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믿었으면 의심하지 말고 끝까지 밀어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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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 초대석
“한번 믿었으면 의심하지 말고 끝까지 밀어줘야죠”
●김해명 (재)지스트 발전재단 이사장
광주 예술계 메세나 자처 큰 어른
IMF 이겨낸 건설업계 중견사업가
고속도로 휴게소·물류창고 등 운영
“지역 예술계 기업 지원 너무 부족
사람 믿는 것이 사업보다 중요해”
  • 입력 : 2023. 02.14(화) 18:36
  • 노병하 기자 byeongha.no@jnilbo.com
김해명 (재)지스트 발전재단 이사장이 그동안 살아온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김양배 기자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신중해야 하구요. 하지만 한번 신뢰하기로 했다면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믿고 맡기는 것, 그게 제 철학입니다.”

청년의 삶은 판금공장 입사에서 시작됐다. 그러다 우연찮게 건설업에 뛰어들었고, IMF를 맞았다. 지난한 과정을 과정을 거치는 동안 피말리는 어려움을 용케 잘 버텨내며 필모그래피를 쌓았더니, 어느새 건설업 외에도 물류회사와 함께 고속도로 휴게소 3곳을 운영하는 중견기업인이 됐다.

그러던 와중에 예술계에 인연이 닿았다. 개인적으로 고미술을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지역 예술계와 연결점이 되지는 않았다. 연결 매개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통해 지역 예술계와 소통을 하게 되면서, 그들의 녹록지 않은 현실에 마음이 무거웠고 실제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가 지역 예술계 메세나의 맨 앞줄에 선 연유다. 김해명(66) (재)지스트 발전재단 이사장의 이야기다.

● 전시회 재원 1억 흔쾌히 지원

“대단하신 분이시죠. 어려운 지역 예술계를 위해 선뜻 나서주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런 김 회장님은 거침이 없으신 분이세요.”

한 지역 환경미술가가 김 이사장을 지칭할 때 했던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2021년 광주 디자인비엔날레 당시 선뜻 1억원의 기부금을 낸 사람이 김 이사장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기부 사실을 숨겼다. 이유는 명료했다.

“아는 작가가 와서 전시회를 하려는데 돈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냐고 물었죠. 낼 수 있으니 낸 것입니다.”

사정은 이러했다. 디자인비엔날레에서 환경미술을 전시하려고 했는데, 비용이 어마어마했다. 지원해주기로 한 기업이 있었지만, 코로나 등으로 어쩔수 없이 철회했다. 그때 이 작가가 만난 사람이 김 이사장이었다. 조심스런 요청에 그는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에게 있어 도움을 요청한 작가는 ‘한번 믿게 된’ 그래서 계속 ‘믿어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큰 금액을 기부한 것에 대해 아주 담담히 지나가듯 이야기를 꺼낸 김 회장은 정작 흔히 말하는 ‘있는 집’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1956년 광주 송암동에서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 이사장은 자신의 집에 대해 “그리 가난하지는 않지만 부자는 아닌”이라고 표현했다. (용어를 굉장히 가려서 말하는 김 이사장이다보니, 어쩌면 ‘그리 가난하지 않다’는 표현은 다소 못 미더울 수 있다) 동네는 집성촌 마냥 아버지의 형제들이 곳곳에서 뿌리를 내린 곳이었다.

시끌벅적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고, 고교 진학은 광주기계공고를 선택했다. 졸업 후에는 간첩을 잡고 싶어서 전투경찰에 자원했다. 해안초소에서 근무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간첩은 만나지 못하고 제대했다.

이후 재수를 한 그는 조선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입학, 단과대학생회장을 맡는 등 활발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리고는 경남 창원에 있는 연합철강(현 동국철강)에 엔지니어링 세일(기술영업)직으로 입사한다.

“직장을 구하려고 보니, 광주지역에 철강 기업이 없는 겁니다. 완행열차를 타고 8시간 걸려서 창원을 갔지요. 3년 정도 근무했습니다. 광주에서 철판사업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광주로 돌아왔지만 계획했던 사업은 하지 못했다. 돈 때문이었다. 대신 친형이 하는 건설회사에 입사했다. 그때부터 1992년까지 그는 건설업에서 경험을 쌓았다.

●무리하지 않지만 거침없이

건설업 경험을 바탕으로 회사를 세웠다. ‘명신건설’이라는 간판을 내걸었고, 생각보다 순조롭게 풀렸다. 회사원으로 근무할 때 착실히 쌓아둔 인맥이 자산이 됐고, 기술력이 보증했기에 막힘이 없었다. 여기에 사람을 믿고 일을 맡기는 그만의 리더십도 큰 영향을 발휘했다.

“믿기 전에는 신중해야 하지만,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어야죠. 그리고 비밀을 둬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알 수 있도록 공개해야죠.”

실제로 그는 지금도 모든 사업을 직원들이 알 수 있도록 공개했다. 자재를 얼마나 구매하고, 어떤 영업을 누가 했는지, 이번 달은 얼마의 비용이 들어갔는지 등의 정보를 독점하지 않는다. 누구나 보고, 또 그 밑에 댓글을 달아 의견을 제시하도록 했다. 일이 그르치지 않도록 방지책을 마련한 것이다.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던 중 IMF가 터졌다. 다른 기업들은 모조리 숨을 죽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되레 그에게는 호황이었다. 관공서의 입찰 물량이 남아 돌았는데, 수행할 기업이 없어서 대부분 그에게 몰린 것이다. 과감한 투자도 감행했고 생각보다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 허나 곧바로 소진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 헉헉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와달라고 말은 안했어도 힘든게 눈에 보입디다. 그러니 도와줄 수밖에요.”

