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2024년 한 해가 지나갔다. 경기 침체, 의료대란 그리고 헌정 사상 세 번째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등의 대형 이슈들이 끊이지 않은 한 해였다. 광주는 5·18민주화운동의 아픈 역사가 있는 민주화의 성지이다.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로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로 진입하는 모습을 지켜본 광주 시민들은 80년 5월 이후 44년만에 되살아난 계엄의 악몽 속에 충격을 받은 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가오는 2025년 을사년(乙巳年) 새해에는 국가 안정과 경제 회복이 이루어지고 국민이 편안한 날이 이어지길 기원한다. 제8차 광주시민 총궐기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지난 28일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윤 대통령 탄핵 구호를 외치고 있는 가운데 차량들이 궤적을 그리며 금남로 일대를 주행하고 있다. 나건호 기자 |
예를 들어 지난 2023년을 마무리하면서 본보가 제시했던 키워드는 ‘챗GPT’였다. AI의 일상화가 챗GPT를 통해 본격화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그 방향이 좀 달라졌다.
1년 내내 회자된 단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국민 속내를 보면 대다수에게 늘 존재했던 단어 바로 ‘가’다.
2024년 12월13일 1면 <대한민국을 지키는 데 필요한 한 글자 ‘가’> 지면을 활용해 게시물을 올린 지역·중앙 정치인들. 왼쪽부터 강기정 광주시장·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박홍근 국회의원. 정성현 기자 |
여기서의 ‘가’는 옳고 그름의 뜻을 지닌 한자어 가부(可否)에서 가다. 탄핵소추안에 국회의원들이 찬성을 표명할때 쓰는 것으로 한글로 ‘가’라고 명시하거나 한문으로 ‘可’라고 쓰면 된다.
그렇다면 단 하루만 통용될 이 단어가 왜 올해를 상징하는 단어로 선택됐을까.
이 단어에는 국민들이 1년 내내 현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13일자 본보 1면 지면은 곧바로 인터넷을 통해 전국으로 급속히 퍼졌다. 소셜미디어(SNS)가 가장 빨랐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자신의 SNS에 “투표해 주세요”라는 게시물을 올리며 본보 1면을 첨부했다.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도 같은 날 같은 지면을 통해 동료 국회의원의 투표를 독려했다. 이날 조국 전 대표의 게시물에는 좋아요 950개·공유 46회 등의 호응이 있었다.
실제로 이날 발행된 지면은 인스타그램·페이스북 등에서 이미지화 돼 폭발적인 화제를 이끌었다. X(구 트위터)에 게시된 콘텐츠는 22일 기준 75만 조회수·2만 리트윗 등을 기록했다. 인스타그램에는 본보 지면을 활용한 변형 콘텐츠물이 게시되기도 했다. 에펨코리아·여성시대 등 유수 커뮤니티에 게재된 글에는 ‘전남일보 참 한결같은 언론’ ‘전남일보라 더 멋있다’ ‘좋아 빠르게 가’ ‘이 종이신문을 굿즈로 소유하고 싶다’ 등의 호응이 잇따랐다.
X에 1면을 게시한 이유리씨는 “이게 바로 호남의 기개다. 5·18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저널리즘을 정말 사랑하는 순간”이라며 “택시운전사를 본 이들이라면 신문이 가지는 힘을 알 것이다. 내란 이후 수많은 예술이 탄생한 게 슬프다. 이날 지면 너무 탐난다”고 밝혔다.
광주에 거주하는 간호사 김세원씨는 “인스타그램에서 전남일보 1면을 보고 ‘일냈다’는 생각을 했다. 지역민으로서 정말 뿌듯했다”고 했다.
신수정 광주시의회 의장은 “탄핵 직전 국민적 분노가 극에 달했던 상황에서 나온 전남일보 1면을 보고 ‘역시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며 “시의원이자 한 시민으로서 뿌듯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단순히 투표 의사 표현 ‘가’의 의미도 곧 바뀌었다. 더불어민주당 박홍근(서울 중랑구을) 의원은 본보 지면을 활용한 색다른 콘텐츠를 만들어 홍보했다. 박 의원의 게시물에는 ‘대한민국 위해 가! 민주주의 위해 가! 국민의힘 모두 가! 윤석열은 감옥 가!’ 등 풍자 섞인 글귀가 담겼다. 여기서의 ‘가’는 ‘가라’는 뜻의 명령의 의미를 지녔다. 그리고 이는 집회의 피켓에도 등장했다.
국민들은 이 탄핵안 투표를 통해 윤 대통령에게 ‘대통령 자리에서 그만 나가’라고 해석하고 이를 반긴 것이다.
지난 1년간 윤 대통령이 잘해왔다면 과연 이런 분위기가 조성됐을까. 국민들은 이미 윤 대통령에 대해 실망을 넘어 포기에 가까운 상태였다. 국민들은 윤 대통령의 집권 기간인 3년동안 △법률안 거부권 남용 △채 해병 사망 사건 수사 외압 및 은폐 시도 △세관 마약 수사 외압 △국민의힘 당무 개입 △공천 개입 △‘명태균 게이트’ 관련 대선 여론조사 조작 △김건희씨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및 명품백 수수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 특혜 △대통령 집무실·관저 신축 비리 △대일 굴종 외교 △방송 장악 등 각종 논란에 시달려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지난 3일 국가 내란인 불법 계엄까지 선포했다. 이는 참고 있던 국민들에게는 선을 넘은 행위였고 강한 분노가 표출됐다. 이 모든 것이 압축된 글자가 바로 ‘가’였던 셈이다.
이제 새해가 밝아 온다. 2025년에는 많은 것들이 바뀔 가능성이 높다. 아니 바뀌어야 한다고 다수의 국민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금 국민들은 윤 대통령과 현 정권을 향해 오직 한 마디로 말하고 있다. “가!”
노병하·정성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