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 ‘고서 포도’ 산지… 드넓은 농지에 평온한 장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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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 ‘고서 포도’ 산지… 드넓은 농지에 평온한 장수 마을
●담양 성산마을
증암천·망강정·500년 노거수
삼국시대 이전 월전고분 볼거리
전두환 마을 방문 기념 표지석
5·18회원들, 곡괭이로 두동강
밟고가게 망월묘역 입구 묻어
  • 입력 : 2023. 06.08(목) 15:44
80년대 ‘지방청와대’로 쓰인 옛 전남도지사 공관. 지금은 광주시립 하정웅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성산마을 옆으로 흐르는 증암천 풍경. 무등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사철 흐른다.
증암천변에 자리하고 있는 망강정과 노거수. 성산마을 주민들의 무더위 쉼터로 쓰이고 있다.
기억(記憶)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사람도, 풍경도, 건물도 매한가지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기억을 한다. 똑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남는 이미지는 서로 다르다. 그 위에다 다른 생각을 입히고 각색도 한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지극히 정상이다.

뜻깊은 일을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 표지석도 세운다. 기록관 같은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정치적인 의도를 담은 표지석이나 건축물은 부침을 겪기 일쑤다. 한때 ‘특수’를 누리다가, 손가락질을 받는다. 어느 순간 사라지기도 한다.

담양 성산마을을 생각한다. 40여 년 전, 1982년 3월 10일의 일이다.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이 광주에 있던 전남도청을 방문했다. 연두 순시를 마치고 느지막이 광주를 떴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집권한 그였기에, 광주에서 하룻밤 묵는 것이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곧장 서울로 간 줄 알았는데, 전두환은 그렇지 않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광주 인근에서 하룻밤 묵고 갔다. 전두환이 신세를 지고 간 곳이 담양 성산마을이다. 얼마 뒤, 성산마을 입구에 표지석이 세워졌다. 표지석에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마을-고서면 성산마을’이라고 새겼다. 마을주민들이 세운 것이었다.

표지석이 본 시민들은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누군가는 표지석을 돌멩이로 찍어댔다. 돌멩이에 찍힌 흔적이 헤아릴 수 없었다. 돌멩이의 끝은 ‘전두환’이란 이름 석 자에 집중됐다. 전두환이 성산마을에서 하룻밤 자고 갔다는 얘기도 빠르게 퍼졌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전두환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를 향한 지역주민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분노를 견디지 못한 표지석이 깨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전두환’의 ‘전’자는 완전히 깨져버렸다. 한 청년이 깊은 밤에 큰 망치로 내리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을에서 다시 표지석을 만들어 세웠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바뀌었다. 광주학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비석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마을주민 누군가가 표지석을 떼어내 숨겼다.

숨겨진 표지석도 곡괭이의 날을 피하지 못했다. 5·18 관련자들로 이뤄진 광주전남민주동우회 회원들이 마을 한쪽 짚더미에 숨겨진 표지석을 찾아냈다. 그 자리에서 곡괭이로 내리쳐 표지석을 두 동강 내버렸다. 광주학살에 대한 울분과 응징을 담은 곡괭이 날이었다.

당시 전남일보 사진기자였던 신종천(현 투데이광주전남 편집국장) 씨가 현장을 목격했다. 그날의 사진이 당시를 증거하고 있다.

“두 동강 난 표지석을 망월동 묘지에 가져다 놔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부서진 표지석을, 운전하는 분과 같이 승용차에다 실었죠. 그리고 망월동 묘지로 가서, 나뭇가지로 땅을 파헤쳐서 묻었습니다.”

표지석은 지금도 망월묘역(현 민족민주열사묘역) 입구에 처박혀 있다. 안내판에는 ‘5월 영령의 원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이곳을 짓밟아 통일을 향한 큰길로 함께 나아 갑시다’라고 적혀 있다. 표지석은 오늘도 묘역을 찾는 참배객들의 발에 짓밟히고 있다.

민박 표지석은 광주에 전남도지사 공관이 새로 지어진 것과도 연결된다. 광주시 농성동 상록회관 옆이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광주에서 묵을 때마다 숙소로 썼다. ‘지방청와대’로 불린 이유다.

세월이 흘러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내려졌다. 도청이 남악으로 옮겨가면서 도지사 공관의 쓰임새도 사라졌다. 공공기관 이전부지 공원화 사업으로 상록근린공원이 조성됐다. 도심의 숲속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지금은 광주시립미술관 분관 하정웅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성산마을은 광주광역시와 경계를 이루는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의 성월리에 속한다. 마을이 무등산에서 흘러내리는 증암천(甑巖川) 옆, 들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증암천으로 맑은 물이 사철 흐르고, 그 물소리가 아름답게 들린다고 ‘성산(聲山)’으로 이름 붙여졌다. 마을의 지형이 기러기를 노리는 수리를 닮았다고 ‘소리뫼’로도 불렸다. 일제강점기 이전엔 ‘소리뫼’로, 이후에 ‘성산’으로 바뀌었다.

성산마을 주변으로 농지가 넓다. 모내기를 기다리는 논에는 물이 가득 채워져 있다. 증암천의 풍부한 물이 농사용 물 걱정을 덜어준다. 마을에서 포도도 많이 재배한다. 널리 알려진 ‘고서포도’다. 포도를 따서 마을 앞 도로변으로 갖고 나가 팔기도 한다.

바쁜 농사일이 끝나면 주민들은 마을회관에서 소일을 한다. 천변 정자에서 무더위를 식히기도 한다. 정자 이름도 멋스럽다. 강을 바라보는 정자, 망강정(望江亭)이다. 망강정이 수령 500년 된 노거수와 어우러져 아름답다. 나무의 밑둥 둘레가 3m 남짓, 키가 15m를 웃도는 거목이다.

증암천변의 나무 숲길을 따라 사람들이 오간다. 두 팔을 힘차게 흔들며 걷는 발걸음이 활짝 핀 금계국을 만나 더욱 가붓해진다. 골목을 오가는 마을주민들의 걸음걸이도 다소곳하다. 성산마을은 장수마을로도 알려져 있다. 분위기도 여느 마을보다 평온해 보인다.

삼국시대 이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월전고분도 성산마을에서 가깝다. 네모난 방형과 둥근 원형의 분구가 이어져 장고분과 비슷하게 생겼다. 고분의 길이 38m, 높이 2.5~3m에 이른다. 창평향교, 명옥헌원림, 광주호, 죽림재, 수남학구당도 지척이다. 도계를 넘으면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와 민족민주열사묘역과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