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 |
배롱나무 사이로 본 장춘정. 색다른 사진 촬영지점으로 맞춤이다. |
장춘정 처마를 떠받치고 있는 활주. 활주와 처마 사이에 나무로 깎은 자라를 덧댔다. |
장춘정과 은행나무 고목. 수백 년 된 나무와 누정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
화동마을 전경.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본 풍경이다. |
매화, 산수유꽃 흐드러지면서 남도의 꽃봄이 무르익고 있다. 꽃바람은 강을 따라 북상한다. 영산강변에도 꽃바람이 넘실댄다. 강변 따라 도로가 개설된 뒤 강변도로를 타는 기회가 늘었다.
유연하게 구부러지는 강변도로를 타고 가다가 차를 멈췄다. 강변에서 봄기운 완연한 누정이 눈길을 끈다. 장춘정(藏春亭)이다. 봄을 감추고 있다니, 사철 겨울이란 말인가?
안내판을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선입견과 달리, 정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고봉 기대승의 〈장춘정기(藏春亭記)〉에 유래가 적혀 있단다.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숲과 사시장절 피는 꽃이 항상 봄을 간직한 곳’이라고.
그만큼 주변에 꽃과 나무가 많고, 종류도 다양했다는 얘기다. 붉은꽃 지면 흰꽃과 노란꽃 피고, 눈밭에서도 꽃을 피운 나무가 봄의 기운을 전했을 것이다. 강과 산, 나무를 보며 사철 생동하는 봄을 느꼈다는 얘기다. 자연에서 생활하고 생각하며 학문을 익힌 당시 명현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장춘정은 1561년(명종16) 고흥류씨 류충정(1509~1574)이 지었다. 류충정은 무과에 급제하고 부안과 강진현감, 김해·장흥·온성 부사 등을 지냈다. 부안현감 시절 서해로 들어오는 해적을 물리치고, 을묘왜변 땐 안위와 함께 칠산 앞바다에서 왜적의 전함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류충정과 나주의 인연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부친 류해가 다시에 살고 있던 이종인의 사위가 되면서다. 류충정의 외할아버지인 함풍이씨 이종인은 가까운 죽지마을 소요정(逍遙亭)의 주인이다.
장춘정은 벼슬살이를 끝낸 류충정이 세웠다. 누정에 다녀간 옛사람의 면면도 남다르다. 기대승 외에 송순, 임억령, 박순, 박광일, 임제, 임복 등이 쓴 제영시(題詠詩)가 걸려 있다. 당대 시가문학을 이끈 유생들이다. 누정 마루에 먹물 마를 날이 없었을 테다. 장춘정은 영산강변 대표 누정으로 통한다.
장춘정 뒤쪽에 매귤당(梅橘堂)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매귤당의 존재는 장춘정에 걸린 제영시를 통해 확인된다. 매귤당은 류충정의 둘째아들 류온이 지었다. 류온은 임진왜란 때 김천일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다.
장춘정은 여느 누정보다 튼실해 보인다. 대청마루는 물론 서까래, 산자에서 세련미도 묻어난다. 압권은 처마를 떠받치고 있는 활주다. 네 개의 활주와 처마 사이에 나무로 깎은 자라를 넣었다. 화재 예방과 장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누정 마당에선 수백 년 묵은 은행나무가 서 있다. 생기 머금은 나뭇가지가 봄을 느끼게 한다. 고목이 보듬은 풀꽃은 뱅싯이 웃음짓게 한다. 봄까치풀꽃, 광대나물꽃, 일엽초, 할미꽃을 품고 있다. 찔레나무도 가지 사이에 둥지를 틀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품어주는 우리의 어머니를 닮았다.
빨간 꽃을 피운 동백꽃도 반갑다. 땅에 떨어진 동백꽃이 봄햇살에 환하게 웃음 짓는다. 목련도 금방 꽃망울을 터뜨릴 기세다. 봄의 생기는 배롱나무에서도 묻어난다. 누정과 고목에 얽힌 많은 사연을 짐작게 하는 풍경이다.
“영산강에서 제일가는 누정이요. 역사·문화 가치도 높고. 강변도로가 뚫려서 죽산보, 석관정과 연계해서 드라이브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자전거 타기도 좋고.” 장춘정 앞에서 만난 고흥류씨 어르신의 말이다.
장춘정을 품은 마을이 화동(化洞)이다. 나주시 다시면 죽산리에 속한다. 죽산리는 죽지, 산두, 조등, 절구, 화동 등 5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큰 연못 안 작은 섬에 대나무가 있다고 죽지(竹池), 마을이 산머리에 있다고 산두(山頭), 그리고 지형이 새 등처럼 생겼다고 조등(鳥嶝), 절구통 같다고 절구로 이름 붙었다.
옛날엔 화동마을 앞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강변 포구 마을이라고 선두촌(船頭村)이었다. 죽산리 포구라고 죽포(竹浦)로도 불렸다. 마을 이름은 일제강점 때 바뀌었다. 자작일촌을 이룬 고흥류씨의 선산이 홍화동(弘化洞)에 있었다. 지명이 ‘화동’이 된 이유다. 마을엔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영산강변 제방을 막기 전, 화동마을엔 나주목의 전선창(戰船廠)이 있었다. 전선창엔 수군 병선 대여섯 척이 머물고, 무기창고가 있었다. 배를 만드는 선소(船所)도 있었다. 마을 안쪽까지 바닷물이 드나든 수군기지였다. 전략적 요충지였다.
가까운 나주 서창(西倉)에서 곡식을 실어 나르는 배도 드나들었다. 옛 강변 포구는 사람과 물자가 모이고, 해상교류가 활발한 무역항이었다.
강변 둑을 높이고, 강가에 무성한 물억새 탓에 옛 흔적을 찾긴 쉽지 않다. 수로의 형태와 배를 매는 데 쓰였다는 ‘배맨돌’로 짐작할 뿐이다. 배맨돌은 장춘정 앞에 있다. 배를 타고 장춘정을 오갔을 유생들도 그려본다.
화동마을은 영산강을 향하고 있다. 마을 앞은 논이다. 논은 죽산들로 이어진다. 죽산들은 4년 전 여름 쏟아진 물폭탄에 침수 피해를 본 곳이다. 빗물이 밀려들고 배수펌프장이 한계를 드러내며 빚은 일이었다. 긴급 대피한 주민들은 ‘물난리’로 기억하고 있다.
마을 뒤쪽은 ‘돌캐산’으로 불리는 바위산이 둘러싸고 있다. 한적한 농촌 풍경 그대로다. 영산강엔 죽산보(竹山洑)가 들어서 있다. 죽산보에는 배가 지날 수 있는 통선문이 설치됐다. 강변에 줄지어 선 미루나무도 멋스럽다.
강 건너편엔 나주영상테마파크가 자리하고 있다. 드라마 ‘주몽’의 촬영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영상테마파크는 남도의병역사박물관 건립과 맞물려 일부 철거됐다. 전남도와 나주시는 세트장을 마저 철거할 예정인데, 시민단체의 반대에 맞닥뜨려 있다.
강둑에서 화동마을을 바라본다. 오랜 역사 지닌 장춘정, 옛 영산강 포구의 흔적, 소소하면서도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자긍심 높은 마을사람들…. 봄날 한낮의 햇살이 보드랍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