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험 시작 전 전 마지막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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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 맡은 수업들의 기말 시험을 이번 주에 본다. 처음 대학교 수업을 맡으면서는 시험을 보지 않으려 했다. 토론식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과제를 몇 차례 내줘서, 수업의 질의응답에 얼마나 참여했느냐, 과제의 성실도와 창의성, 과목에 따라 실습 프로젝트의 발표 등만 가지고 성적을 내려고 했다. 그런데 수강 인원이 100명 가까이 되면서, 토론식 수업이란 게 내 능력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수천 명의 수강생을 두고도 토론과 과제로 수업을 진행하는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저서를 낸 마이클 샌델이나 ‘통섭’의 최재천 선생 같은 분이 계시지만, 개인 능력도 문제지만 조교도 없이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상대평가로 성적에 예민한 학생들에게 이른바 객관적인 지표가 필요한데, 정오(正誤)가 분명한 객관식이나 단답식 시험 만한 것이 없었다.
시험의 형식이 고민거리가 되었다. 교실에서 시험지를 내주고, 답안지를 메꾸어 제출하는 형태로 학창 시절에 시험을 봤다. 아직도 가장 보편적인 유형 같았다. 학교 규칙을 보니 답안지를 1년인가 보관해야 하고, 이의신청을 하면 답안지를 찾아서 확인을 해줘야 할 텐데, 보관과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천성이라 자신이 없었다. 자료를 제대로 찾고 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한자리에 모아놓고 시험을 보면, 머리에 있는 것을 빨리 꺼내서 쓰는, 암기 위주로 흐를 공산이 컸다.
무엇보다 시험 감독을 해야 한다는데, 학생들을 의심하고 관리하는 모양새라 내키지 않았다. 대학 시절에 치른 시험들은 잠재적 부정행위자로 학생들을 보는, 감독하는 행태만으로 보면 중·고교 시절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럴 여지를 학생들이 자초한 부분도 있다. 시험에 나올 만한 내용들을 새까맣게 책상에 적는 친구들도 많았다. 시험에 도움이 될 내용을 적은 소위 ‘컨닝 페이퍼’라고 부르던 종이를 볼펜이나 소매에 감추고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 컨닝 페이퍼를 가지고 들어 갔던 대학 1학년 공통 필수 과목의 시험이었다. 깐깐하게 시험 감독을 하기로 유명하다는 교수 분이 들어왔다. 명성에 맞게 하려는 것이었는지, 교수님이 학생들의 자리를 마구 뒤섞기 시작했다. 첫 번째 줄과 네 번째 줄 학생들의 자리를 서로 바꾸든지 하는 식이었다. 책상에 답안으로 쓸 내용을 적은 친구들이 한숨을 쉬고, 약간의 저항도 하는데, 주머니 속에 컨닝 페이퍼를 가지고 들어온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대학에서까지 시험에서의 부정행위를 방지한다고 자리를 바꾸는 유치한 강제를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에 저항하기 위해서도 내 자신이 떳떳해야 했다. 컨닝 페이퍼를 미련 없이 버렸고, 이후로 만든 적이 없다.
답안지를 따로 보관할 필요 없고, 학생들이 원하는 대로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오픈북’에, 감독하지 않는 시험을 보자고 원칙을 세웠다. 자연스럽게 온라인으로 시험을 보게 되었다. 코로나19 시대를 거치며 온라인 강의 프로그램들이 좋아졌다. 한 시간 동안 시험 문제를 공개하고, 학생들이 어디서나 접속하여, 마음대로 시험을 보게 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학생들도 충분히 익숙한 방식이었는데, 시험 보는 동안 카메라를 켜놓고 있어야 하냐는 질문이 나왔다. 처음에 무슨 뜻인지 파악하지 못했는데, 학생들이 시험 보는 동안 자신의 상황을 화면으로 띄우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럴 때 감독을 하는 교수는 어떻게 하냐고 묻자 학생들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교수를 본 경우는 없다고 한다. 오직 그들이 감시 당하고 있다는 사실만 감지하고 있었다.
