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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 풍경으로 노래하는 취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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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 풍경으로 노래하는 취가정

게재 2018-11-29 1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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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가정 가을풍경
취가정 가을풍경

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 풍경으로 노래하는 취가정
취해서 부르는 이 노래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네


가을이 오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단풍명소에서 찍은 멋들어진 풍경사진들을 휴대폰으로 주고받으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백양사 쌍계루 앞 호수에 비친 애기단풍, 지리산 10경 중 하나인 피아골 단풍, 무등산 주상절리와 어우러진 규봉암 단풍 등 세상은 온통 단풍이야기 뿐이다. 화려한 단풍명소들을 섭렵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을끝자락에 찾은 곳이 있다.

바로 취가정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누정이나 별서정원은 자연풍광 감상과 은둔을 위한 풍류처소(風流處所), 강학(講學)과 창작을 위한 수양공간, 조상숭배를 위한 제례장소,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대동계모임 등의 기능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취가정은 독특하게도 특정인의 넋을 기리기 위한 일종의 추모정원 성격을 띠고 있다.

이곳은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등 유명한 별서정원들이 이웃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곳이다. 특별히 정자 건축물이 돋보인다거나 정원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그저 소나무, 팽나무 의지하여 달랑 소박한 누정하나 세워져 있다.

그나마 예전에는 정원처럼 감상했을 법한 무등산과 평모들녘도 지금은 우거진 수목들로 인해 조망이 제한되어 있다. 비록 시각적으로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할지라도 이곳이 품고 있는 속 깊은 사연을 알고 나면 화려한 단풍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 오히려 미안해질 따름이다. 무엇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술에 취해 노래 부르다'라는 뜻을 지닌 취가정이라는 정자에 얽힌 이야기다.

취가정은 뼈 속까지 외롭고 서글픈 현실을 마치 숙명처럼 받아들이면서도 그저 한잔 술 기울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사람의 심경을 대변하는 곳이다. 취중진담(醉中眞談)이라는 말처럼 마음 속 깊이 담아두었던 진심어린 속내를 은유적으로 토로하는 곳이기도 하다. 언제라도 좋으니 술기운을 빌어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한 맺힌 취가정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여봄직하다.

취가정(醉歌亭)은 충장 김덕령(忠壯 金德齡, 1567년~1596)의 출생지인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마을 뒷동산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다. 취가정(醉歌亭)에 편액으로 걸려 있는 '취시가(醉時歌)'는 석주 권필(權糧:1569~1612)이 김덕령의 한(恨)을 꿈 이야기로 풀어낸 시가(詩歌)이다.

당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권필은 의병장으로서 탁월한 공을 세운 김덕령이 억울하게 옥사하자 어리석은 임금에 대해 시(詩)를 통해 은유적으로 비판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취해서 부르는 이 노래 들어주는 이 없네(醉時歌此曲無人聞)/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바라지 않고(我不要醉花月)/높은 공을 세우는 것도 바라지 않네(我不要樹功勳)/공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이고(樹功勳也是浮雲)/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며(醉花月也是浮雲)/취해서 부르는 이 노래(醉時歌此曲)/아무도 내 마음 알아주는 이 없네(無人知我心)/다만 긴 칼 들고 어진 임금 받들고 싶을 뿐이네(只願長劒奉明君). 권필이 꿈에서 깨어났지만 슬픔과 분노는 좀처럼 누그러지질 않았다.

그래서 그는 충장공의 억울한 영혼을 달래기 위해 시 한 소절을 더 읊었다. 장군께서 지난날 금빛 창을 잡았건만(將軍昔日把金戈)/장한 뜻 도중에 꺾이니 어찌된 운명인가(壯志中摧奈命何)/지하 영령의 그지없는 원한도(地下英靈無限恨)/분명히 술 취하여 부르는 한 곡조 노래일세(分明一曲醉時歌). 이렇게 권필은 꿈속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시를 쓰고 화답한 형식으로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한 것이다.

권필은 1569년 서울 마포에서 권벽(權擘:1520~1593)과 경주 정씨(鄭氏) 슬하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자(字)가 여장(汝章)이고 호는 석주(石洲), 무언자(無言子)이다. 그는 정철(鄭澈, 1536∼1593)의 제자로 19세 때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하였으나 뒤늦게 한 글자를 잘못 쓴 것으로 밝혀져 합격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그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풍류를 즐기며 자유분방한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저기 방랑생활을 하면서 호남을 방문하던 차에 해광 송제민(海狂 宋齊民:1549~1602)을 만났고 서로 뜻이 맞아 교유하다 마침내 송제민의 딸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사실 송제민은 김덕령과 막역한 사이로 그둘 사이에 전해지는 일화도 유명하다.

1593년 8월 송제민은 모친상을 당한 외가 쪽 친척 김덕령을 찾아가 '나라 일이 먼저이고 집안일은 나중'이라며 설득하여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손수 제주까지 가서 군마 30여필을 구해와 의병장이된 그의 사기를 올려주는 일을 할 정도였다. 김덕령이 옥사하자 그 또한 깊은 슬픔에 빠졌고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가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모든 일과 그 득실을 논술한 와신기사(臥薪記事)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 결과 관리들을 비판하는 내용 때문에 관찰사의 미움을 사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김덕령과 송제민, 권필, 김천일 등은 당시 뜻을 같이하며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했다. 무엇보다 어려운 시국을 함께 보내는 동지로서 서로 격려하며 끈끈한 의리를 나누었던 것이다. 권필은 시작(詩作)에 조예가 깊어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1571∼1637) 등과 함께 창작에 몰두하였는데 그의 작품으로는 '석주집(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周生傳)'등이 있다.

