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림의 퍼포먼스 ‘도(道, Zen)’. 1970년 제10회 한국미술협회전 |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세대 행위예술가이자 전위예술가. 작가 김구림은 1936년 경북 상주 출신으로 대구의 한의사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귀하게 자라 지방 미대에 진학했지만 바로 자퇴한다. 대신 미군 부대를 돌며 얻은 라이프지, 타임지 같은 외국 현대 잡지를 통해 현대미술을 배웠다. “당시 저의 눈에 비친 미술은 빗자루로 쓸고, 바닥에 물감 줄줄 흘리고, 수백 장씩 찍어내는 게 현대 미술이었어요. 잭슨 폴록, 앤디 워홀이었던 거라.” 상아탑에선 가르치지 않던 현대미술을 실시간으로 독학했다. 이후 뉴욕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회화와 판화, 일본에서 판화를 수학하였다. 1969년 미술·문학·무용 예술계 인사들을 아울러 ‘제 4집단’ 아방가르드 예술 단체를 조직했고, 한국 최초의 대지(大地) 예술작품 ‘현상에서 흔적으로’를 선보였다. 당시 ‘미술계에 이상한 놈이 나타났다’ 소리 듣게 했던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시 재현되어 이슈가 되기도 했다.
“김구림의 경력과 한국 아방가르드 운동의 역사를 기록한 작가와 큐레이터들에게 놀라운 일이 아니며, 시작부터 회화와 조각이라는 전통 매체를 뛰어넘었다. 연극, 음악, 문학 분야의 젊은 예술가들을 모아 나라의 스테어터스 쿠오(status quo: 라틴어문구-현 상태, 現 狀態)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고 미술전문가들은 전한다.
1964년 ‘음과 양 20-S 34’, ‘태양의 죽음 1’(영국테이트모던뮤지엄 소장)과 ‘음양 연작’은 재료와 기법 측면에서 볼 때 캔버스 대신 나무 패널을 사용했다. 비닐 같은 오브제를 패널에 태워 붙인 파격을 선보여 ‘캔버스 위에 유채’라는 당시의 형식을 파괴했다. ‘형식의 파괴’로 김구림 특유 ‘파괴의 형식’을 만들어 냈다. 그가 평면 회화의 고정된 틀을 벗어난 ‘새로운 시도와 변화’, ‘파격’의 방법론이며 2014년 구제역 파동 시기에 그는 살처분된 돼지와 흙을 직접 구해 오브제 작품을 만들려고 했었다. 시기적으로 역병, 생명, 도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싶어 했으나, 시대적으로 국가 구제역 방역지침 때문에 실현되지못했다.
김구림 작 음양 5-S 92, 캔버스에 디지털프린트, 아크릴, 116.8×91cm, 2005년. |
김구림 작 24분 1초의 의미, 단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10분, 1969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1/24초의 의미>는 10분이 채 안 되는 무성 영화이다. 이미지의 연쇄는 꽤나 강렬한 시각적 경험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은 급격한 도시개발과 산업화가 이루어지던 1960년대 후반의 서울에서 관찰할 수 있는 일상의 풍경이다. 벽돌이나 파이프, 건축 자재, 더미로 쌓여 있는 공산품과 거리를 바삐 오가는 군상, 자동차들, 한창 지어지고 있거나 이미 완공된 고층 건물 등은 1960년대 서울 산업도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줌과 동시에 실제 세계에 대한 기록으로서 시각적 정보를 제공한다. 작가, 관찰자 시선에서 수집 된 파편적인 불명의 이미지들은 또 하나의 개체의 서사를 이루게 되고 그것은 다시 실제와 허구에 대한 영화적 장치의 예술적 질문들을 생산한다.
최근 작가의 인터뷰 기사에서 노년에 이르러 예술 인생에 가속도가 붙은 이유를 묻자 “내가 계속 작품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갈수록 어지러운 세상이 이 노인을 작품하게 만든다.”고 전하며 예술가가 시대를 살아가며 작업과 상호소통하는 방식에 대한 의미를 전해주었다.
김구림 작 전자예술 A, 181.6×181.6×17cm, 패널에 플라스틱, 전구, 1969년. 작가 소장 |
김구림 작 삽(Shovel), 설치, 89.0×26.0cm, 1973년. |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김구림> 전시는 1950년부터 현재까지 한국 실험미술의 전방위적 활동과 거침없는 그의 도전을 미술사적 성과로 재확인하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김구림-한국 전위예술의 선구자, 비디오아트 개척자, 한국 최초의 대지미술·실험영화·메일아트 등 다채로운 예술 수행자의 면모를 보여주기엔 지금의 수식어가 너무도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