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이 쓰고 그린 명상시집 1. |
송기원이 쓰고 그린 명상시집 2. |
담배 한 대 피워무는 그대/ 아스라이 걸려 있는 시간들을
무심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네/ 그렇게도 보기 싫고
때로는 지워버리고 싶었던 발자국들 속에/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네
물들 수 없는 영혼이기에 / 그대의 삶은 더욱 뒤틀리고
스스로를 뭉개버리며 존재에 대해 진저리를 쳤었지
그럴듯한 이념의 틀 안에 있을 때도/ 달콤한 허울을 입혀주었을 때도
그대는 그 안에 있으면서도 / 그대는 언제나 밖에 있었지
버림받은 영혼들을 위해/ 선창가 주막의 노래가 되고
사창가 외로운 이의 벗이 되고/ 헐벗은 노동자의 술잔이 되어
온 통으로 그대의 영혼을 내어주었지/ 때로는 방랑자가 되어 떠돌기도 하고
수행자가 되어 토굴에 머물며/ 안으로 안으로 만의 여행을 했었지
무애행(無礙行)!/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그가 선택한 이번 생 그의 삶은/ 무애행을 통해 자신을 통으로 담금질하고 있었구나
그가 드리운 그림자에/ 언제나 한산(寒山)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던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네/ 문학이 무애행의 방편이 될 수도 있음을
그대는 온몸으로 보여 주었네/ 그대가 지나온 자리마다
이제 꽃자리가 되어/ 언제라도 보는 이들에게 꽃망울을 터트려 보여 줄 수 있다네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영혼 / 평생을 뒹굴어 상처뿐인 줄 알았는데
그대의 발자국, 발자국 마다가/ 그대로 진실을 향해가는 해인(海印)이었음을
그대는 땅끝 문학의 집 마루에 걸터앉아/ 소주 한잔 들이키고 담배 한 대 불붙이며
무심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네/ 그대의 해골을
그대의 찬란한 꽃자리를
이승의 마지막 벗 강대철이 송기원에게 헌정한 노래
2023년 11월 해남 땅끝순례문학관, 일정을 연장해가며 열렸던 전시회에서 내가 남도 구음 형식을 빌려 장구 하나 들고 구송하였던 노래, 한국 조각의 전설 강대철이 한국 소설의 전설 송기원에게 헌정한 시다. 송기원의 평생을 강대철이 짧은 노래 한 곡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말년에 남녘 해남에서 조우했던 인연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375회(2023. 12. 15) 본 지면에 조각가와 소설가의 어떤 해후(邂逅)라는 제목으로 이를 소개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구송이 그이에게 드리는 마지막 노래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사실 마지막 장편소설 <숨>에서 당신이 이승을 떠날 날짜를 예정해놓았음을 알아차린 이들이 많지 않다. 먼저 간 딸을 화자로 내세운 명상소설, 254~255쪽의 몇 장면만 인용해본다. “참으로 오랜 시공간이 지난 다음에, 딸과 나는 비로소 함께 죽음의 순간을 맞은 것이다. 둘의 시체가 하나의 존재가 되면서 죽음의 순간을 완성한 것이다.....깊고 고요한 사선정의 평온 위로, 하얗고 투명한 까시나가 엷은 망사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그리고 까시나의 커튼 위로 수수께끼처럼 숫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2,0,2,*, 7,1,7.......바로 내가 딸을 찾아서 시공간을 건너갈 날짜였다.” 소설에서 당신이 죽을 날짜를 예언했던 202*년 7월 17일을 거의 적중했다고나 할까. 2024년 7월 31일 피안(彼岸)의 세계, 저 언덕 너머로 건너가셨다. 어떤 이들에게는 뜬금없는 이별이 되었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소설에서 예언한 것처럼 어렴풋이 예정된 이별이었을 것이다. 그는 시와 소설뿐 아니라 위빠사나 등 수준급 명상 전문가였다. 일종의 구도자요 수행자였다고나 할까. 그의 많은 소설에서 이런 내력을 엿볼 수 있다. 섬망 증세를 비롯하여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도 탁월했다.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많은 것들이 보인다고 애써 피하기도 했다. 내게서도 무엇을 보셨는지 내가 태어난 태자리를 꼭 가보자고 하여 이태 전 내 고향마을에 함께 다녀온 적도 있다. 필연인지 우연인지 그이의 말년에 이러저러한 일들을 곁에서 지켜본 셈이 되었다. 강대철과 더불어 말년의 우정을 나누던 자리에 내가 번번이 끼어들어 재롱을 떨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면회도 안되고 의사 전달도 안되는 상황에서 손글씨가 강대철에게 전달되었다. ‘강대철이 보고 싶다, 조성장에 가고 싶다’라는 글이었다. 누구나 삶의 마지막은 수구초심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피를 저주할 만큼 고통스러웠던 가족사의 내력, 보성군 조성면 새재 마을과 장돌뱅이 어머니에게로 말이다. 사실은 이 내력들이 나와 비슷하여, 내 첫 시집의 표사(表辭)를 써주시는 등 말년의 사랑을 받았음을 고백해둔다. 윤지관이 말했던 것처럼 “김대중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9년 형을 선고받은 민주투사였고 출옥 후 어머니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실을 알게 된 사연을 가슴 아프고도 담담하게 그려낸 <다시 월문리>에서의 작가였던” 사람, 문익환 목사가 소설을 읽고, 바로 당신이 예수라고 고백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어쩌면 지상의 벼랑에 홀로 서 있던 예수였을까?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내세우지 않고 장차 노숙자로 죽으리라 고백하던 이였다. 이 땅에 끼친 문학적 영향과 마지막 제자랍시고 글을 끄적이는 나를 비추어보기 위해 <인도로 간 예수> 후기를 덧붙여둔다. “그렇듯 더러운 욕심만이 돋보이는 내 글에도 만일 실오라기 같은 진정(眞情)이 깃들여 있다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어쩌다 불운하여 내 삶에 자칫 잘못 끼여든 것 같은 그런 진정을 느낄 때마다, 나는 무슨 은총처럼 눈부시고 그렇게 눈시울이 뜨거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 시방 내 눈시울이 뜨겁다. 애오라지 한국문학 하나만 붙들고 수도승처럼 살다가 저 언덕 너머로 향하신 나의 사표(師表), 이제는 곡절 없을 그곳에서 부디 영면하시라.
남도인문학팁
한국 소설의 전설 송기원의 일생
1947년 전남 보성군 조성면 새재마을에서 태어났다. 내가 직접 들었던 아버지와 장돌뱅이 어머니 얘기가 사무치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조선대학교부속 고등학교 졸업, 고등학교 때부터 각종 문학상을 받았다. 1967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 ‘불면의 밤’이 당선되었다.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베트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1974년 단편소설 ‘경외성서’가 중앙일보에, 시 ‘회복기의 노래’가 동아일보에 동시에 당선되었다. 군부독재시절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4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김대중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것이 대표적이다.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들이 빨갱이라는 모함을 견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중앙대 문예창작과 초빙교수로 강단에 섰다. 백혈병으로 세상을 뜬 둘째 딸 이야기를 쓴 게 마지막 장편소설 <숨>이다. 말년에 해남 소재 땅끝순례문학관에 은거하였다. 평생의 문학 인생과는 사뭇 다른 삶, 그래서 이곳에서 나를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소설집으로 <열아홉 살의 시>, <월행>, <다시 월문리에서)>, <인도로 간 예수>, <사람의 향기>, <늙은 창녀의 노래> 등이 있고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등 다수의 시집을 남겼다. 2024년 7월 31일 향년 77세, 숙환으로 영면의 길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