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홍범도 장군과 자유시 참변>한인 파르티잔 부대, 일제의 간도 대학살로 러시아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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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
[전남일보]홍범도 장군과 자유시 참변>한인 파르티잔 부대, 일제의 간도 대학살로 러시아로 이동
<상>자유시 참변의 발단
실제로는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던 중국 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
5,000명이 넘는 한국 군부대와 극동 파르티잔 부대가 자유시와 그 주변 집중
  • 입력 : 2023. 09.14(목) 12:45
2017년 6월 한인 무장독립군이 사망한 러시아 자유시 근처 소베츠키 마을에서 한인 파르티잔 추모비 건립식 모습. 사진 출처=안나 카자코바 제공
<특집 홍범도 장군과 자유시 참변>: 자유시 참변의 발단 (상)



대한민국 윤석열 정부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인 자유시 참변을 두고 역사적 이념논쟁을 시작했다. 그 핵심에는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과의 연관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인데, 결론적으로 그에 대한 러시아 기록은 없다. 또한 소련이라는 국가 체제가 구성되어 거기에 생존하고 사망한 영웅이고, 남북한이 성립하기도 전에 살았던 사람을 윤석열 정부가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가입을 언급하면서 문제 삼고 있는데, 그것도 연구자가 보면 정말 황당하고 천박하며 무지해 보인다.

러시아에서는 자유시 참변을 아무르 사건(Амурский инцидент) 또는 아무르 학살(Амурской бойни)이라고 부르고 있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스보보드니(자유시)에서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이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사할린 의용대)의 한인 무장 독립군들을 포위 및 학살한 사건이다.

이는 한인 파르티잔 부대의 내부 주도권 투쟁보다는 코민테른 비서국 고려혁명군사협의회 및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과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와의 무력 충돌 사건으로 철저하게 소련공산당에 이용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오히려 볼셰비키의 강압적인 무장해제 요구에 비극을 피하기 위해 적군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거나 또는 이에 저항하여 완강한 투쟁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인 파르티잔 부대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공동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전혀 거부하지 않았던 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을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된다.



1. 한인 파르티잔 부대들의 러시아 자유시 이동

1920년 가을 만주 동북부 훈춘에서 한인들이 일제 압제자들과 싸우기 위해 봉기했다. 훈춘 사건 이후 반일폭동의 물결이 만주의 여러 지역을 휩쓸었다. 이에 일본 당국은 중국 측에 저항적인 한인들에 대해 가장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간도 지방 전역에 토벌 원정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일본군은 그곳으로 군대 2개 사단을 파견하였다. 한인 파르티잔 부대는 전투 끝에 어쩔 수 없이 러시아 영토로 후퇴했다. 일본 점령군의 분노는 간도의 모든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다. 1920년 10월부터 1921년 2월까지 한국 디아스포라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인 ‘훈춘 학살’(경신참변)로 알려진 대학살이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간도의 한인들은 유례없는 탄압과 잔인함을 겪었다.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한인은 3,469명이었다. 농민이 총살당했고 불태워졌고 마을은 파괴되었다.



2. 러시아로 간 한인 파르티잔 부대들

1920년 가을부터 실제로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던 중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한인 파르티잔 부대는 아무르 지역으로 대규모 이동을 시작했다. 한인 파르티잔 부대 일부인 약 2천 명이 북만주에서 아무르지방으로 넘어갔다. 아무르 지역으로의 파르티잔 부대 이동과 관련하여 부대의 미래, 지휘관 및 군대 구성 등의 문제들이 대두되었다. 이는 한인 파르티잔의 배치에 대한 것으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고려지부는 한인 파르티잔과 극동 정부 사이의 연결고리로서 이 모든 문제를 직접 다루기 시작했다. 고려지부가 스보보드니 시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들어오는 파르티잔 부대를 집중시키는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 또한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 파르티잔의 숙영지 배치는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비밀리에 수행되었다. 한인 파르티잔은 자유시 근처의 크라스노야로보와 마자노보라는 두 개의 큰 마을에 모였다. 도착한 부대를 통합하고 개선하기 위해 김명송이 임시 부대 사령관으로 박일리야가 군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들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의 총사령관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극동으로 모든 한인 파르티잔 부대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의 일부였던 군대들이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만 군대, 다반 군대, 독립단 군대, 이항 군대, 자유대대, 기타 한인 파르티잔 부대들이 스보보드니 지역에 도착했다. 스보보드니 시 근처에는 훈춘학살 이후 한국과 북만주에서 아무르 지역으로 이동한 한인 파르티잔 부대인 홍범도 ‘의병’(독립군) 부대, 총군부, 군정서 군대, 국민회 군대, 의군부 군대 등도 위치해 있었다.

홍범도 부대는 1920년 12월 말 밀산에 도착했다. 그는 밀산에서 북로군정서군을 만나 ‘통의부’ 또는 ‘대한독립군’으로 불리는 통합부대를 조직했다. 이 부대는 1921년 1월 초 연해주 이만으로 넘어갔다.

전체적으로 5,000명이 넘는 한국 군부대와 파르티잔 부대가 극동공화국 정부의 제안에 따라 스보보드니 시와 그 주변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전한인파르티잔대회가 1921년 3월 중순 크라스노야로보 마을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극동공화국 참모부와 러시아공산당 극동뷰로의 승인 아래 열렸다. 여기에는 각 한인군대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대회는 3일간 계속되었다. 이 대회에서 정식으로 한인통합군대의 최고지휘부가 선출되었다. 전한군사협의회와 대한의용군 총사령부가 조직된 것이다. 군사위원으로는 이용·채영·한운룡·장기영·박일리야 등 5명이 선임되었다. 대한의용군 사령부 간부로는 홍범도·안무·서일·조욱·이청천·이용·채영·최진동·오하묵 등 15명이 선출되었다. 군사위원에는 한인사회당계열의 군사간부들이 포진했고, 사령부 간부로는 각 단위부대 지휘관들이 배치되었다.