잘나가던 사업은 2006년 들어 소강상태를 맞았다. 건설업이 다시 늘어나면서 낙찰 받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이런저런 사업 아이템을 찾던 중 한국도로공사의 유휴부지 개발을 알게 됐다. 몇 개월간 열심히 노력해서 서류를 만들어 제출했지만 되지 않았다. 낙심할 틈이 없었다. 몇 개월 뒤 고속도로 휴게소 운영 관련 공지가 떴다. 신청했고, 하늘이 도왔는지 3곳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 건설업과 휴게소 운영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현재는 큰 물류창고도 운영하고 있다.

대외활동이 활발해진 것도 이맘때였다. 새로운 기술과 공부에 목이 말랐던 김 이사장은 2000년 초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서울대학교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매주 화요일 기차를 타고 올라가서 강의를 듣길 1년여간, 같이 수업을 듣던 사람과 사돈을 맺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지만 배움의 갈증을 채워주기엔 부족했다. 또다른 배움의 길이 열렸다. 광주과기원에서 모집하는 1기 기술경영 아카데미이다. 당시 회원으로 강운태 전 광주시장 등이 참여했다. 그저 공부를 더 하고 싶어 갔는데, 아카데미 회장까지 맡는 영광을 누렸다. 다음 기수에게 물려주고 나니 이번엔 지스트에서 발전재단을 만들었다. 발전재단의 주 멤버는 아카데미 출신들이었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이사장으로 추대됐고, 이번에 세 번째 연임을 했다. 무리하지 않지만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그러나 무엇 하나 숨기지 않은 그의 운영스타일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계속 리더의 자리에 앉게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생산성본부 호남교류회를 이끄는 수장이 됐고, 고등학교 동창회장에 까지 추대됐다.

“순서가 됐다고 하니 맡아야지 어쩌겠어요. 맡았으니 또 열심히 한 것이구요.”

●“MZ세대 잘하고 있다”

예술과의 인연은 예기치 않은 데서 시작됐다. 모교 동창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동아리 활동 지원에 나섰는데, 자신이 다녔을 때에 비해 학교 동아리가 너무 줄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 문득 “아! 그때, 미술동아리 애들 있었는데 지금은 뭐하지?”하는 생각이 스쳤다. 김 이사장의 고교 시절 전시회를 열던 미술동아리 회원들이 궁금해진 것이다.

찾아보니, 20여명이 예술계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옳다구나 싶어서 모교 70주년 행사에서 미술 전시회를 열었다. 이때 알게 된 예술가들이 그를 메세나의 길로 끌어들였다.

202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기부금 지원부터 2022년 김상연 작가가 광주문화재단의 도움으로 진행한 ‘검은 심장’ 전시회에도 그의 손길이 미쳤다. 자신의 공장 주차장에서부터 물류창고, 마당, 직원휴게실까지 전시 공간으로 내준 것이다.

또 같은 해 9월28일 문화동행 ‘기업과 예술의 만남’ IR-DAY 행사에서는 문화기부금으로 1억원을 쾌척했다.

광주문화재단의 예술창작지원금이 연간 20억원에도 못미치는 것을 본다면, 김 이사장의 지원은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있다.

그와 일하는 직원들 대부분은 10년 이상 같이 있다. 그는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손해봐도 괜찮다는 주의다. 마인드도 깨어 있다. 젊은 직원과도 대화가 통한다.

김 이사장은 “젊은이들은 낮게 보면 안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자신의 신념과 주장이 명확합니다. 다만 그것이 나이든 세대에게 익숙하지 않을 뿐이죠”라면서 “요즘 젊은이들 잘하고 있습니다. 노력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기성세대들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말한다.

“나이 들어 갈수록 폐쇄적이어선 안됩니다. 오해는 말을 하지 않기에, 또는 자신이 익숙한 채널에만 말을 하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공개하고 터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혼란스러울 수는 있어도 오해는 없습니다.”

앞으로도 메세나 지원은 계속 하겠다는 그는 꿈이 하나 있다. 책을 내는 것이다.

“고등학교때부터 사귄 4명의 친구들과 주말에 전국으로 사찰투어를 다닙니다. 불제자인 것은 아니구요. 유명한 사찰의 고즈넉함과 깊이가 너무 좋아서이죠. 한번 방문하면 몇시간이고 돌아봅니다. 가고싶은 사찰이 33곳인데, 16군데 들렀습니다. 다 돌고나면 책으로 쓰고 싶습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리에 오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자리에 오르면 그 가치를 보였다. 사람을 믿었고, 그래서 예술을 지원하게 됐다. 김 이사장은 물 흐르듯이 살았다. 하지만 그 물줄기는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려 하기에 계속 많은 줄기들이 달라 붙어 불어나고 있다. 바로 이 부분이 김 이사장이 지역 어른으로서 앞으로 어떤 리더십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는 대목이다.
노병하 기자 byeongha.n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