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타적유전자·박재항> 새만금의 추억과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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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이타적유전자·박재항> 새만금의 추억과 ‘그들’
박재항 이화여대 겸임교수
  • 입력 : 2023. 08.23(수) 14:14
박재항 겸임교수
국내 최대규모 간척사업지인 전북 새만금 간척지. 한국농어촌공사 제공
“가만 놔두면 사시사철 먹을 것이 나오는데, 왜 그걸 없애버린다요?”

해외 주재원으로 10년 넘게 근무하다가 2000년대 후반에 귀임했던 선배의 고향은 전라북도 부안이었다. 고등학교를 전북에서는 최고 대처인 전주로 진학하며 외지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에 고향에 들른다고 해도 명절 때나 겨우 들렀고, 동네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서울로 올라가기 바빴다. 본사로 돌아와 딱히 보직을 맡지 않았던 선배는, 처음으로 맘 편히 며칠을 고향에 있는 친구들과도 어울리며 옛 자취를 찾아 돌아다녔다.

더 이상 자기 어릴 때처럼 갯벌에서 노는 아이들을 볼 수 없었다. 바지락이나 낙지 등을 채취하는 어른들도 자취를 감췄다. 뻘배들이 고철 덩어리로 펄에 처박혀 있었다. 왜 그렇게 되었냐고 자신을 태우고 가는 택시 기사에게 물었더니, 새만금 사업을 한다고 그런다며, 기사가 맨 위에 쓴 메아리 없는 질문인지 푸념인지 하소연을 했다. 그 선배가 친구들을 만나서 새만금을 하는 이유를 물었으나, 딱 부러진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 선배가 고향 여행에서 돌아와 내게 새만금에 대해 물었는데, 인터넷에서 찾은 기본 정보 외에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선배의 질문을 받은 3년 후에 그 새만금을 일로써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국의 세계 1위’ 리스트가 인터넷에서 눈에 띄게 유통되기 시작한 게 2000년대 초였다. 거침없이 경제성장만을 부르짖으며 달려오다가 IMF 경제위기로 크게 덜컹하고, 그나마 좀 빨리 추스르며, 국가적 자존심 같은 것을 세우기 시작한 일환이었다. 그 명단에 또 하나 등극시킬 게 나왔다고 전라북도 도청에서 홍보 담당하는 분이 찾아와서 말했다. 총 길이 33.9킬로미터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가 새만금에 완성되었고, 2010년에 성대한 준공 기념 축제를 열 계획이라고 했다. 전라북도 브랜드를 알리기 위한 최고의 소재이자 기회로 생각하고 있어, 도지사부터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고 있으니, 함께 일해보자고 했다.

마침 회사에서는 지자체와 같은 공공사업 쪽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유망한 신규 사업 분야로 추진하고 있었다. 2002년에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라는 졸저를 냈는데, 그 ‘모든 것’에 국가나 도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지역 브랜드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관심을 실제 프로젝트로 만들어 실행할 기회를 갖지 못하던 차에 새만금을 활용해 전라북도 브랜드를 세우고, 알리는 작업이라니 구미가 당겼다.

바로 광고, 홍보, 행사를 담당하는 부서와 협력하여 2010년에 방조제 준공을 기념하고 만방에 알리는 축제를 중심으로 하여, 사전 홍보 계획과 그 후에 전라북도 전체의 위상을 높여주도록 이끄는 장기 브랜드전략까지 세우겠다는 제안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실무자와의 준비 회의를 위해 전북도청에 갔을 때, 고(故)노무현 대통령의 빈소가 도청에 차려져 있었다 직원 안내로 조문을 해서 더욱 기억에 남았다. 이후 제안서를 도지사에게 발표하는 자리에는 당시 회사의 대표이사까지 동행하여 전사적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 덕분인지 제안한 내용에 도지사가 전폭 수용하고 지원한다며 호응해줬고, 그날 저녁에 도청 실무자들과 함께 삼천동 막걸리골목으로 가서 자축의 자리를 가졌다.

실행 전략과 세부 계획을 수립하는 단계로 들어가며 외부 업체까지 포함된 대규모 팀을 꾸렸다. 관련된 인사들 모두가 새만금 현장 답사를 하자는 소리가 나오며, 그때서야 새삼 새만금을 가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었다. 전북도청을 몇 차례 방문하여 회의를 하고, 새만금을 포함하여 전북 지역에 대한 자료는 최대한 본다고 노력하였으나, 정작 현장을 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30명 정도의 인원이 빌린 버스를 타고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전북도청에 들러 간단한 회의를 한 후에 안내를 맡은 도청 직원들을 태우고 새만금 방조제 도로에 들어서기 전에 이른 점심을 그 지역에서 바지락국수와 백합죽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하기로 했다.

식당 근처로 가면서 말라버린 호수처럼 변한 갯벌들이 나타났다. 식당 바로 앞에서 바지락을 채취하여 국수를 끓여내던 시절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100퍼센트 식당 앞에서 캐낸 바지락을 쓰지 않았다고 해도, 갯벌 내음 담은 이야기 거리가 된다. 고향에 온 선배를 태운 택시 기사가 했다는 ‘사시사철 먹을 것이 나오는’ 갯벌은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어디서 바지락과 백합을 조달하는지 식당 주인이나 안내한 도청 직원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마당에 딴지를 거는 것 같아서 참았다. 바지락국수는 맛있었으나, 찜찜하게 켕기는 구석이 있었다. 그 찜찜함은 직선으로 곧게 뻗어 지루한 느낌까지 주는 방조제 도로를 달리다가 만난, 매립지의 물을 바다로 빼는 배수갑문에서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안내 직원이 한국인지 세계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최대 규모’라는 말을 몇 차례 했다. 인간 역사(役事)의 위대함으로 제안서에 포장했지만, 거대한 갑문 앞에서는 자연에의 ‘반역(叛逆)’이란 낱말만 어른거렸다. 해서는 안 되는 프로젝트란 생각이 들었다. 새만금 간척사업도 그렇고, 그 사업을 좋게 알리고, 전북까지도 그를 통해 홍보한다는 게 일종의 부역 행위처럼 느껴졌다. 그런 어지러운 심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전북의 관련 연구 기관의 인사를 만났다. ‘실제 현장을 먼저 봤다면 절대 프로젝트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솔직하게 소회를 밝히자, 그가 억울하면서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도 그거 계속 만들라고 안 했어요. 그들이 했지.”

‘그들’이 누구일까? 1970년대에 식량증산을 위한 간척지 조성으로 처음 발의되었으나,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필요성에 회의적인 시각이 크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1987년 대선에서 전북 지역을 겨냥한 공약으로 새만금 사업이 튀어나오고, 당선 이후 1991년에 기공식이 열렸다. 이후 새만금은 선거를 위한 공약을 젖줄로, 관성처럼 공사가 진행되어 2010년 준공까지 달렸다. 그리고 뚜렷한 용도 청사진도 세워지지 않고, 불쑥 새로운 계획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2023년 8월의 잼버리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아직까지 새만금을 주무르고 있는 듯하다. 또 다른 새만금을 찾고, 만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