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이름도 빛도 없는 남도의 핏빛으로 오늘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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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이름도 빛도 없는 남도의 핏빛으로 오늘 우리가…
394)지정남의 환생굿
지정남이 고만자로 변신하여 소환한 환생자가 변미화 뿐만이 아니다… 지정남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당골이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고 무대와 객석을 오가며 혹은 그 어떤 무엇과 또 다른 무엇을 오가는 능력의 교신자
  • 입력 : 2024. 05.09(목) 18:11
  •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지정남 환생굿 공연장면-서울삼일로창고극장 (1)
지정남 환생굿 공연장면-서울삼일로창고극장 (2)
지정남 환생굿 카달로그
울리는 꽹과리와 자바라의 굉음이 온몸을 휘갈겨 내리는 소리에 섞인다. 아니 자바라의 굉음이 곤봉 소리인 모양이다.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굉음 사이를 뚫고 재빠르게 달아난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이미지들이 허공 중으로 흩어진다.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저 밥만 했어요. 때리지만 마세요~” 다시 곤봉인지 채찍인지 무자비한 굉음이 어지럽게 허공을 후빈다. 변미화, 1921년 2월 10일생, 전남방직에서 근무했다. 떨리는 목소리가 극장을 울린다. “언니가 안 들어 왔어요. 언니 찾으러 금남로에 갔어요.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어요. 여기저기 살려달라는 아우성들이 들렸어요. 군인들이 쫓아왔어요.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잔인하게 죽일 수 있당가요. 그래서....도청에 가서 밥했어요...”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진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어떻게...그냥 가요!” 객석에서 흐느끼는 소리들이 들린다.



생리대 없이 피범벅 된 80년 오월 여인들의 이미저리



지난주, 서울 삼일로창고극장 환생굿 한 장면이다. 지정남이 극작, 기획, 연출, 진행, 연기를 다 맡았다. 모노드라마, 아니 모노굿이라고 해야 하나. 화순 능주씻김굿 보유자 조응석과 악사 김종일이 각종 악기며 구음 등을 가로질러 바라지를 한다. 첫 장면은 지정남이 화순의 아마추어 당골 고만자로 변신하여 등장하는 대목이다. 창극으로 말하면 도창이다. 극중의 고만자는 오뚜기식당 사장 김윤희의 의뢰를 받아 굿을 차린다. 건물 청소 일을 하다 쓸쓸하게 죽은 변미화와 함께 5.18의 마지막 항쟁지 도청에서 밥을 짓던 사이다. 새침하고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몸짓이 관객과 직접 소통한다. 몸의 어정거림이 묘미요 노래의 틀어짐이 오히려 맛깔스럽다. 남도 사람들은 안다. 징함과 오짐이 버무려져 한마당을 펼치는 귄진 세계들을. 다시 변미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광산경찰서, 여자들만 백 명도 넘게 잡혀갔어요. 여자들만 있어 놓으니....생리...생리를 했어요” 변미화의 목청이 갑자기 높아진다. “그런데....생...생리대를 안 줬어요!” 높아진 목소리가 비명으로 변한다. “생리대를 보급하라 훌라훌라! 생리대를 보급하라 훌라훌라!~” 객석에서 여기저기 훌라송을 따라 부른다. 아, 1980년 5월 전후, 광주에서, 목포에서, 아니 남도 전역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거리로 거리로 뛰쳐나와 부르던 노래 아닌가.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훌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훌라!~” 두 손을 불끈 쥐고 노래를 따라 하던 객석 여기저기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환청이 들리고 이미지들이 흔들린다. 온통 핏빛이다. 생리대 없이 분출한 피의 아우성들이 도청 광장을 메우고 이내 시신 가득한 상무관 바닥으로 번져나간다. 대단하다. 생리대 없이 쏟아낸 핏빛으로 상무관 바닥의 피를 닦던 이미지를 연출하다니. 총칼 든 남성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여성들을 전면에 끌어내다니. 핏빛으로 오버랩되는 장면들이 한 폭 두 폭 강렬한 그림이 되어 주마등을 이룬다. 보통의 에너지로는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이다. 웬만한 배짱으로는 다룰 수 없는 구성이다. 지정남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당골이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고 무대와 객석을 오가며 혹은 그 어떤 무엇과 또 다른 무엇을 오가는 능력의 교신자.



