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위로 총탄이…” 43년만에 찾은 ‘오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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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로 총탄이…” 43년만에 찾은 ‘오월’ 일기
●나주출신 이윤희 미주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 본보 제보
80년 5월21일 상황 생생히 담아
“도청 안 공수부대 상황” 등 기록
계엄군 발포 등 처참한 장면 눈길
“민주화운동 8차 보상자 신청예정
역사자료 5·18기록관 기증할 것”
  • 입력 : 2023. 12.07(목) 18:03
  • 강주비·나주=박송엽 기자
7일 나주 한 카페서 이윤희 미주지역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이 5·18민주화운동 당시 작성했던 일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송엽 기자
#나는 곧바로 시위차 대열 속에 끼어 군용차에 뛰어올랐다. 이때야말로 진정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었다… (중략) 광주시로 진입하여 온 시가지를 누비며 ‘계엄해제! 전두환 물러나라! 김대중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두루 돌아다녔다. 그러나 21일 오후 5시 현재, 도청 안에서는 군인들이 있다. 물론 공수부대들… 밖이 조금 캄캄해질 때 소방서로 순찰을 나갔는데 머리 위에서 총알이 날아들어 얼른 외곽지역으로 빠졌다. 이제 완전히 암흑의 시대로 들어갔다.

노랗게 빛바랜 종이에 꾹꾹 힘주어 눌러쓴 글씨에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묻어났다. 첫머리엔 ‘1980년 5월21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계엄군이 도청에서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했던 그날, 스무 살 청년이 건물 옥상에 올라 숨죽여 작성한 일기다.

일기의 주인공은 이윤희 미주지역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 그는 당시 전남대학교 농과대학에 입학 후 다시 대입을 위해 고향인 나주서 공부를 하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광주서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자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대학교를 다니던 친형을 데려오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청년시위대가 몰던 버스에 오른 이 회장은 시민군의 일원이 됐다.

일기는 이 회장이 항쟁에 나선 첫날 작성한 것이다. 이 회장은 21일부터 26일까지 차를 운전해 물자를 나르거나 염을 하는 등 항쟁에 참여했다. 27일 계엄군이 진입하기 직전 도청을 빠져나가 목숨을 건졌다. 이 회장은 이 기간 매일 일기를 작성했으나, 현재 남은 것은 ‘21일’ 단 하루치뿐이다.

이마저도 수십 년간 행방을 찾지 못하다가 최근 집에 있던 고서를 정리하던 중 우연히 발견했다.

이 회장은 “당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일기를 작성했다. 이후 일기를 찾으려 했으나 어머니가 모두 버렸다고 해 포기했었다”며 “3주 전 집 정리를 하다 우연히 아버지가 남긴 오래 된 ‘논어’ 책을 발견해 펼쳐봤는데, 이 일기가 책장 사이에 끼어있었다. 기쁘기도 했지만, 그날의 생각이 나 슬픈 감정이 몰려왔다”고 말했다.

이윤희 미주지역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이 5·18민주화운동 당시 작성했던 일기. 박송엽 기자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영상에 이윤희(노란 원) 미주지역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의 모습이 찍혀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이윤희 미주지역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이 간직하고 있던 과거 한 신문에 실린 5·18 당시 사진. 나주= 박송엽 기자
이 회장은 22일 새벽 계엄군을 피해 친구 지인의 집인 2층 주택 옥상에 올라가 이 일기를 썼다. 3페이지 분량의 일기에는 ‘5·18’이 생생하게 적혀있었다.

‘전남대학 정문 앞에 도착, 군인들과 투석이 벌어졌다’, ‘21일 오후 5시 현재 도청 안에서는 군인들이 있다’,‘공원 광장에서 모여 함평으로 무기고 탈환을 목적으로 밤 1시에 출발했다’, ‘월산동 성심병원에 도착했다. 환자들을 치료하고 병원에 도착하니 22일 새벽 1시20분’ 등이 시간 순서대로 나열돼 있었다.

계엄군의 발포 상황과 다친 시민들의 모습도 묘사돼 있었다. ‘버스 속에서 사람 살려라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부상자를 나의 군용차에 싣고 막 출발하려고 하니 또다시 무차별 사격. 나의 옆에는 머리에 총알이 박힌 분’ 등 처참한 장면을 설명하는 문장들이 이어졌다.

이 회장은 “차가 움직이기만 하면 (계엄군이) 아스팔트 바닥에 위협사격을 가했다. 차량 라이트도 깨지고 앞을 분간할 수 없어 달빛을 이용해 운전했다”고 회고했다.

이 회장은 항쟁이 끝난 후 군에 입대했다. 이후 나주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다 트라우마와 부채감 등을 이기지 못하고 2006년 캐나다 이민을 택했다. 지난 2019년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를 결성해 해외와 국내를 오가며 5·18을 알리는 일에 힘쓰고 있다.

지난 2018년에는 직접 수집한 400여페이지의 ‘5·18관련 나주지역 공문서’를, 지난 4월에는 미국에서 지지 시위를 하던 유학생들이 입은 ‘광주 티셔츠’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일기 역시 기증할 생각이다. 더불어 증거 불충분 등의 사유로 과거 한 차례 실패했던 5·18민주화운동 8차 보상자도 신청할 계획이다.

이 회장은 “다음 주 기록관을 찾아 일기를 기증할 것이다. 일기가 역사적 사료로써 후손들에게 널리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7일 나주 한 카페서 이윤희 미주지역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이 5·18민주화운동 당시 작성했던 일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송엽 기자
강주비·나주=박송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