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의 단식 vs 황교안의 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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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YS의 단식 vs 황교안의 단식
  • 입력 : 2019. 11.26(화) 15:55
  • 박상수 기자

5·18 민주화운동 3주년인 1983년 5월 18일. 정계에서 강제 은퇴당하고 가택 연금 상태에 있던 김영삼(YS) 전 신민당 총재가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고 단식 투쟁에 돌입한다. 그는 성명에서 △언론 통제의 전면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 인사들의 복직 △정치 활동 규제의 해제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개헌 등 민주화 5개항을 요구했다. 전두환 신군부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다.

야권의 거두 YS의 단식이 길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긴장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흩어져 있던 재야 인사들과 학생들이 다시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서먹했던 김대중과도 관계 복원이 이루어졌다. YS가 잘못되면 엄청난 곤경에 처할 것을 우려한 전두환 정부는 5월 25일 서울대병원에 강제 입원시킨다. 전두환은 민정당 사무총장 권익현을 서울대병원으로 3차례나 보내 단식을 만류했으나 그는 계속 단식을 이어갔다. 권익현이 해외에 잠깐 나갔다가 돌아오시라고 하자 YS는 "나를 해외로 보내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오.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시오."라고 말했다.

YS의 단식은 언론 통제로 국내 언론에는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로이터, AP, UPI, 교토통신 등 해외언론은 일제히 이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상도동계 인사와 재야인사들은 또 대학가와 골목을 돌며 '김영삼 총재 단식 돌입'이라는 유인물과 전단지를 뿌렸다. 5월 19일 미국 망명지에서 이 소식을 접한 김대중은 바로 문동환 등과 함께 프랙카드, 피켓 등을 들고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고 김영삼을 살려내라는 가두 시위를 벌였다. YS의 단식은 6월 9일까지 23일 동안 계속됐다. 그의 단식은 가택 연금 해제로 이어졌다. 민추협 결성 등 민주화운동에도 기름을 부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소미아 파기·선거법·공수처법 저지 등을 요구하며 지난 20일부터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 단식 투쟁을 하고 있다. 뜬금없는 그의 단식에 동정은커녕 각계에서 조롱이 쏟아졌다. 그는 '황제 단식' 논란으로 단식을 희화화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YS는 언론 통제가 이뤄지던 군부독재의 암흑기에 절박감을 갖고 단식을 했다. 단식이 아니면 투쟁할 방법이 없었다. 요즘은 단식 말고도 효율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단식은 21세기 정치인의 투쟁 방식이 아니다. YS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황 대표는 이 말을 패러디해 "잎은 떨어뜨려도 나무 둥지를 꺾을 수는 없다."고 했다. 공허하게 들리고 울림도 없다.

박상수 주필 sspark@jnilbo.com

박상수 기자 ss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