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동학농민군 최후의 격전지, 장흥 석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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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동학농민군 최후의 격전지, 장흥 석대들
장흥 석대들·정읍 황토현·공주 우금치, 장성 황룡촌 동학 4대 전적지||동학, 반 외세·봉건 잔재 청산 주창… 이소사 등 잊혀진 영웅들 재조명
  • 입력 : 2020. 02.25(화) 14:10
  • 편집에디터

동학농민운동 4대 전적지 중 하나인 사적 제498호 장흥 석대들 전적지. 장흥군 제공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석대들 전적지

동학농민운동 관련 전적지 중 사적 제498호로 지정된 장흥 석대들 전적지는 정읍 황토현(사적 제295호)과 공주 우금치(사적 제387호), 장성 황룡촌(사적 제406호)과 더불어 4대 전적지다. 전라도 지방군을 격퇴한 황토현과 중앙군과 싸워 이긴 황룡촌, 일군에 쓰러진 우금치 전적지는 교과서 본문에 실려 있고, 기념탑도 게재하고 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 최후의 격전지인 장흥 석대들 전적지는 농민군 4대 전적지임에도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다.

1894년 12월 4일(음력) 벽사역을 점령한 농민군은 12월 5일 장흥부 장녕성(장흥성)을 함락했다. 장녕성이 함락되면서 장흥부사 박헌양과 장졸 96명을 비롯한 500여 명의 읍민이 죽임을 당한다. 장녕성 함락으로 의기충천한 농민군은 7일 강진현을, 10일에는 전라도 육군 지휘부였던 병영성마저 함락한다.

사기가 오른 농민군은 곧바로 행정과 군사의 요충지인 나주로 진격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농민군 지도부가 차례로 체포되었다는 소식도, 농민군 주력을 연파한 일본군 후비 보병 제19대대와 조선토벌대가 나주를 거쳐 남진한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농민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강진 병영성을 떠나 장흥 유치면 조양촌(朝陽村), 부산면 유앵동(有鶯洞) 등 산간 지역에 포진했다.

전주와 장성을 거쳐 내려온 관군과 일본군은 크게 세 방향, 우선봉장 이두황이 이끈 관군은 순천, 좌선봉장인 이규태의 관군은 나주·영암 그리고 나주의 일본군은 영암·능주 방향에서 진격해왔다.

12일부터 남문밖에서 토벌군과 두 차례의 전투가 있었다. 수십명의 토벌대와 수천 농민군의 접전이었지만, 농민군은 패배한다. 화력의 열세와 작전 미숙이었다. 잇단 패배로 농민군의 전열이 흔들리자, 농민군 지도부는 14일 정면 승부를 위해 고읍(현 관산읍) 방향에서 자울재를 넘어 석대들(장흥읍 남외리)을 가득 메우며 장흥부로 진격한다.

수적으로만 우세할 뿐 농민군에게는 화승총과 죽창, 몽둥이가 전부였다. 이에 반해 조·일 토벌군은 신형 야포와 기관총, 1분에 열두 발을 발사할 수 있는 신형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조·일 토벌군은 기다렸다는 듯 석대들을 가득 메운 3만 농민군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게다가 석대들은 화력이 승패를 결정짓는, 둔덕하나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전투는 장렬했지만 처참했다. 15일 낮 다시 정면 돌파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틀간의 석대들 전투에서 통한의 패배를 당한 농민군은 1,000여 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남기고, 자울재를 넘어 퇴각해야만 했다.

석대들의 영웅……이방언·최동린·윤성도

1894년 12월 14일과 15일, 천여 명이 훨씬 넘는 농민군들이 새 세상을 꿈꾸며 조·일 토벌대와 맞서 싸우다 죽어간 현장에는 영웅들의 이야기도 함께 남아 있다. 농민군 최후의 항쟁지 석대들 전투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도장군 또는 장태장군이라 불린 이방언을 비롯한 구교철, 이사경, 김학삼, 이인환 대접주 등이 있다. 이들 대접주는 초상으로 그려져 지금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걸려 있다.

그러나 석대들에 전설이 되어 남은 영웅들은 이들 대접주 만은 아니었다. 열세 살 소년 장수 최동린과 500여 명의 농민군을 실어 나른 소년 뱃사공 윤성도도, 이름을 남기지 않은 농민군도 다 영웅이다.