삼월이 사월이 오월이들, 바리데기가 씻김한 남도



지정남이 고만자로 변신하여 소환한 환생자가 변미화뿐만이 아니다. 극의 말미 관객의 도움을 받아 환생자들이 무대에 선다. 자신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떨리는 음성으로 때로는 비장한 목소리로 증언한다. “나는 오십팔 세 변미화요, 화장실에서 죽었소.” “나는 일신방직 다니던 열여덟 살 김소래요, 5월 21일날 주남마을에서 총 맞아 죽었어요.” “나는 열다섯 살 이덕자요, 5월 21일 동구청 앞에서 총 맞아 죽었어요.” “나는.....나는.....계엄군들이......계엄군들이... 농약 먹고 죽었소!”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이름도 말하지 못하고 말을 잇지 못하는 사정을. 잠시 머뭇거리다가 진술이 이어진다. “나는 취조에 감시에 우울증에...천천히 말라서 죽었소.” “나는 열아홉 살 손홍민, 5월 21일 친구 집 가는 길에 총 맞아 죽었어요.” 갑자기 어린아이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나는 5월 21일 우리 엄마 뱃속에서, 엄마가 총 맞아서 뱃속에서 죽었어요.” 아, 변미화를 필두로 화순 당골 고만자에 의해 환생한 이들은 사실 삼월이, 사월이들 아닌가. 생리대를 주지 않으니 피범벅이 되어 감옥에서 흐느끼던 오월이 유월이들 아닌가. 그래서일 것이다. 극 머리에 망자들을 소환하는 씻김굿 노래가 배치된 이유 말이다. “정월에 났다고 정월이, 이월에 났다고 이월이....시월에 났다고 시월이, 어찌 아니 좋을 소냐, 어기어차 환인이야~” 물론 여자들만 환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남자들은 별감으로 소환한다. “어기여차 별감이야, 일 잘하는 김 별감, 술 잘 먹는 구 별감, 인물 좋다 황 별감, 말 잘허네 이 별감, 쌈잘한다 박 별감~” 이들의 환생에는 우리나라 무조 신화의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 바리데기가 등장한다. 주지하듯이 바리데기는 일곱째딸로 태어나 부모에게 버림받는다. 하지만 왕이었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저승에 가서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불사약을 구해온다. 버려졌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 바리데기인데, 정작 왕을 살려낸 것이 버림받았던 딸이라니, 역(易)의 원리요 역설의 원리 아닌가. 이제 5.18민중항쟁 44주년을 맞이한다. 가신 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기억하고 되새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실천하는 일이지 않겠나. 그런 점에서 지정남의 환생굿은 5.18민중항쟁 44주년을 맞이하는 매우 뜻깊은 작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여성들을 소환하고 그들의 온전한 자리와 역할들을 상고하는 작업이다. 도청에서 상무관에서 광주의 모든 거리에서 주먹밥을 만들고 손을 흔들고 사람 살만한 세상을 위해 힘을 모았던 20세기 한국의 코뮌, 이를 소환해준 지정남이 동시대인이라는 점이 자랑스럽다. 그가 만들어낸 화순 당골 고만자와 그가 환생시킨 변미화, 아니 이름도 빛도 없이 남도의 핏빛을 흰 당목으로 씻어내셨던 어린 사월이 오월이들 그 진정한 바리데기들이 씻어낸 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조국 이 강산이다.



남도인문학팁

5.18민중항쟁 44주년, 상무관에서 열어야 할 두 개의 연행(演行)

2019년 12월 12일 나는 이 지면을 통해 ‘녹두서점의 오월’을 술회하였다. 정태춘의 노래 ‘잊지 않기 위하여’를 상고하였다. 김상윤 일가가 눈물로 기록한 책 ‘녹두서점의 오월’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돌이켜보니 세월은 무상한데 인걸은 간데없다. 44주년 올해 정도에는 상무관에서 적어도 두 개의 연행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하나가 지정남의 ‘환생굿’이요, 다른 하나는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윤상원가’다. 지정남은 이름도 빛도 없이 황토빛 남도땅에 스며든 어린 여인들을 변미화라는 캐릭터를 통해 소환하였다. 임진택은 불세출의 위인 윤상원을 창작판소리로 소환하였다. 생리대의 피는 죽음의 핏빛이면서 가임(可姙)과 포태(胞胎)의 핏빛이기도 하다. 이름 없던 남도의 오월이 유월이 바리데기들이 저승을 돌아 구해온 불사약이기도 하다. 생리대의 피로 상무관의 피를 씻김한 지정남이 돋보이는 이유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남았다.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포태하고 출산할 것인가? 환생굿을 보며 내내 심중에 스민 생각이다. 그때의 그들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을.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