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홀로세의 끝자락에 서 있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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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홀로세의 끝자락에 서 있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433. 색살무늬-황인호 작품론
  • 입력 : 2025. 02.06(목) 17:15
황인호 作. 이윤선 촬영
붉은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었다. 며칠 밤낮 동굴에 몸을 숨겼다가 연두색 바람이 시작하는 날에야 간신히 동굴을 나왔다. 동굴 안의 그이를 불러낸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나서였다. 연푸른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새로 난 일곱 색깔 바람들이 엉키기 시작했다. 애무하는 것인지 밀어내는 것인지 난무(亂舞)의 행로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바람에게 색깔을 입힐 수 있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이런 서술이 가능하리라. 어디 바람뿐이랴. 하늘에서 내리는 빛이야말로 사실은 색깔 자체 아니던가? 빛의 삼원색에서 색의 삼원색이 내리는 내력이 그것이다. 빨강의 빛, 노랑의 빛, 파랑과 초록의 빛이 내리는 하늘 연못에는 색깔 이전의 어떤 근원들이 잉태되고 있는 것일까? 동양의 대표적인 메커니즘으로 알려진 음양오행도 사실은 공간과 시간에 덕지덕지 색깔들을 입혀둔 거 아닌가? 동쪽의 용에게는 푸른색을 입히고 남쪽의 주작에게는 붉은색을 입히는 마음 말이다. 형형색색 지상에 내리는 빛깔들은 어쩌면 이른 봄 대지를 적시는 빗줄기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북두칠성 자리 자미원의 하늘에서 옅은 검은색 비가 내리다 그친 어느 날, 휑한 동녘으로부터 연푸른색의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아니면 작렬하는 태양의 언저리 남녘 하늘 어디쯤에서 쏟아져 내리는 붉은 빗줄기 같은 그런 풍경이라고나 할까. 내가 보기에 이런 풍경의 이면으로 다가설 수 있는 이들은 주로 예술가들이다. 바람의 결을 보고 날씨를 예측하고 구름의 색깔을 보고 기후를 판단하는 촉수가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을 상기한다. 우리 삶에 과학과 경제만 중요하겠는가. 선율에 색깔을 입혀 리듬을 얹거나 어떤 공간에 색들을 입혀 살아 숨 쉬게 하는 작업들이 오히려 더 중요할 수 있다.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진단하고 그를 공명하게 하는 게 상식(常識, common sense)이다. 현대인들이 그 오래된 감각(sense)을 잃어버렸을 뿐이다. 나는 이런 풍경을 주로 들뢰즈가 제안했던 체세포(soma)와 생식질(germen)의 교섭으로 풀어왔다. 이를 다듬어 상고하면 노장(老莊)의 무위자연에 이르고 홀로세의 첫자락에 대입하면 우주생성의 카오스에 이른다. 내가 지난해 홍가이의 저서 ‘기(氣) 오스모시스 신(新) 예술론(뷔더북스)’를 인용하였던 까닭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동양 사유와 한국 고유의 선가적 수행을 통한 새로운 예술 담론 기오스모스의 예술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고, 기오스모스적 예술들은 하나같이 21세기의 새로운 예술사조로서 세계예술을 선도할 수 있다.” 기(氣)의 삼투압을 이론물리학으로 추적한 책이다. 뜻밖에도 지난해 섣달 인사동 마당 넓은 갤러리, 황인호 작가의 전시를 보며 이런 생각들을 되새기게 되었다. 날줄의 바람과 씨줄의 비가 교섭하여 잉태한 기오스모시스라고나 할까. 사람의 손길 없이 그림이 저 스스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할까. 하지만 무명작가라서 그런지 누가 크게 주목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작품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나 같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도저한 메시지가 있었으니 이를 기록해 두는 것도 우리 예술사에 긴요하다싶어 감상을 남긴다.