그는 정치현실이 싫었을 뿐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임진왜란 때도 참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광해군 시절에 권세를 휘두르던 광해군 처남인 유희분((柳希奮,1564~1623)을 풍자하는 시를 지은 것이 발각되는 바람에 해남으로 유배의 명을 받게 되었다. 불행히도 귀양길에 그를 안타까워하던 사람들이 권한 술을 사양하지 않고 마시다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토록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원통해했던 그였는데 정작 자신도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며 44세라는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권필이 지은 시 가운데 당시 그의 심경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강나루 주막에 묵으며(宿江浦遽廬)/비단옷 두르고 고기반찬 배부른 자들이여(紈袴飽肉者)/수양산 고사리 맛을 어찌 알겠는가(安知西山蕨)/나만은 벼슬을 부끄럽게 여기노라(我獨恥干謁)/날짐승과 길짐승은 보금자리 달리하듯(飛走不同穴)/시골에 묻혀 밭고랑 일구며(畎畝尋要術)/뱃전의 낚시질로 세월을 보낸다네(漁舟費日月)/한세상 삶이야 뜻대로 살다가면 그만이지(人生適意耳)/어찌하여 한평생 아등바등 지낼 것인가(何用終歲矹).

취가정은 그저 야트막한 동산 위에 세워진 두어 평 남짓한 작은 정자에 불과하지만, 감춰진 속 이야기는 참으로 애잔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나라에 대한 애끓는 충정, 뜻을 함께한 사람들에 대한 끈끈한 의리, 그리고 후손들에게 보다 밝은 세상을 물려주고자 몸소 보여준 열정과 희생정신 등이 깊이 배어 있는 곳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반드시 되새길만한 산 교육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애국과 충절의 표상이 되고 있는 김덕령


김덕령은 본명보다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諡號)가 훨씬 더 알려져 있다. 원래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장군에게 내리는 시호인 충장(忠壯)을 받은 사람들을 높여 충장공(忠壯公)이라고 부른다. 이와 유사한 시호로는 충무(忠武), 충정(忠正) 등이 있는데 충무는 12명, 충장은 15명이 각각 동일한 시호를 받았다.

그런데 충무공하면 이순신, 충장공하면 김덕령이 떠오르듯이 이들은 애국과 충절의 표상으로 우뚝 서 있다. 충장이라는 단어가 우리 귀에 익숙한 것은 어쩌면 광주 한복판의 보행가로인 충장로(忠壯路)가 한몫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무심코 이용하는 이 가로명이 김덕령의 시호를 따서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또 무등산 초입부에 있는 원효사로 올라가는 길에 잘 가꾸어진 묘소와 함께 그를 기리기 위해 1975년에 세운 사우(祠宇)가 있는데 바로 충장사(忠壯祠)이다. 또 그가 태어난 고향마을은 충효동(忠孝洞)이라 부르고 있다. 그를 기리거나 표현할 때 충(忠)자를 빼고서는 도저히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광산, 자(字)는 경수(景樹)이다. 원래 자는 주로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붙이는 일종의 예명(藝名)이나 별명(別名) 같은 것이다. 왠지 경수(景樹)라는 이름에 자꾸 눈길이 간다. 이름이 뜻하는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풍경(風景)에 있어서 중심역할을 하는 나무(樹)처럼 매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실제 이와 연관된 이야기를 지닌 나무가 충효동에 있다.

바로 천연기념물 제539호로 지정된 왕버들인데 나무 나이가 족히 사오백년은 되어 보인다. 현재는 세 그루가 남아 있는데 원래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하여 소나무 한 그루와 매화 한 그루, 그리고 다섯 그루의 왕버들로 충효마을을 상징하는 경관수(景觀樹)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왕버들은'김덕령 나무'로 불릴 정도로 그와 관련된 다양한 유래나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크다.


도시학자 캐빈린치(Kevin Lynch)는 1960년 발간된 '도시 이미지(Image of City)'라는 책에서 알기 쉽고 아름다운 도시를 분석하는데 필요한 요소로 지구(district), 통로(path), 결절점(node), 경계부(edge), 랜드마크(landmark) 등 다섯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그 가운데 랜드마크는 도시를 상징할만한 강렬한 경관요소를 말하는데, 파리의 에펠탑이나 개선문,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Golden Gate)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마을 앞에 서 있는 정자목(亭子木)이라고도 부르는 당산나무가 다양한 의미에서 마을의 상징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역사의 중요한 길목마다 등장하여 나라를 위해 희생하거나 삶의 좌표를 제시했던 훌륭한 선조들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적 랜드마크가 아닐까.

김덕령은 일편단심 나라를 사랑하는 열정으로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 권필, 송제민, 김천일 등 수많은 의인(義人)들과 함께 고통을 감수하며 나눈 끈끈한 의리 등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훌륭한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누가 뭐래도 이제 김덕령은 경수(景樹)라는 그의 또 하나의 이름처럼 충절의 표상이자 정신적 랜드마크로 우뚝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취가정 가을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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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사 가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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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사 가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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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동 왕버들
충효동 왕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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