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홀로 우는 것이 아닌 더불어 우는 것, ‘공명’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홀로 우는 것이 아닌 더불어 우는 것, ‘공명’
435. 정돌이의 밥
  • 입력 : 2025. 02.20(목) 17:33
영화 ‘정돌이’ 스틸컷.
“밥 먹어라!” “정돌이 밥 먹었니?” “귀철아, 밥 먹었어?” 어쩌면 이 영화의 주제일 수도 있을 인사말이 두고두고 머릿속을 배회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정돌이’(김대현 감독, 2월18일 광주 독립영화관) 얘기다. 14살 가출 소년 송귀철이가 고려대에 스며들어 성장하는 과정을 소재 삼은 영화다. 초점은 고려대를 중심으로 한 1980년대 학생운동의 내력에 있다. 어린 송귀철의 시선으로 학생운동 장면들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 미묘하다. 전찬일 영화평론가가 다큐멘터리 ‘정돌이’를 소개하면서 울먹거리는 모습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이른바 운동권이었거나 학생운동에 우호적이었던 386세대 혹은 586세대에게 진한 향수를 안겨주게 된 장면들이 겹겹이다. 1980년대를 청년 학생으로 살아온 이들에게는 이 시기가 영광이기도 했고 회한이기도 했으며 죽음이기도 했고 삶이기도 했다. 영화 내내 인터뷰와 관련 영상들이 낱개의 개인들에게 간단없이 투사되며 마치 관람자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이어진다. 시위의 현장과 담론의 공간, 개별적인 장소들이 특정되기도 하고 고인이 된 여러 학생들의 묘지와 묘비들이 클로즈업되기도 한다. 이미 MBC 뉴스나 매불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소개돼 스포일러를 포함한 대강의 내용이 공개된 바 있다. 우후죽순 튕겨 나오는 감상문들을 보면 이 시기 청년 학생들이었던 이들의 향수가 빼곡하다. 상영 내내 울었다는 후기도 나온다.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억울함과 증오의 시대요 어떤 이들에게는 애증과 갈등의 시대며 어떤 이들에게는 승리와 자존의 시대이기도 했다. 더구나 지금 어처구니없는 계엄을 당하고 퇴행의 광란을 겪다 보니 1987년의 향수가 새록새록 돋아났을 것이다. 1987년에서 2025년으로 횡단했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만약 학생운동사만을 표방하고 시대 정의 등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감흥은 크게 감소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87체제에 대한 거대담론이나 그네들의 가치 지향을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고 정돌이에 대한 에피소드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돌이의 밥과 장구가 크게 도드라져 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깊이 읽는 이들에게 보이는 이면 같은 것이랄까. 영화가 끝난 후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도, 더 이어진 뒤풀이 시간에도 내 생각은 ‘정돌이의 밥’과 ‘정돌이의 장구’ 어디쯤에서 서성거렸다. 배고프던 시절의 “식사하셨습니까?”라는 인사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장구 연주인으로 성장해 일군의 지도자로 활약하게 된 송귀철의 장구 스타일을 말하자는 것도 아니다.



‘정돌이의 밥’과 ‘정돌이의 장구’

