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에세이>다만 읽는 일 그 자체를 보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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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칼럼
작가 에세이>다만 읽는 일 그 자체를 보람으로
박영덕 광주문인협회 수석부회장·수필가
  • 입력 : 2024. 06.20(목) 17:07
박영덕 광주문인협회 수석부회장·수필가
좋은 책을 소개 달라는 청을 종종 듣는다. 책을 어떻게 읽는 것이 좋은지도 자주 듣는 질문이다. 쉬이 대답하기가 어렵다. 내 생각에 책이란 여느 것 못지않게 기호적이어서 내가 읽고 나서 얻은 그 감동의 환희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도 똑같이 일리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물 마시는 법도 다른 것이 사람인데 하물며 정신적 도우미 선택에 무슨 말을 감히 보태겠는가. 책을 어떻게 읽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답도 난제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럴 때면 다만 요즘 나의 책 읽기를 전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올해 들어 오래된 책들을 다시 읽는다. 오래 읽어 온 책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오랜 친구는 모처럼 만났다 해도 새삼 인사치레 할 필요도, 굳이 수다로 격조했던 시간을 말랑하게 주무를 필요도 없다. 입가며 눈가에 얇은 주름을 잡으면서 싱긋 웃어 주면 충분하다. 요즘 그렇게 오랫동안 정든 책들을 다시 읽는다. 두고두고 읽어 온 책에는 나의 손때가 묻어 있다. 어디 손때만이겠는가. 읽고 또 읽어서 나의 눈 때까지 엉겨 있다. 글자마다 줄마다 눈에 익은 것이 새삼 정겹다. 예전에 0.3mm 샤프펜슬로 가늘게 밑줄 쳐둔 것이 거듭 정답다. 무슨 열정이 그리도 활화산처럼 솟구쳤던가. 원고지 절반을 잘라서 어떤 문장에 대한 소고를 적어 그 문장 있는 갈피에 넣어 둔 것도 첫사랑의 편지만큼이나 애틋하다. “아, 이런 구절도 있었던가?” 또는 “아이고, 이 대목은 그런 뜻이 아니었나?” 하는 궁시렁거림도 마냥 즐겁다. 그러면서 친구의 손을 잡듯이 오래된 책갈피를 만져 보면 지질도 빛깔도 낡은 책갈피가 마치 주름 잡힌 옛 친구의 얼굴 같다.

책을 엄청난 속도로 속독하는 사람이 있다. 요즘은 자기 개발서의 일종으로 속독법을 소개하는 책들도 인기리에 출간되는 모양이다. ‘빨리 읽기’는 그것대로 여간 큰 재능이 아니다. 속독은 대개 통독을 겸한다. 여우에 쫓기는 토끼가 풀밭을 달리듯 책갈피를 넘길 수 있으면 그건 속독이고 통독이다. 속독은 마음이 시원해서 좋고 통독은 마음이 통쾌해서 좋다. 이 둘을 겸하면 책과 독자 사이에 절로 속이 통하게 된다. 그러기에 속독을 날림 읽기라고 비방 할 수 없다. 음속 이상의 속도로 날고 있는 인공위성을 보고 날치기로 난다고 퉁을 놓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 같은 IT 정보화 시대에는 더 한층 절실하게 제구실을 해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숙독, 이를테면 천천히 ‘읽혀 읽기’를 시대에 뒤처진다고 할 수 없다. 집게손가락 끝에 침을 묻히고 차근차근 페이지를 넘기면서 콧잔등이 시큰해지도록 눈여겨 책장을 들여다보는 숙독은 잠으로 치면 숙면과도 같다. 과일이 숙성하려면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의 풍상을 겪어야 한다. 그래야 맛과 향이 더해진 숙과(熟果)를 맛보게 된다. 숙독은 과일이 계절의 변화를 견디며 숙성하듯 그렇게 읽는 것이다. 천천히 꼼꼼히, 정성을 기울여서 읽어야 한다. 두 번 세 번 겹쳐 읽다 못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마지막 두어 장은 차마 읽지 못하고 하루 이틀 아껴두었다가 읽는 것이 숙독이다.

만약, 속독과 숙독을 두고 한사코 우열을 말하라고 하면 나는 한사코 손사래를 칠 수밖에 없다. 시대가 요구하는 대단한 재주 속독과 읽음의 농익은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숙독이라니, 이 극단적으로 다른 두 가지 책 읽기에 흑백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 옳고 그름을 가리듯 양자택일을 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책들이 눈살을 찌푸릴 게 뻔하다.

두 갈래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한다. 이 길을 가다가 저 길로 옮겨가야 한다. 저 길을 가다가 이 길로 옮겨와야 한다. 그러다가 드디어는 두 갈래 길이 한 가닥으로 모일지도 모른다. 독서는 망라(網羅)라고 했다. 속독이건 숙독이건 눈결을 그리고 관심을 던져 그 모두를 감싸 안아야 한다.

독서를 위한 나의 소망이 있다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늙은 어부를 닮고 싶은 것이다. 처음 고기가 걸렸을 때 노인은 워낙 큰 고기라서 웬 횡재냐고 좋아하면서 돈을 따져 보기도 했지만, 지칠 대로 지쳐 항구에 돌아왔을 때 그는 빈털터리였다. 그러나 중얼댄다. “아무 것도 아니야, 너무 멀리 나간 것뿐이야” 이틀밤낮을 걸려서 겨우 얻은 것을 잃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다만 일에 바친 열정이 중요했을 뿐이다. 과정만 귀하고 결과에는 관심이 없는 것은 절대 자유다. 나의 책 읽기도 그랬으면 좋겠다. 무엇을 얻어 낼 것인가를 물을 것 없이 다만 읽는 일, 그 자체가 유일한 보람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