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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 괴레메에서 캉갈과 함께. 1) 무슬림(Muslim, 이슬람신도)들이 경애하는 고양이 내가 한 달 정도 머물렀던 이스탄불 탁심 광장 근처 아파트 단지에는 유독 고양이들이 많이 살았다. 트램을 타기 위해서 언덕 계단을 오를 때에도 담장이나 계단 한쪽에 수도승처럼 앉아 있거나 하품을 했다. 곳곳에 있는 녀석들의 집 앞에는 늘 깨끗한 사료와 물이 담긴 그릇이 있었다.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페수스(Ephesus) 유적지도 아야소피아(Ayasofya) 사원도 그들에게는 집이었다. 사람이 다가가도 전혀 적대감을 표시하지 않고 눈을 내리깐 채 주인 행세를 했다. 맥주 몇 병 사려고 아파트 인근 조그마한 슈퍼에 갔을 때에도 콘칩 더미 위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갈색 줄무늬 고양이가 있었다. 녀석을 보고 웃었더니 주인 또한 흐뭇한 미소로 나를...
편집에디터2020.11.26 12:2639-1. 히에라 폴리스 원형극장. 2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건설했다. 관객석은 언덕을 이용했다. 배수로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실내 극장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1. 목화의 성 파묵칼레 에게해 연안에 있는 데니즐리(Denizli)는 터키 남서부에 있는 도시 중 가장 크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약 20㎞쯤 떨어진 멘데레스 계곡에 석회 성분 온천으로 유명한 파묵칼레(Pamukkale)가 있다. 터키어로 파묵(pamuk)은 '목화(木花)', 칼레(kale)는 '성(城)'을 뜻한다. 파묵 칼레는 '목화의 성'이다. 빙하 같기도, 야간에 개장한 스키장 같기도 하지만 봄가을에는 온도가 30℃, 여름에는 40℃, 겨울에는 15℃도 정도 되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좀처럼 눈을 볼 수가 없었다. 이곳에 닿기 위해서는 멘데레스 평야에 끝없이 펼쳐지는 목화밭을 지나야만 했다. 때문에 목화의 ...
편집에디터2020.11.12 13:1338-1. 아타튀르크 흉상과 투르크족 노인. 1. 반역의 길이 애국의 길 원래, 그는 반역자였다. 자신이 모시던 황제의 명을 거역했다. 그래서 그는 영웅이 되었고 터키인들은 그를 아타튀르크, 즉 국부(國父)라고 부른다. 죽어서도 살아있는 영웅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그의 반역 이야기를 하자면 오스만 제국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오스만 후기는 전형적인 제국의 말로를 걷고 있었다. 황제들은 정치에서 멀어지고 사치스러워졌다. 황제뿐만 아니라 제국 내부의 기득권 세력의 요구가 많아졌다. 조공(朝貢)으로 성장하던 경제구조는 더 이상 확장할 땅이 없어지자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전통적인 군사 우방국인 오스만 제국에게 달콤한 유혹이 다가왔다. 함께 전쟁을 하잔다. 황제는 전쟁만이 제국을 다시 일으킬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회는 오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1914....
편집에디터2020.10.29 12:2937-1. 사방 백색 빛 수평선을 볼 수 있는 뷔위카다 섬. 1. 황금 새장과 황금 섬 톱카프(톱카피, Topkapi) 궁전에 가면 아름다운 이즈니크 타일로 된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창이 나있는 건물을 볼 수 있다. 그곳을 사람들은 황금 새장(Kafes)이라고 부른다. 황제가 되지 못한 황자들이 갇혀 지냈던 곳. 카페스는 형제 살해 전통을 완화시켰지만 그들은 일평생 갇혀 지내야 했다. 오스만 제국의 상속 제도는 명확하지 않았다. 하렘 출신 노예가 자신의 어머니이든 그렇지 않든 모든 황자들은 아버지의 지위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다. 다만, 그들 중 가장 강한 인물이어야 했다. 아버지 살아생전 권력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형제들은 호시탐탐 황위를 노렸다. 황권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안팎으로 시달려야 했다. 오스만 제국은 여러 식민 국가와 조공 국가를 거느리고 있었다. 황자들은 지방 ...
편집에디터2020.10.15 14:0236-1. 갈라타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쉴레이마니예 사원 뜰에서 이브라함, 세비크와 함께. . 1. 화장실이 맺어준 인연 이스탄불에는 크고 작은 모스크가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규모와 상관없이 외양과 실내가 오래되고 아름답다. 내가 모스크라는 곳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이유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순전히 참을 수 없는 욕구 때문이었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다음날, 구글 지도를 보고 무작정 골든혼으로 걸어간 적이 있다. 버스 정거장을 지나고 허름한 뒷골목을 지나면서 현지인의 민낯을 보는 듯해 만족해했다. 돌아오는 길은 달랐다. 화장실을 급하게 찾아야 했다. 마침 표지판이 있어 들어갔지만 나왔을 때에야 그곳이 모스크였다는 것을 알았다. 화장실 근처 창구에 있던 남자가 1리라를 내라고 했다. 화장실과 관련된 일화는 또 있다. 매일 이른 아침, 블루모스크 야경을 ...