정돌이의 본명은 송귀철, 14살 가출 소년이다. 어머니의 가출과 죽음, 아버지의 학대 등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내력을 상기하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지지만, 지면상 생략한다. 우여곡절을 거쳐 고려대로 스며들어 형 누나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정경대에 살고 있는 꼬마라는 의미에서 ‘정돌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이때부터 운동권 학생들과 일거수일투족 생사고락을 같이하게 된다. 고려대 학생들에 의해 양육(?)되는 과정이었다고나 할까. 오죽하면 정돌이 한 명을 잡으면 고대 운동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을까. 하지만 이 시기 정돌이에게 떠오른 가장 큰 관심은 ‘밥’이었다. 형과 누나들이 정돌이만 보면 “밥 먹었니?”라고 묻고 늘 밥을 사 먹였기 때문이다. 정돌이가 고려대에 머물기로 작정한 이유도 밥이다. 영화 개봉과 비슷하게 장편소설로 출판한 김미경의 ‘정돌이’(어나더북스)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오징어볶음 반찬에 김치찌개와 함께 먹는 따뜻한 밥을 포식하면서 귀철은 뜬금없는 결심을 한다. ‘형들한테 잘 보여서 이런 데서 같이 살아야겠다’고 말이다.” 비로소 가난과 학대에서 벗어나 따뜻한 밥 한 끼를 더불어서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굶주림에서 벗어나 밥을 포식할 수 있게 된 정돌이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밥만 얻어먹고 자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필요한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귀철의 자존감을 북돋웠다.” 이때 정돌이에게 들려온 것이 농악반의 장구소리다. 차차 형들에게 장구를 배우고 시위에 동참하며 화염병 난무하는 실전에 참여한다. 사물놀이에 소질이 있음을 발견한 귀철이가 장구에 몰입하고 임실 필봉농악을 거쳐 사물놀이패 ‘미르’를 창단하게 된 내력이 1987년 봄과 4·13 호헌 조치에 대항해 개헌을 쟁취하는 풍경 속에 무색의 간지처럼 끼어있다. 그래서다. 학교를 다닌다거나 졸업을 한다거나 그래서 고려대인이라고 불리는 정체가 무엇일까? 오히려 정돌이가 14살에 조기 입학해 가장 오랫동안 학교에 머무른 진정한 고려대인 아닐까? 교육의 기능과 결과를 놓고 보면 수업 하나도 듣지 않고 입학이나 졸업도 필요치 않았던 정돌이야말로 가장 진솔한 학생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우호성을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대가 자신의 집이자 고향이며 영육의 거처였다고 고백하는 귀철의 증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남도인문학팁

고려대 소도(蘇塗)와 밥의 힘

“밥 먹었어?” “이리와 밥 먹자!” 이제 이 말은 고려대 형과 누나들의 말이 아니다. 정돌이 송귀철이 제자들을 향해 일상적으로 던지는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물놀이패 ‘미르’를 창단해 운영하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오면서도 그렇고, 누군가를 만날 때도 그렇다. 손수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먹였던 태도가 일종의 습관이 되기라도 한 것일까. 이 마음의 출처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궁금한 것은 송귀철의 어린 시절이 매우 불우하고 비참했음에도 어쩌면 가장 모범적이고 도덕적인 스승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힘의 근원이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우선 거론할 것은 가출 소년 정돌이가 성장해 독립하기까지 의지하였던 고려대 정경대의 소도(蘇塗)적 공간이다. 어디 고려대뿐이겠는가.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교에 일종의 소도가 있지 않았나. 전남대와 조선대만 하더라도 정돌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거론되는 것은 대학마다 일종의 소도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기능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장차 마한의 소도에 대한 시선, 예컨대 치외법권적 장소성의 이면을 재해석하는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도 있다. 정돌이를 폭압과 압제로부터 보호해 준 소도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사실 따뜻한 밥이라는 행위가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밥의 철학이라고나 할까. 동학 교주 최시형이 선포한 ‘밥이 하늘이다’라는 말씀을 상고한다. 하지만 지금은 명실상부한 혼밥의 시대가 돼버렸다. 정돌이의 밥이 주는 메시지가 더욱 긴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정익중 외 ‘혼밥이 아동·청소년의 행복감에 미치는 영향-빈곤여부에 따른 차이를 중심으로-’(한국사회복지학, 2023)에 의하면, 아동·청소년의 혼밥 횟수가 증가할수록 이들의 주관적 행복감은 감소한다. 빈곤하다고 해서 행복감이 저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정돌이의 사례를 통해서 충분히 검토됐다. 여기에 정돌이의 장구가 가지는 울림 곧 공명(共鳴)의 방식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홀로 우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우는 것을 공명이라 한다는 점 거듭 강조해 둔다. 그이와 얘기를 나눠보았더니, 정돌이가 지키고자 하는 세상이 있었다.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도 했다. 지키고자 하고 변하지 않아야 하는 그 중심에 뭐가 있을까? 정돌이의 장구가 공명하는 세상은 따뜻한 밥 한 그릇이 중심이었다. 고려대 혹은 전국 대학의 소도를 거쳐 생사의 길로 나섰던 이들이든 영욕의 길로 나아갔던 이들이든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다르지 않을 듯하다. 정돌이는 14살 때 고려대 형 누나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똑같이 말하고 실천할 뿐이다. 얘들아, 이리와 밥 먹자!
영화 ‘정돌이’ 포스터.
영화 ‘정돌이’ 상영 시간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