『갑오동학농민혈사』에는 "최동린은 장흥군 대흥면(현 대덕면) 연지리에서 태어나 13세의 어린 나이에 대중을 지휘하여 본군 남문 밖 석대전에서 수많은 농민군을 총지휘하다가 전사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대편 진압군의 기록인 『동학난기록』 하권에도 "1894년 12월에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나주 일본군 진영으로 압송되어 12월 28일 처형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3세 소년을 동학군 토벌대 총사령부가 있던 나주 일본군 진영으로 압송해 갔다는 것은 최동린이 농학농민군의 리더, 소년 장수였음을 보여준다.

석대들 전투에서 살아남은 500여 명의 농민군들은 천관산 끝자락에서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에 갯벌이 드러나는 틈을 타 갯벌 건너 작은 섬인 회진면 '덕도'로 숨어든다. 뒤를 쫓은 관군과 일본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덕도를 완전히 포위하고 당장이라도 상륙하여 공격할 태세였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야밤을 이용하여 농민군 모두를 가까운 생일, 금일, 약산도로 실어나른 뱃사공이 바로 15세의 소년 뱃사공 윤성도였다. 500여 명의 동학군 생명을 구한 15살 윤성도도 영웅이 아닐 수 없다.

말을 탄 여자 두령, 이소사

스물두 살의 젊은 여인으로 두령이 되어 장흥 석대들 전투의 선봉장이 된 인물도 있다. '한국의 잔다르크' 라는 별명이 붙은 이소사가 그다. 이소사의 '소사(召史)'는 한자 사전에 성 뒤에 쓰여 '과부'의 뜻을 나타낸다고 설명되어 있다. 체포되어 나주에 압송된 후 토벌군인 관군이 이소사를 간병할 남편을 수소문하고 있었음을 보면 아마도 결혼한 여인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소사는 '이씨부인' 정도로 읽힌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기록이 많지 않으니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이름이 정확히 누구인지조차 알려진 게 없다.

이소사에 관한 이야기는 토벌군 우선봉장이었던 이두황이 남긴 「우선봉일기」나 일본의 토벌대 대장인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의 구술기록인 「동학당정토(征討)약기」, 일부 일본 신문에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다.

이소사가 장흥성 전투에서 어떤 인물이었지를 알려주는 것으로는 1895년 3월 5일자 일본의 『고쿠민(國民) 신문』의 다음 기사가 참고 된다.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나이는 꽃다운 스물두 살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이고 이름은 이소사라고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는 말 위에서 지휘를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꿈에 천신이 나타나 오래된 제기를 주었다고 하며, 동학도 모두가 존경하는 신녀가 되었다."

신문이 전하는 이소사는 말은 타고 농민군을 지휘한 농민군 두령이며, 동학군이 존경하는 신녀였고, 농민군 사기를 올려주는 핵심인물이었다. 장흥부사 박헌양의 목을 친 자가 이소사라는 설도 있다.

동학교도들이 체포되면 주요 지휘관을 제외하고는 2~3일 안에 즉결처분된다. 그러나 이소사는 관군인 토벌군에게 체포 된 후 7~8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아 온몸의 살이 문드러져 겨우 목숨만 붙어 있었다. 그런 상태였음에도 동학농민군 토벌군 대장인 제 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西郞)는 장흥의 조선토벌군 우선봉장 이두황에게 이소사를 나주로 압송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만큼 이소사는 주요 관심 인물이었다.

토벌대 대장인 미나미 고시로의 구술 기록인 「동학당정토약기」는 그에 대한 고문이 얼마나 악독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 그 전부터 조선에서의 처벌이 매우 엄중하다고는 들었지만, 이 여자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양쪽 허벅지의 살을 모두 잘라내어, 그 한쪽은 아예 살을 벗겨내어 뼈만 남고 다른 한쪽은 피부와 살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 여자가 압송되어 나주성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거의 송장 상태였다.…… 상처 부위가 썩어 문드러져 악취가 코를 찌르고…… 그 참담한 꼴은 무참한 감을 느끼게 하였다." 동학군 최고지도자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에 대해서도 이런 고문은 하지 않았다.