편집에디터2020.09.24 13:0935-1. 갈라타 다리에서 바라본 신시가지 갈라타 타워(분홍빛 조명)가 있는 풍경. 1. 갈라타 다리 여행을 하다 보면 풍경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풍경이 되는 경우가 있다. 터키에서는 더욱 그랬다. 풍경도 아름다웠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했다. 이스탄불 신시가지에 숙소가 있는 나는 아침마다 첫 트램을 타고 구시가지로 향했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연결하는 갈라타 다리를 지나가야 했다. 다리 아래에는 통근용 유람선이 지나다니고 다리 인근에는 시장, 모스크, 선착장 등이 있어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새벽부터 비가 내리던 날, 나는 '카라쾨이(karaköy)' 부두가 있는 정거장에서 충동적으로 내렸다. 파란색과 흰색 바둑판무늬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고 있었다. 이스탄불 겨울비는 밤부터 비가 내리더라도 해가 뜨면 그치곤 한다. 빗줄기가 굵지도 않고 종일 내리...
편집에디터2020.09.10 13:2535-1. 카파도키아 기암괴석 위로 열기구가 날아가는 장면이다. 1인당 200유로 정도이다. 시간은 5시 30분부터 9시까지(이동시간 포함, 열기구 타는 시간은 30분 정도)이다. 1. 명마의 도시 카파도키아 약 3백만 년 전, 3,916m에 이르는 에르지에스 화산이 폭발한다. 어찌나 그 위력이 대단했던지 폼페이 열 배인 200m 화산재로 그 근방을 완전히 덮고도 모자라, 앙카라까지 날아간다. 화산재는 바닷물과 섞여 응고하기 시작한다. 그 위로 용암이 흘러서 굳는다. 화산 폭발 뒤 빙하기가 찾아오더니 빙하기가 끝날 무렵에는 대홍수가 난다.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고 무시무시한 무게와 속도로 빙하가 쓸려가면서 땅을 깎아내린다. 그 자리에 협곡이 생긴다. 협곡은 긴 세월 동안 풍화작용으로 깎이고 깎여 기이한 바위산을 만들어낸다. 버섯 모양 같기도 하고 동물 모양 같기도 한 그것...
편집에디터2020.08.27 13:4633-1. 눈 덮인 아야 소피아 사원. 1.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니카 반란 서기 532년 1월 14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황후가 원형경기장(히포드롬)으로 들어서자 성난 군중은 황제를 향해서 외쳤다. "니카! 니카(이겨라)!" 자신의 팀을 향해 응원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황제는 경기를 중단시켰다. 더욱 성난 군중은 경기장을 뛰쳐나가 감옥을 부수고 무차별 방화를 했다. 원로원 의사당, 하기야 소피아 성당까지 불에 타버렸다. 니카 반란이라고 부르는 폭동은 1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겁을 먹은 황제는 측근들과 도망칠 궁리를 하였다. 그때 황후인 테오도라가 황제에게 말했다. "도망쳐서 안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황제로서 부끄럽게 도망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끝까지 남아서 황궁을 지키겠습니다." 황제와 측근들은 부끄...
편집에디터2020.08.13 13:2532-1. 아야 소피아(Ayasofya) 사원. 이스탄불로 여행 온 한국인 가족들과 인터내셔널 가이드인 오메르. 바닥에 천장 돔 크기가 그려져 있다. 바닥 한 중앙에 폰을 두고 찍었다. 1.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 종교는 어떤 사람이나 나라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핵심적 요소 중 하나이다. 전 세계 77억 인구 중 이슬람교 신자가 18억 명이나 된다(가장 큰 종교 규모는 천주교, 개신교, 동방정교회, 성공회 등을 포함한 기독교이다). 이슬람권에서 가장 보수적인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이다.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에 만들어진 종교서(샤리아; Sharia)가 유일무이하게 국가법으로 남아 있는 나라이다. 18억 무슬림들 또한 현실에서 샤리아의 지배를 직접적으로 받고 있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나마 정신적 영향을 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창시한...
편집에디터2020.07.30 13:3731-1. 메블라나 박물관 영묘가 있는 곳. 이곳에 유난히 울고 있는 여인들이 많다. 1. 관용의 상징 메블라나 잘랄레딘 루미 드레비시 세마 댄스 본고장인 코니아(Konya)에 메블라나 세마 댄스 창시자인 루미가 터를 잡은 것은 셀주크 투르크 왕조(Seljuq Empire, 1037~1194) 시대였다. 루미는 열두 살 때(1218) 가족과 함께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인 발흐를 떠나 4,000km에 달하는 대장정에 오른다. 몽골 침입(1215~1220)을 피해서다. 실크로드를 따라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메카 등지를 거쳐 셀주크 투르크 왕조 수도인 코니아에 정착한다. 실크로드 서쪽 끝에 있던 당시 코니아는 여러 문화와 종교가 만나는 곳이었다. 이슬람교 지도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일찍이 신학, 철학, 천문학, 법학에 통달한 학자가 된다. 서른 너머 시를 썼지만 천재성을 유...
