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기획 시리즈> “피로 얼룩진 기억, 기타 연주로 씻어냈어요”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518
[전남일보] 기획 시리즈> “피로 얼룩진 기억, 기타 연주로 씻어냈어요”
●5·18 그날의 또 다른 기억 -
<끝> 국군광주통합병원 의무부사관 서만재씨
진압으로 부상자 물밀듯 몰려와
공포질린 환자 위해 기타 연주도
스페인 유학시절 음악 등 만들며
오월광주 전파 ‘오월어머니상’ 수상
“오월 희생자들 정신 기억하겠다”
  • 입력 : 2023. 05.24(수) 18:40
  • 정성현 기자·박소영 수습기자
지난 15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 고(故) 전영진씨의 부친(오른쪽)과 5·18 당시 의무부사관 서만재씨(왼쪽)가 방문해 오월 영령의 넋을 기렸다. 정성현 기자
“군인에게 두들겨 맞은 시민들이 리어카에 한 무더기 실려 왔어요. 그 참혹했던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서구 국군통합병원(현 국군함평병원·5·18사적지 제23호)에서 정형외과 의무부사관(의무병을 관리하는 부사관)으로 근무했던 서만재(67)씨는 43년 전 그날이 생생하다. 머리에 피를 흘리는 사람·얼굴이 퉁퉁 부은 사람·발바닥에 총상을 입은 사람 등 계엄군에게 붙잡혀 무자비하게 폭행당한 이들을 두고 그는 “모두 아무 죄 없는 평범한 시민이었다”고 말했다.

●시민 위해 연주한 군인 부사관

1980년 5월, 광주국군통합병원에는 계엄군의 진압에 다친 시민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그 탓에 부상자들이 누워있을 병상조차 없어, 병원 복도에서 진료하기도 했다.

그해 3월 포항 해병대 2연대 1대대 공수부대에서 국군통합병원으로 자대를 옮긴 그는 두 달여 만에 벌어진 참상에 ‘너무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서씨는 “1977년 입대해 광주에 오기 바로 직전 부마항쟁(박정희 유신독재 반대 시위 항쟁)을 겪었다. 당시 부산·마산 지역에서도 군부대의 강경 진압이 있었다”며 “그런데 광주에서 벌어진 항쟁은 이와 비교조차 불가했다. 중학생 남자아이 발바닥에 총알이 관통된 것을 보고 ‘무엇을 위해 군인이 이렇게까지 강경 진압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민주화항쟁이었지만 광주민들이 겪었던 참상은 ‘인권침해 그 자체’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서씨가 관리하는 정형외과는 총 3병동으로 이뤄졌다. 각 병동에는 의무병 2명·간호사 2명·군의관 1명이 배정됐다. 평소 같으면 충분한 인력이었겠지만, 이들은 매 순간 밀려오는 환자에 피로 물든 군복을 갈아입을 겨를조차 없었다. 그는 “시위대뿐만 아니라, 심문 과정에서 고문 당한 이들까지 이곳으로 보내졌다. 항쟁 기간 어림잡아 3~400명 치료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서씨는 공포에 질린 시민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기타 연주’였다. 그는 병실·로비 등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기타를 들었다.

서씨는 “입대 전 늘 기타를 쥐고 살았다. 이를 활용해 상처 입은 광주 정신을 위로하고 싶었다”며 “당시에는 이들을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주했던 것 같다. 부디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감사하게도 수십 년이 지나 이를 기억해 준 몇몇 시민이 나를 수소문해 뒤늦은 감사 인사를 전해주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서만재씨가 지난 15일 광주 북구 망월동 구묘역에서 광주항쟁 당시 치료했던 민주열사들을 가리키고 있다. 정성현 기자
● “오월 정신·희생자 잊지 않을 것”

서씨는 군 복무를 마친 뒤, 1984년 기타 전공으로 평택대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졸업할 때까지 하루 10시간 이상 기타를 잡고 살았다. 그는 이를 두고 ‘매 순간 생각나는 광주의 참상을 잊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씨는 “오월 당시 끔찍하게 죽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다. ‘내가 더 열심히 치료했다면 살지 않았을까’라는 죄책감도 있었다. 매일 밤 너무 괴로웠다”며 “이를 승화시키기 위해 더 열심히 기타 연주를 했다. 괴로워하는 환자들이 유일하게 웃었던 모습들이 떠올라 큰 위안이 됐다”고 전했다.

서씨는 그길로 스페인 마드리드 왕립음악원에 편입했다. 더욱 깊은 공부를 통해 ‘광주의 오월’로 잡았던 기타를 ‘오월을 알리는 도구’로 쓰겠다는 일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유학 생활 내내 ‘광주’와 관련된 음악을 연주하거나 해외 지인들에게 광주항쟁의 참상을 전파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9년에는 오월어머니집이 수여하는 ‘오월어머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월어머니집 관계자는 “5·18 당시 군인이었던 서씨는 국군통합병원에서 위생하사로 근무하며, 폭도의 누명을 쓰고 억류돼 있던 피해자들을 도왔다”며 “유학 생활 중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5월의 진실을 알리는 데 일조했다. 민주화운동 계승과 저변 확대에 힘쓴 서씨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서씨는 이후 한국인 최초로 카네기홀에서 두 차례 기타 연주회를 열었다. 현재는 한국교원대·광주 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 등에서 후임을 양성하고 있다.

서씨는 “매 5월만 되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여전히 힘들다. 특히 대동고 3학년이었던 고 전영진씨가 가장 생각난다”며 “부모의 만류에도 ‘조국이 나를 부른다’며 달려간 그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광주항쟁과 희생자들의 정신을 끝까지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전영진 열사는 1980년 5월 21일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뛰쳐나간 뒤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쏜 총탄 세례에 휩쓸렸다. 시민들과 함께 도망가던 전 열사는 결국 옛 광주노동청 앞에서 오른쪽 머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사망했다.
정성현 기자·박소영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