황인호 作. 이윤선 촬영
빗살무늬와 색살무늬의 아우라, 홀로세(Holocene)의 사랑

전시장에서 작가에게 물었다. 당신의 작품들을 보니 노장(老莊)의 무위자연이 떠오른다. 컨셉 혹은 지향이 무엇인가? 아니나 다를까 작가의 시선은 기원전 홀로세(Holocene)로 돌아간다. 그가 기획한 작품들의 시놉시스 첫 장면이 이렇다. “2500년 전, 우수의 이른 아침이다. 밤새 보슬비가 내려 축축해진 거무튀튀한 헌 이엉에서 눅눅한 찬 공기가 움집 내부로 스멀스멀 스며든다. 진흙을 파고 만든 둥그런 화로에서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의 따듯함이 찬 공기를 감아올려 반쯤 열려진 입구로 옅은 연기를 향하게 한다. 이른 아침 아빠인 둥근돌이 이미 군불을 때고 나간 모양이다. 밖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벵듸와 한장에서는 이미 추웠던 겨울이 끝나가는 듯하다. 남라는 사슴가죽 덮개 위로 이마와 눈만 반쯤 내밀어 집 밖을 살펴본다. 마을 아래에서 바당으로 흘러내리는 산 물 때문인지 오늘은 안개가 짙게 내려앉아 있다. 희미하게 보이는 한적한 마을 모습을 보면서 남라는 다가올 봄을 혼자 부끄럽게 상상한다. 그러다 문득 남에게 들킬세라 다시 덮개 속에 분홍빛 얼굴을 감추고 만다.” 기원전의 낯선 이름들, 어쩌면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았을 시절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오버랩되는 장소는 낯익은 제주도의 어느 바닷가다. 홀로세의 아담과 하와일까? 뱀처럼 서로의 몸을 휘감고 있는 여와와 복희일까? 사랑이 시작하는 근원의 풍경을 그린 듯싶지만 사실은 홀로세의 끝자락 문명의 종말적 풍경에 대한 복선이기도 하다. 작가의 스토리 라인은 이렇게 이어진다. “빛을 가진 자와 그 세력들이 마을을 급습해 마을을 불태우고 살육과 납치와 파괴를 저지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남쪽 오름의 큰 폭발과 함께 검은 화산재가 온통 하늘을 뒤덮었다. 해와 달이 가려져 어둡고 두려웠던 며칠이 지나고 화산 비 내리던 밤, 살아남아서 쪽바당 끝섬에 숨어 있던 남라와 땅끝손은 작은 테우에 몸을 싣고 우뚝 선 커다란 바위 밑을 지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해류에 의지한 채 기우뚱거리는 테우 위에서 남라는 칠성아기와 가문장아기에게 기도했다.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이 장면에서 내가 생각한 물음은 이런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돌입한 우리가 과연 자연과 더불어 살던 홀로세의 첫 장면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예술은 모름지기 그런 것이다. 어쩌면 홀로세의 끝자락에 서 있을 우리에게 작가가 전하려고 한 메시지 말이다. 색염 바탕의 캔버스와 종이와 혹은 거친 나무판에 바람과 빛과 하늘로부터 내린 빗줄기들이 씨줄날줄로 교직된 듯한 작품들을 보며 나의 질문은 깊어만 간다.
황인호 作. 이윤선 촬영
남도인문학팁

노장(老莊)의 기(氣)오스모시스, 황인호의 플루이드(fluid) 색염(色染) 아트

황인호의 작품들은 거의 전부 라이브 페인팅 혹은 풀루이드 염색 아트 기법을 활용한다. 가느다란 호스에 천연염료를 담아 오랫동안 흘러내리게 하는 기법이 그 중심이다. 쪽물염색을 기반삼은 듯도 하고 현대 추상화 기법을 모티브삼은 듯도 하다. 물감은 전부 천연염료다. 다양한 도구들을 이용해 물감이 저절로 흘러내리게 하니 의도치 않은 추상이 구현된다. 나는 이 작품들을 보자마자 빗살무늬토기를 떠올렸고 곧바로 색살무니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빗살무늬토기 문양들이 홀로세의 시작 언저리에서 상상한 빗물의 무늬라면 황인호 작품의 무늬들은 홀로세의 마지막 어느 지점 하늘로부터 내린 색깔들일 것이기에 그렇다. 더불어 생각한 것은 마치 노자와 장자의 무위자연, 혹은 홍가이가 말했던 기오스모시스의 구현이었다(기오스모시스에 대해서는 이전 내 칼럼을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인위적인 그리기를 배제하고 그림 스스로 그리게 하는 기법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존재 근원의 삼원색과 그 방계의 색들이 저들 스스로 애무하고 배제하는 색살무늬같은 것이니 사전적 정의의 ‘그림’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수 있다. 향방을 알 수 없는 현대미술의 해체와 파행의 행로 속에서 혹시 어떤 길을 찾게 된 몸부림일까. 풀어 설명하면 바람과 빛과 빗줄기에 입힌 색깔의 입자들이 무위자연의 파동으로 교직된 작품들이다. 그래서다.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한다는 현대미술의 해체주의적 경향 속에서 이 무명작가의 시도가 주는 메시지의 크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 먼 어느 날 홀로세 예술의 시종(始終)을 서술하는 비평가가 있다면 이렇게 기록할지 모르겠다. 홀로세의 시작에 빗살무늬가 있었고 홀로세의 끝자락에 색살무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