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의는 '본질적인 관계의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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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의는 '본질적인 관계의 회복'이다"
1974년 정의구현사제단의 창시자 함세웅 신부||"정의는 변하지 않은 가치이며 계속 노력해야하는 것"||"시대는 늘 어둠과 빛이 존재, 어둠을 줄여가는 게 중요"||1979년 박정희 사망시 해방의 기도 드리기도||젊은 청춘들이 기성시대의 '오늘'만 보지 않기를||"시대를 지나온 이들의 열망이 있기에 지금이 존재"
  • 입력 : 2019. 01.01(화) 13:51
  • 노병하 기자

2018년이 채 열흘 남짓만 남아 있는 어느 목요일이었다. 택시가 갑작스레 전국적으로 파업을 하면서 오랜만의 서울행이 시작부터 꼬였다. 그럼에도 발걸음은 바빠지고 가슴은 묘하게 설렜다. 마치 오랫동안 뵈지 못했던 은사님을 찾아 뵙는 기분이었다.

함세웅 신부. 대한민국의 교육자, 사회운동가, 로마 가톨릭교회 신부이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창립한 사람이다.

인터뷰 대상과 나의 교착점이라는 그저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 것이 전부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여러 선배들을 통해 들어왔던 터였다. 솔직히 대학시절 그를 통해 종교가 지녀야할 사회적 책임에 대해 배웠다고 한다면 너무 과한 이야기일까.

엄혹했던 지난 1970년대를 정면으로 관통하고 1980년 군부독재와 맞섰으며, 2000년에 들어와서도 목소리 높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하도 쓴소리를 많이 해 상호 각별한 사이였으면서도 DJ가 자주 만나지 않았다는 뒷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그렇게 평생을 신부로 살았고, 앞으로도 신부로 살, 그를 만난 것은 햇살이 적당이 따사로운 오후 2시 서울 길음동 성가소비녀수녀원 내 인권의학연구소였다.

△먼저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하다. 오늘의 주제는 '정의'다. 이것에 대한 답을 주기 전, 신부님이 앞서서 창설했던 정의구현사제단이 창립 44주년을 맞았다. 만들어질 당시 참으로 엄혹한 시대였다. 종교인인 당신이 왜 사회에 전면으로 나서게 됐는가.

- 하늘이 내린 사명이었다. 물론 하늘이 직접 나에게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던 청년들과 학생들의 입을 통해 말씀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 대학생이란 존재는 졸업만 하면 미래가 보장된 계급이었다. 어쩌면 특권층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그것을 포기하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거리로 나왔다. 보통의 용기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종교적 헌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더욱이 나는 스승인 지학순 주교님과 같이 감옥에 다녀온 사제였다. 엄혹한 시대를 체험한 것이다. 그러니 젊은이들의 시대적 부름과 열망에 사제로서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성서 전반에 걸쳐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불의의 권력에 맞서 민중을 편을 드는 것 말이다.

△그런 시대에 그런 용기를 내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당신이 추구해온 정의는 무엇인가?

- 일단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자리에서 말하는 정의는 신학적으로 풀어 말하겠다. 역사적 정의나 사회적 정의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때에 따라서는 정의였던 것이 어느 순간에는 불의가 된다. 이것은 정의의 하부 개념이기 때문이다. 정의의 대개념에는 속하나 상황에 따라 해석과 가치가 달라진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아름다운 관계'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정의다. 이 정의는 불변하며, 초월적인 가치를 지닌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성서의 원죄는 약속을 어겼기에 생긴 것이다.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긴 대가로 자연과의 조화도 깨졌다.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이다. 물론 현대에서 아담과 이브의 시대로 돌아 갈 수는 없다. 허나 바른 믿음과 바른 실천으로, 죄를 짓지 않고 유혹을 피하며 정화된 삶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한다면 그것이 바로 정의를 추구하는 삶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정의의 가치와 의미가 불변이라고 말했다. 살아오면서 '이것이 정의다'라고 느꼈던 적이 있었던가? 혹은 정의를 구현했다고 자부하는 순간들이 있는가.

- 본질적인 정의는 지금까지도 꾸준히 노력하고 또 도달하려고 한다. 질문자가 말하는 정의가 사회적 정의라고 해석한다면, 1979년 박정희가 사망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나는 영등포교도소에 있을 때였다. 면회를 다녀온 다른 이들에게 박정희의 피살 소식을 들었다. 눈물이 났다. '이게 기적이구나. 이것이 모세의 기적이구나'라고 해방의 기도를 드렸다. 억압과 압제의 상징이 갑자기 사라진 것에 대해 기쁨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허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하나의 악이 사라지자 전두환이라는 더 큰 악이 왔다. 그리고 잠시 비춘 햇살이 무색하게도 더 짙고 큰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허나 박정희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악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전두환의 시대 역시 묵묵히 버텨낼 수 있었다. 그것이 또 1987년 6월 항쟁으로도 이어졌다. 허나 그 항쟁도 미완이었다. 그렇게 역사는 계속 흘러가는 것이다.

△그토록 갈구하고 바라던 정의가 지금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고 생각하는가.

- 내가 말한 본질적인 정의가 도래한 사회는 아직도 멀었다. 어쩌면 인류가 계속 노력해야 하는 일인지 모른다. 하부적 정의인 사회의 정의를 이야기 하자면, 이 역시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매 시대마다 어려움과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또한 세대마다 어둠과 빛이 항상 존재한다. 이것이 항상 50대 50인 것은 아니지만 때로 시대가 주는 열매가 정의가 아닌 그 열매를 맺기 위해 투신하는 자체가 정의다. 이 정권을 이야기 해보자. 촛불 혁명으로 시대적 소명을 완성하고 만들어진 정권이다. 그런데 최근 민주당은 자유한국당과 손을 잡고 2019년 예산을 통과 시켰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민주당이 스스로 존재이유를 상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에 들어서 첫 번째 좌절감을 경험하기도 했다. 허나 이것 역시 시대의 어둠과 빛 중의 하나다. 우리는 계속 이 어둠을 줄여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는 그 어둠이 예전보다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과 구성원들에게 조언이나 당부하고 싶은 말은.

- 젊음은 그 자체로도 힘이고 은총이다. 얼마전 베트남을 방문했는데, 오후 4시임에도 허름한 교회에 많은 젊은이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기도, 성가, 호소가 가득한 그 광경을 보면서 우리의 1970년대부터 2000년을 떠올렸다. 지금의 시대는 그 이전의 세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베트남의 지금 이 순간이 20년 뒤의 베트남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기성세대를 '오늘'만 가지고 평가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그들의 과거를 보고 과거에 그들이 했던 일들을 '존중'한 뒤 평가하기를 바란다. 앞선 선배들의 삶은 어쩌면 지금 세대보다 더 치열했고, 절박했으며 고통스러울수 있다. 그 삶의 끝이 지금 이런 모습이냐고 비웃기 전, 그들의 치열한 삶을 바탕으로 우리의 사회가 변했음을 인정하길 바란다. 그래야 지금의 젊은이들의 오늘이 다음 세대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오늘은 내 것이지만, 미래는 오늘의 나로 인해 변하거나 도태하게 된다.

시대적 정의를 추구했던 선배 세대들에 대한 존중이 곧 다음세대에 영향을 줄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안개 속의 인생에 대한 지표가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병하 기자 bhn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