모든 군부대와 부대는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사할린 의용대 또는 대한의용군)라는 하나의 공통 명칭으로 통합되었다. 일본인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 ‘한인’(카레스키)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는 1,200명의 전투 군인으로 구성된 스보보드니 별도 소총 대대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는 극동공화국 제2군의 지휘 하에 있었지만, 이는 일본군 사령부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수행된 것에 불과했다.

사실 이러한 통합에 대해 조선혁명대중은 전투 역량을 하나의 중심으로 뭉치게 되어 매우 기뻐하였다. 또한 그들은 한인 파르티잔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 러시아 공산주의 동지들과 조선혁명가들의 협력을 환영했었다. 이처럼 이들 대다수 한인은 민족주의자였으며 소련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족해방운동을 조직하기를 희망했었던 자들이었다.

아무르 지역에서는 만주 영토의 러시아 국경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나머지 부대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건물을 찾고 필요한 식량과 탄약을 생산했다. 파르티잔이 전쟁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한 집중적인 작업도 진행 중이었다. 모두가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르 학살이 터지게 된다.



3. 자유시 참변 발단의 시작

문제의 발단은 코민테른 극동비서국 책임자인 슈마츠키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한인 파르티잔 부대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코민테른 극동비서국을 이전할 것을 요구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뷰로 고려지부는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가 총사령부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원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 후 슈마츠키는 극동 공화국 정부에 비슷한 요구를 했다. 오랜 논의 끝에 결국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뷰로와 극동 공화국 정부는 슈마츠키가 코민테른을 대표하여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 공산주의자 최고려, 김철훈, 이손, 남만춘의 참여로 슈마츠키는 이르쿠츠크에서 카란다리쉬빌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고려혁명군사협의회 이름으로 조선혁명운동의 중심을 새로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최고려와 김하석이 협의회 위원이 되었다. 카란다리쉬빌리를 제외한 그들 모두는 1921년 5월초 한인 파르티잔 부대가 위치해 있는 아무르 지역으로 보내졌다.

1921년 5월 말에 고려군혁명협의회는 새로운 인물로 구성되었다. 카란다리쉬빌리는 협의회 의장 겸 총사령관, 오하묵은 부총사령관, 유수연 임시참모부장, 최고려·채성룡·김하석은 위원이었다. 이 구성원들도 아무르 지역으로 출발했다. 그리하여 통합하고자 하는 한인 파르티잔 부대에는 크라스노야로보에서 열린 전한인파르티잔대회에서 선출된 전한군사협의회와 코민테른 극동비서국이 임명한 고려혁명군사협의회라는 두 개의 지도부가 생겨났다.

러시아 극동 전체와 해외의 전체 사업 과정을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뷰로와 코민테른 극동비서국이 고려혁명군사협의회를 감독했다. 하지만 코민테른 극동비서국은 조선혁명운동 전체의 지도 세력이자 조직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1921년 5월 26일 카란다리쉬빌리가 이끄는 고려혁명군사협의회 회원들은 코민테른 극동비서국의 위임을 받아 이르쿠츠크를 떠나 치타에 잠시 들른 후 6월 6일 스보보드니에 도착했다. 카란다리쉬빌리는 가장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카란다리쉬빌리는 실제로 한인 부대의 사령관이었다. 카란다리쉬빌리는 일반 지침에 따라 운영 업무를 수행하도록 위임받았으며, 이것은 지침의 한도 내에서 독립적인 활동의 권리가 부여된 것이었다. 카란다리쉬빌리의 극동 활동은 당시 극동의 모든 군사 활동을 담당했던 극동 지도부의 날카로운 부정적인 반응을 받았다. 1921년 6월 3일 카란다리쉬빌리는 사할린 파르티잔 부대를 고려혁명군사협의회에 종속시키려는 슈마츠키의 모험적인 계획(이르쿠츠크에서 조선혁명군을 준비시켜 시베리아에서 만주를 거쳐 한국에 이르기까지의 승리전 조직)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이에 극동공화국 장관 협의회 의장 크라스노셰코프는 외무 인민위원회 치체린에게 전보를 보내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나는 슈마츠키의 한국과의 사업, 이를 수반하는 사업에 대해 단호히 항의한다. 특히 한국 출정의 카드는 일본의 최대 도발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더불어 선동적인 말들이 많이 주장되었다. 첫째, 4,000명의 한인이 블라고베셴스크 근처 일본인 눈앞에 집중되어 있으며, 폭동을 저지르고, 약탈하고, 강간하고, 그들은 선출된 명령에만 복종한다. 둘째, 이르쿠츠크의 한인 연대가 블라고베셴스크로 이동하여 일본이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셋째, 한국 진출을 위해 한인과 함께 중국 영토로의 카란다리쉬빌리의 이동은 일본의 공세를 유발할 수 있다. 이는 삼국협상국의 눈에는 완전히 정당화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외무 인민위원회는 이런 슈마츠키의 모험은 가능한 한 빨리 제거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모든 경고와 제안은 효과가 없었다. 카란다리쉬빌리의 항해는 계속되었다. 결국 한인 파르티잔 부대의 통합은 슈마츠키가 코민테른의 권위를 빌려 한국 진출(한국으로 혁명 수출)이라는 무모한 모험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아무르 학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극동뷰로도 극동공화국 사령부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코민테른 극동비서국 슈마츠키 동지가 주도하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한국에 대한 모든 외국 작업은 이미 극동 코민테른으로 이전되었다.

김영술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