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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강 김철 선생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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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강 김철 선생은 누구

게재 2019-03-31 14:21:08

조선이 국호였던 시대인 1886년 10월15일 생이다.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구봉마을에서 태어났다.

4남 1녀중 3남. 1908년 영광에 있는 광흥중학교에서 중학과정을 이수하고, 1912년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마치고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2년 뒤인 1917년 2월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1918년 8월20일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지 백미로 25호에서 김철은 여운형, 장덕수, 조동호, 선우혁, 한진교 총 6명과 함께 발기인이 되어 신한청년당을 창당했다. 이 즈음 김철 선생은 신한청년당 부주무로서 기관지 '신한청년'을 발간했으며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도 역임했다.

1919년 1월 김철 선생은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각국에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서병호, 선우혁과 같이 국내에 밀입국해 자신의 전답을 정리해 독립자금 1만원을 마련, 상해로 가져가 독립운동 동지들의 생활을 원활하게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완구(趙琬九), 신익희(申益熙), 신석우(申錫雨), 조동호(趙東祜), 신규식(申圭植), 선우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상해시 보창로 프랑스 조계내에 대한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19년 4월10일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의정원 의원(전라도 대표)에 선임됐고, 같은 달 제2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임시정부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그해 8월에 임시정부 교통부 차장에 임명됐으며 1920년 1월에는 김구 등과 같이 의용단(義勇團)을 발기해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의용단 산하 선전위원회가 조직되자 위원장 안창호를 도와 선전업무에 종사했다.

1924년 5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에 임명됐으며 같은 해 12월 김구(국무령) 내각 국무위원에 임명됐고, 1927년 8월 이동녕 내각 군무부장에 임명됐다.

또 1930년 7월 조직된 한국독립당의 14인 이사 중의 한명이었으며 1931년 11월 중국인과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해 한중항일대동맹을 조직,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32년 1월8일 이봉창의 일왕 저격사건과 그해 4월29일 윤봉길의 중국 홍구공원에서의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등 일본인 폭살 양대 의거를 당시 군무장으로서 김구와 같이 주도했다.

같은 해 5월10일 상해임시정부를 항주로 이동해 자신의 숙소인 항주시 소재 청태 제2여사 32호실에 임시정부판공처를 설치했다. 동년 5월16일 항주에서 첫 국무회의에서 김철은 재무장에 임명됐다.

허나 안타깝게도 2년 뒤인 1934년 6월29일 중국 항주(杭州)소재 광자병원에서 격무에 시달리다 급성폐렴으로 순국했다. 임정요인들의 애도속에 악비묘(岳飛廟) 뒷산 호산당(湖山堂) 예수교회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유해가 안장된 중국 악비묘 뒷산 공동묘지는 1978년 아파트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사라져 버렸다. 죽어서도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사후인 1962년 건국공로훈장(독립장)이 추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