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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주 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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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주 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은 누구

게재 2019-03-03 19:32:07
이금주 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장의 결혼 사진. 남편은 8개월 된 갓난아기를 두고 전쟁터로 끌려가 사망했다. 이금주 전 회장 제공
이금주 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장의 결혼 사진. 남편은 8개월 된 갓난아기를 두고 전쟁터로 끌려가 사망했다. 이금주 전 회장 제공

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스무살 신부 옆에는 키가 큰 신랑이 서 있다.

신부도 부끄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1940년 10월10일의 행복한 사진 한 장. 2년 뒤 남편은 일제에 의해 끌려갔다.

그리고 1943년 '길버트 제도 다리와에서 사망. 충렬(忠烈)하게 전사한 데 대해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라는 전사 통지서 한 통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그때부터 그녀의 싸움이 시작됐다.

이금주(99) 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

사단법인 태평양전쟁유족회 이사(1988년)이었으며 호남문화진흥회 고문(2006년)을 역임했고,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자문위원(2005년~2007년), 광주광역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실무위원회 위원(2005년~2009년), 일본의 강제동원 전범기업 및 한국의 청구권자금 수혜기업 등 한일협정 책임기업 피해자선정위원회 대표(2006년),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고문(2009~)을 맡았다.

한국보다 일본 시민단체에서 더 유명하다. 최근 발간한 일본 시민단체 소식지에서는 이 전 회장의 쾌유를 비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 전 회장은 싸움은 1972년부터 시작됐다. 이 전 회장은 전국 각지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나누고 가끔 만나 활동계획 등을 논의한다. 이후 1988년 6월 서울에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이 전 회장은 광주 유족회장을 맡게 된다.

1992년부터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진행했다.

'광주 천인소송' '우키시마마루 폭침사건 소송' '관부재판(종군 위안부) 소송' 'b c급 전범(포로감시원) 소송'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도야마 후지꼬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여자근로정신대 소송' 등이 이 전 회장이 참여한 소송이다. 무려 80여 회를 일본에 다녀왔다. 그러나 7건의 소송은 총 열아홉 번에 걸쳐 기각됐다.

첫 승소의 기쁨도 맛보았다. 1998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 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법원으로부터 일부 승소를 받아낸 것이다. '종군 위안부 소송'이었다. 2004년 2월에는 피해자들이 그토록 원하던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에도 기여했다.

그 이후부터는 진척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2012년 자신의 일을 열심히 도우던 며느리를 잃었다. 몇 개월 후 하나 뿐인 아들도 세상을 떴다. 남은 것은 손녀 하나 뿐.

일제의 사과는 여전히 없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잘 못이 있냐고 묻는다.

그래서 99세의 이 전 회장은 아직도 버티는 중이다. 꼭 이겨야 하는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