카메라로 자신의 상태를 비추며 시험을 보는 학생들을 감독하는 이가 얼마나 철저하게 볼 수 있을까. 카메라를 켜고 있다는 자체로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무언가 부정행위가 카메라에 잡혀서 들키면 엄한 징벌이 따를 것이란 경고를 했을 것이다. 완력으로 이름을 떨치던 고교 시절의 선생님 한 분은 그런 징벌적 체벌을 ‘시범 케이스’라고 불렀다. 별 잘못이 없이 시범 케이스로 모질게 당하는 친구들도 있었으나, 그 친구의 억울함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나 당할 수 있다는 공포심을 배가시킨다는 측면에서 더욱 효과적이라고 봤을 수도 있다. 모든 학생들을 잠재적 부정행위자로 취급하는 건, 그런 폭력이 아니고는 부정을 억제하지 못한다는 경험과 자기인식에서 초래한 건 아니었을까.
미국이 최초로 패한 전쟁이라는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은 세 가지 판단착오를 하면서 전쟁의 수렁에 빠졌다고 한다. 첫째, 2차대전 이후 베트남인들 대부분이 지지한 호찌민을 공산주의자로 생각했다. 그래서 억지로 남쪽에 반공을 내세우는 반쪽 국가를 세웠고, 베트남전쟁이 시작되었다. 둘째로는 호찌민과 그가 지도자로 있는 월맹을 소련과 중국의 꼭두각시로 생각했다. 마지막으로는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옆 국가들로까지 침공하여 도미노 이론으로 공산주의가 전파되고, 동남아시아를 휩쓸 거라고 봤다.
위의 판단착오는 미국의 자기 인식에서 기인했다. 냉전상태의 이념 과잉에 매카시즘이라는 집단 히스테리아에 빠져,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은 공산주의자로 몰아버렸다. 미국의 뜻에 맞지 않는 정권은 갈아치우며 꼭두각시 독재자들을 양성하며, 공산주의자라고 낙인 찍은 호찌민의 월맹도 당연히 소련과 중국과 그런 관계라고 여겼다. 자신의 세력을 기회만 되면 넓히려고 했으니, 베트남도 공산화되면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베트남전의 비극은 미국의 자기중심적 생각에 대한 과잉 반응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을 합친 것보다 많은 폭탄을 미국은 베트남전 동안에 쏟아부었다. 미국의 그런 과도한 폭력도 그런 허약한 사실 기반에서 나온 막연한 공포에, 그래서 더욱 심하게 시범 케이스를 통한 공포를 자아내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말 시험을 보기 전에 역시 온라인으로 받은 과제의 채점을 하기로 했다. 온라인 프로그램의 설문지 기능에 무한히 감사하면서, 보통 세 문항 정도로 된 과제의 채점을 했다. 중간에 집안 청소도 하고, 식사도 차렸다가 잠깐 외출 했다가 돌아와 다시 자세를 갖추고 시작했다. 처음 채점 대상이 된 학생이 답변을 멋지게 썼는데, 앞에서 똑같은 답안을 본 느낌이 들었다. 전반부에서 봤던 답안이 뛰어났기에, 기억에 남았던 만큼 실망을 넘어 분노가 일었다. 최근 광고에 대한 분석인데 아마도 모범 답안이 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같은 답안을 쓴 둘은 교수라는 작자가 별로 신경 써서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싶었다. 앞서서 봤던 답안들을 하나하나 다시 봤다. 범인이 잡혔다. 범인은 나였다. 원래의 답안을 보고는 다른 일을 하고 시간이 지난 이후에, 같은 답안을 다시 본 것이었다. 그리고는 답안을 베껴 쓰든지 공유를 했다면서 혼자 흥분했던 것이었다. 자책하면서 학생에게는 최고점수를 주었다. 좀 더 차분히 오래 앉아서 꼼꼼하게 보기로 했다.
사람에게 의심을 품는 게 심해지면, 편집증적으로 잘못만이 두드러져 보인다. 실상은 거기에 자신의 허물이 투영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고 쏟아 부은 화살은 부메랑처럼 자기를 향하여 날아오기 십상이다. 가톨릭에서 캠페인처럼 벌였던 ‘내 탓이오’를 외치지 않더라도,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을 누군가를 비난하기 전에 한번은 되뇌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