편집에디터2020.07.16 12:4730-1. 드레비시 세마 댄스를 추는 세마젠들. 일반적으로 나이 든 스승(메블라나)과 세마젠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이스탄불에 있는 메블라나 박물관 공연 모습. 개인적으로 호자파사 공연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1. 일출과 일몰이 아름다운 이스탄불 이스탄불에는 오래된 건물보다 더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이 있다. 고궁을 배경으로 붉게 물들어 가는 햇무리. 7개의 구릉에 계단식으로 세워진 건물들. 수평선 너머 도시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과 사원들. 이스탄불은 유럽 지구와 아시아 지구로 나뉜다. 유럽 지구는 골든 혼과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신지구와 구지구가 마주한다. 아시아 지구와 유럽 지구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가로 지른다. 이스탄불은 골든혼,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를 가운데에 두거나 옆에 끼고 있다. 이곳 항구는 터키 수출입 품목 대부분을 취급한다. 보스포루스 ...
편집에디터2020.07.02 13:0229-1. 갈라타 다리에서 낚시하는 사람들. 1. 아타튀르크와 다른 정책들 현대 터키를 말할 때 아타튀르크 대척점에 있는 현재 대통령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gan)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에르도안을 그 나라에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구속될 수도 있다. 이 글은 여행하면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이방인이 내가 정리한 글이다). 에르도안은 21세기 술탄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54년 생. 이스탄불 빈민가 출신. 신학 전공. 이슬람교 이맘(Imam)이었다. 종교인에서 정치인이 되었다. 정치 초에는 인기가 좋았다. 초인플레이션 국가였던 터키를 화폐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암흑계의 돈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등 근대화에 기여를 했다. 이스탄불 시장을 시작으로 총리를 10년 동안 했다. 의원 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바꾸고는 16년째 터키 수장 자리를 지키고 ...
편집에디터2020.06.18 13:0528-1. 탁심광장 중앙에 있는 1928년에 세워진 터키 공화국 수립 기념비. 1. 코로나바이러스19 그리고 안부 터키가 한국을 잇는 하늘 길을 막았던 3월 1일, 나는 인천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귀국한 2주 뒤 이스탄불에서 묵었던 아파트 호스트가 연락을 해왔다. 내 안부를 묻고 난 그가 에르도안(현재 대통령 이름)이 모든 바와 클럽을 강제로 문을 닫게 해서 실직자가 되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미술 사학을 전공했고 이스탄불의 교통, 상업, 관광의 중심지인 탁심광장 근처 바에서 바텐더로 근무했다. 종교색채가 강한 그곳에서 '자유'를 추구했던 그는 무교였다. 나는 '터키'와 '코로나'를 키워드로 재빨리 검색을 했다. 그곳을 떠날 때만도 확진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귀국 일주일 전 한국은 대구 신천지를 중심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미 중국인들을 입국 금지시킨 이국땅에...
편집에디터2020.06.04 12:3427-1. 나와 함께 했던 45리터 배낭 ※ 편집자 주 :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28회'부터는 터키에서 한국으로 직항하는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어야 했던, 2020년 겨울 동안 이스탄불을 베이스캠프 삼아 터키를 여행했던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다. 한국보다 7배나 넓은 그곳은 지형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축복 받은 나라였다. 축복 받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느리게 가기만 하는 시간 돌아갈 나라가 있어서, 짐을 풀 집이 있어서 여행이 더 좋다. 돌아갈 그곳이 좀 더 안락하고 안전하며 건강한 곳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가 부유하고 자유로우면 자신감에 넘쳐 보였다.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도 나라가 든든하게 버텨주지 못하면 제 능력을 펼칠 기회도 얻지 못한 경우도 봤다. 귀국할 날이 다가오자 나는 조금 센티해졌다. 이스라...
편집에디터2020.05.21 13:1126-1. 분리 장벽을 바라보는 아랍 여인들. . 1. 여행 중 휴식 집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카미노 데 콤포스텔라(포르투갈 길)를 30일 넘게 걸은 뒤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던 이집트에서 열흘, 사막 바람을 맞으며 열흘 동안 운전만 했던 요르단을 거쳐 마지막 일정인 이스라엘에서 13일을 보내기 위해서 왔다. 이스라엘은 중동 안의 유럽이었다.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확신하자 나는 그만 쉬고 싶어 졌다. 예루살렘에서 5일만 머무르고 텔아비브로 떠나야 했지만 이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기로 했다. 내 숙소는 아파트였다. 주인이 가끔 둘러보러 오지만 여행객들에게 어떤 간섭도 하지 않았다.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베란다에서 다리 뻗고 누워도 춤을 추어도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도 상관하지 않았다. 사용한 그릇만 깨끗이 설거지를 해놓으면 끝이었다. 폴란드 출신 제...
편집에디터2020.05.07 1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