나주로 옮겨졌지만, 그녀는 엄청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만다.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는 농민군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보국안민(輔國安民) 깃발을 든 이소사의 모습이 삽화로 제작되어 있다. 이소사의 삽화는 잉글랜드와 백년전쟁에서 조국을 구한 프랑스의 국민 영웅 잔다르크를 떠올리게 한다.

장흥-농학혁명기념관

동학혁명기념탑 부조.

소년 뱃사공 윤성도.

말을 탄 여자 두령 이소사.

석대들을 품은 흔적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옥상에 오르면 제암산, 사자산, 억불산에 둘러싸인 장흥 읍내도, 탐진강 좌우로 펼쳐진 석대들도 한눈에 들어온다. 기념관 바로 밑 대나무로 가득 찬 돌산이 농민군이 승리의 깃발을 꽂았던 석대산이다. 석대산 앞뜰이 석대들이란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근거다.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석대들을 가득 메운 3만 농민군의 함성은, 역사는 결코 지워질 수 없다. 메아리가 되고 전설이 되어 남아 있고, 기록과 증언으로 남아 있고,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지은 사당과 기념탑, 기념관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작가 송기숙에 의해 대하 역사소설 『녹두장군』으로도 남아 있다.

가장 먼저 건립된 기억장치는 '갑오동란 장졸 순절비'다. 동학농민군이 폭도였을 당시 수성 장졸들은 조선의 안녕을 지켜내다 전사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충절을 지키기 위한 죽음, '순절(殉節)'이라는 이름이 붙은 비명이 된다. 1898년 전라어사 이승욱이 단(壇)을 쌓자, 이듬해인 1899년 송사 기우만이 지은 비문을 새긴 '광서 20년 갑오동란 장졸 순절비'가 세워진다. 순절비문의 '광서(光緖)'는 청나라 덕종 광서제의 연호로, 광서 20년은 석대들 전투가 있었던 1894년이다. 수성 장졸들의 순절비가 세워진 후 1928년 현재의 위치인 장흥읍 예양리 78번지에 장흥부사 박헌양을 비롯한 장졸 95인을 추모하기 위한 당(堂)을 세우고, 영회당(永懷堂)이라 이름 붙인다. 영회당 주변에는 영회당 건립에 도움을 준 김택규 군수를 기리는 '불망비'와 당시 장흥 성내 주민과 벽사 주민이 세운 벽사 찰방 김일원의 불망비도 함께 서 있다. 수성 장졸을 기리는 순절비와 영회당이 세워지고, 벽사 찰방 김일원의 불망비가 건립되면서 동학농민군과 그 후손들은 역사의 죄인이 되어 숨죽이며 살 수 밖에 없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늘 시대에 따라 변한다. 각 시대가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평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이 봉건적 잔재의 청산을 주창한 근대화 운동이었고, 반 외세를 실천한 민족운동으로 평가받게 되면서, 농민군을 기리는 기억장치도 만들어지게 된다. 1992년 석대들 허리춤에 소설 '녹두장군'의 작가 송기숙이 글을 짓고, 한글 서예의 대가인 평보 서희환이 글을 쓴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 그것이다. 그리고 2015년 기념탑 앞자락에 장흥 동학혁명기념관도 들어선다.

농민군을 기리는 '동학농민 명기념탑'이 세워졌지만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는 역사의 평가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품고 살 수밖에 없다. 1992년 세워진 동학혁명기념탑이 건립 12년이 지난 2004년에야 제막식을 가졌던 이유이기도 했다.

농민군에 의해 함락된 장녕성은 오늘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지만, 장흥부사가 근무했던 동헌터 자리(현재 장원아파트가 들어 서 있음)에 동헌터비가 서 있다. 동헌터비 옆에 수령 400년의 왕버들나무가 정말 멋지다. 130년 전 장녕성에서 벌어진 치열한 농민군과 수성군 사이의 전투는 이제 잊혀지고 있지만, 당시의 현장을 지켜본 왕버들나무는 살아남아 당시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탑 옆 공설운동장을 만들면서 1,165기의 연고가 없는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석대들에서 산화한 농민군의 시신임이 분명하다.

장흥부사 박헌양을 비롯한 장졸 95인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영회당(永懷堂).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