 동백나무는 문화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무에는 500년 전 개혁을 꿈꿨던 유생들의 뜨거운 소망과 절의가 담겨 있다. 그 뜻은 미완으로 남았지만, 정신은 지금껏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동백나무 한 그루에 담긴 그 뜻이 더욱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진다.

동백나무를 지키고 선 금사정은 나주시향토문화유산(제20호)으로 지정돼 있다. 겉보기에 건축미가 빼어난 건 아니다. 당시 유생들의 삶과 정신이 오롯이 깃들어 있다. 가치와 격이 다른 집이다.

핏빛 선연한 동백꽃을 피우고 있는 금사정은 영산강변, 죽산보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강변에 평야가 드넓다. 마을사람들은 주로 벼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나주특산 배, 왕곡특산 참외도 많이 재배한다. 소·젖소를 키우는 축산농가도 여럿이다. 소들에 먹일 풀을 심어놓은 풀밭도 넓다. 멀리서 보면 보리밭과 구분하기 쉽지 않다. 흠이라면, 축사에서 새나는 냄새다.

송죽리는 창촌, 방아, 죽현, 귀엽, 어성 쌍정 등 여러 개의 자연마을로 이뤄져 있다. 금사정은 송죽1구 창촌마을에 있다. 조선시대 제민창, 일제강점기 제창이 있었다고 '제창'으로 불렸다. 해방 뒤에 '창촌'으로 바뀌었다.

'방아'는 주민들이 방아를 찧는 도구로 다리를 놨다는 곳이다. 한때 '방아다리'로 불렸다. '죽현'에는 대나무가 많았다. '귀엽'은 주변의 지형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구업'으로 불렸다.

송죽리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집이 김효병 옛집이다. 일제강점 때 지어졌다. 대숲으로 둘러싸인 집에 헛간채와 사랑채가 직각으로 배치돼 있다. 초가지붕이 동긋이 떠오르는 달 같다. 예스럽고 아담하게 생겼다. 높다랗게 쌓은 석축 위에 사랑채가 지어진 것도 별나다. 오래 전 서당으로 쓰였다. 한층 더 높은 윗단에 안채가 있다.

전라남도 민속자료(제11호)로 지정돼 있다. 집안에 나무도 많다. 정원이 곱다시 단화한 옛집이다.

이돈삼 / 여행전문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영산강변에서 본 송죽마을

영산강변에서 본 송죽마을

영산강변에서 본 송죽마을

금사정 동백나무-나무 한 그루로 천연기념물이 됐다.

금사정 동백나무-나무 한 그루로 천연기념물이 됐다.

금사정 동백나무-나무 한 그루로 천연기념물이 됐다.

금사정 앞 풍경-마을주민이 트랙터로 논을 갈아엎고 있다

금사정 앞 풍경-마을주민이 트랙터로 논을 갈아엎고 있다

금사정 편액

금사정과 동백나무 풍경

금사정과 동백나무 풍경

금사정과 동백나무 풍경

금사정과 동백나무 풍경

금사정과 동백나무 풍경

금사정에 핀 동백꽃

금사정에 핀 동백꽃

금사정에 핀 동백꽃

금사정에 핀 동백꽃

김효병 가옥

김효병 가옥

김효병 가옥

동백꽃 낙화

동백꽃 낙화

마을주민-쑥을 캐고 있다

영산강 죽산보

창촌마을회관-코로나19로 문이 닫혀있다

창촌마을회관-코로나19로 문이 닫혀있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