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현 동주 |
이 글 중에는 흉중성죽(胸中成竹)이라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나온다. ‘대나무 그림을 그리기 전에 반드시 마음속에 대나무의 전체적인 형상이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후대에 중요한 예술창작의 이론이 됐다. 소동파는 ‘대나무를 그릴 때는 반드시 먼저 마음속에 대나무를 완성하고 나서 붓을 들고 자세히 바라보아야 그리고자 하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때에 급히 서둘러서 붓을 휘둘러 곧바로 그려내어 보인 것을 따라 잡아야 한다. 마치 토끼기 나옴에 송골매가 쏜살같이 내려와 채가듯 해야 할 것이니 조금이라도 늦추면 토끼는 이미 달아나 버릴 것이다. 문여가가 내게 이러한 것을 가르쳐 주었으나 나는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알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그러한 줄을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안과 밖이 한결같지 않아 마음과 손이 서로 응하지 않아서이니 배우지 않음의 잘못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보이는 것이 있어도 그것을 잡기를 익숙하지 않는 자는, 평소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일에 임하여서는 홀연히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이것이 어찌 대나무 그리는 것에서만 그러하겠는가?’.
다산 정약용이 백운동 원림의 대나무 숲을 ‘운당원’이라 명칭 했는데 바로 소동파의 운당 곡에서 연원된 것임을 처음 안 것도 기쁜 일 이었지만 그림을 감상하고 쓴 소동파의 문장에서 더 깊은 감동을 느꼈다. 요즘 심취해서 읽고 있는 당송팔대가들의 글 중에 나오는 ‘함영저화’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영저화(含英咀華)란 ‘꽃을 머금고 씹다’라는 뜻으로 문장의 묘미를 잘 음미해서 마음속에 깊이 새기는 것을 말한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 -학문이 나아갈 길에 대한 해명- 에 나오는 글이다.
질서가 잡힌 전체적인 구상도 없고, 마음속에 있으나 실행하지 않거나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의미를 머금고 씹어 새기지 못한 일들은 개인이든 나라든 숱하게 일어난다. 이른바 순살 아파트나 오송 지하차도 침수사고, 둔갑을 거듭한 잼버리, 미래가 짧다는 노인 폄하 등은 흉중성죽이나 함영저하가 없는 것에서 잉태되고 출산된 것이다. 이런 일들로 올해 여름은 유난히 힘들다. 징그럽게 비가 오더니 징그러운 폭염이 계속된다. 하지만 정말로 징그러운 것은 ‘사람’들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최근 고향 해남에 귀촌해서 살고 있는 황지우 시인이 관여하고 있는 땅끝 인문학 강좌에 유홍준 선생이 와서 두 분을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두 분으로 말하자면 명성과 지위와 세력이 세상을 움직일 만한 분들이다. 집마다 그분들의 책이 있어 유행되고 팬덤이 있으니, 흉중성죽을 이룬 선생(先生)들로 사람들이 목탁으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데 강좌가 열리던 날 많은 사람들이 선생들의 말에 귀를 쫑긋했다. 사람과 사람, 과거와 미래, 지방과 도시의 벽을 허물어 문을 만들고 길을 놔주는 일이니 지방을 살리는 훌륭한 사업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동파나 한유 같은 문장가들의 고전(古典)이나 황지우나 유홍준 같은 선생(先生)들은 사람들의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고 흉중성죽을 틔워준다. 현재에 매몰되어 방향을 잃어버리거나 결말을 짓지 못할 때, 긴 호흡으로 미래의 큰 그림을 그려주기도 한다.
벼루와 붓과 먹은/ 뜻을 같이하는 기물들이다./나아가는 곳이 서로 비슷하고/쓰이는 바와 사랑받고 대우받는 것도 유사하나/다만, 오래살고 일찍 죽는 것이 서로 비슷하지 않으니,/붓의 생명은 날로 계산하고/먹의 수명은 달로 계산하고/벼루의 수명은 세대로 헤아린다./어찌 그리 하는가?/ 그 몸체는 붓은 뾰쪽하고/먹은 그 다음이요/벼루는 둔하다./어찌하여 둔한 것은 명이 길고, 예리한 것은 요절하는가?/ 그 쓰임은/붓이 가장 많이 움직이고/먹이 그 다음이요.벼루는 움직이지 않는다./어찌하여 고요한 것은 명이 길고, 움직이는 것은 짧은가?/ 나는 여기서 양생의 법을 알았으니 둔한 것으로 몸체를 삼고/고요한 것으로 쓰임을 삼는 것이다./
천 년 전 중국 당경(唐庚)이 지어 벼루에 새긴 글, 가장고연명 (家藏古硯銘)이다. 자신의 먹물로 타인에게 붓질을 해대는 사람들은 옳고 그른 것을 따져보지도 않고 이익과 명령에 따라 대오를 갖추고 행렬을 지어 뛰어다니느라 분주하다. 생각은 얕은 접시 물 같고 행동은 불나방처럼 즉흥적이다. 지나간 일을 따지는 것은 누구나 잘하지만 다가올 일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여 실패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소동파, 당경의 글과 황지우선생과 나눈 말을 함영저화 하다 보니 그 까닭을 알 것 같다. 쓸데없는 붓질로 스스로 닳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도 경계(警戒)하고 또 경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