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이야기> 16세기 타임캡슐 ‘미암 박물관’ 마을 품격 높여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이야기> 16세기 타임캡슐 ‘미암 박물관’ 마을 품격 높여
담양 장산마을
‘척척박사’ ‘글 귀신’ 유희춘
정치·문화·교육·일상·편지
10여년간 세세한 기록물
유희춘 아내 여류시인 덕봉
지덕 겸비 신사임당에 견줘
연못 위 비친 모현관 환상적
  • 입력 : 2023. 02.02(목) 13:27
모현관과 선산유씨 종갓집. 장산마을의 연못정원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미암박물관 풍경. 장산마을의 품격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손으로 쓴 유희춘의 미암일기. 미암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학창시절 방학 때면, 가장 큰 숙제가 일기쓰기였다. 일기(日記)는 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을 날마다 적어야 한다. 하지만 방학숙제였던 일기는 개학을 앞두고 한꺼번에 쓰기 일쑤였다.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기억나지 않는 지난날의 날씨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심지어 한 달 전의 날씨도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내용도 문제였다. 날마다 자고 일어나서, 먹고, 놀고, 다시 자는 거 외엔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재밌는 하루였다’ ‘어제보다 더 재밌는 하루였다’는 말이 되풀이됐다. 선생님의 검사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진솔한 일상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개인의 일기는 사회와 국가의 중요한 기록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쓴 일기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통해 임진왜란의 전황을 소상히 알았다. 이순신이 어떻게 전쟁을 준비했는지, 누가 도왔는지, 어디에서 어떤 싸움을 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순신의 인간적인 고민과 번뇌도 엿볼 수 있었다.

‘팔만대장경’과 ‘조선왕조실록’도 기록을 통해 전해진 우리의 역사다. 1980년 5월의 상황을 적은 학생과 시민의 일기, 기자의 현장취재 수첩도 매한가지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옛 선인의 일기를 엿볼 수 있는 담양 미암박물관으로 간다.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에 있다. 뒷산이 노루의 형상이라고 ‘노루봉(獐峰)’으로 불렸다. 그 아래에 들어선 마을이라고 노루골, 장동(獐洞), 노랑골, 장산으로 불리는 마을이다.

장산마을은 조선 중기의 문신 미암 유희춘(1513~1577)이 쓴 <미암일기>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일기를 쓴 유희춘은 기록의 달인으로, 미암일기는 16세기의 타임캡슐로 불린다.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1567년 10월 1일부터 1577년 5월 13일까지 썼다. 근 10여 년에 걸친 기록이다. 모두 14권이었다. 지금은 10권만 전해지고 있다. 글자 수만 한자로 90만 자에 이른다. 현존하는 개인의 일기 가운데 가장 방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암일기에는 개인의 일상이 소상히 적혀 있다. 대학자였던 유희춘의 일상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일기를 보면서 인간적인 친밀감까지 느껴진다. 유희춘이 아내(송덕봉)와 주고받은 알콩달콩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더 중요한 것은 일기에 적힌 내용이 당시의 정치와 경제 상황, 사회와 문화, 사상과 물산, 의술, 교육 등을 망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승정원일기’가 불에 타 버렸다. 광해군 때 ‘선조실록’을 펴내면서 이이의 ‘석담일기’ 기대승의 ‘논사록’과 함께 ‘미암일기’가 참고자료로 쓰였다. 역사자료의 가치도 지닌 일기다. 미암일기가 보물(제260호)로 지정된 이유다.

유희춘은 1513년 해남에서 태어났다. 해남 우슬재를 품은 산이 금강산이다. 금강산의 미암(눈썹바위)을 자신의 호로 쓴 유희춘은 하서 김인후와 신재 최산두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유생들 사이에서 ‘척척박사’ ‘글 귀신’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으로 통할 만큼 박학다식했다고 전한다.

유희춘은 정미사화 때 유배돼 19년 동안 살았다. 정미사화는 명종 때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을 가리킨다. 유희춘은 선조 때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벼슬길에 나섰다. 미암일기는 그때부터 썼다.

미암박물관이 있는 장산마을은 유희춘의 처가 동네다. 24살의 유희춘은 16살의 덕봉과 혼인을 하면서 담양과 인연을 맺었다. 덕봉은 여류시인으로, 당대에 한시 38수가 담긴 시문집을 남길 만큼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우리는 지덕을 겸비한 여성으로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기억한다. 학자들은 덕봉을 그 반열에 올린다. 남편과도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한 인물이라고 평한다.

미암박물관은 ‘미암일기’와 일기의 일부분을 목판으로 인쇄한 ‘미암집’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미암일기, 미암집, 396개의 미암집 목판을 볼 수 있다. 부인 덕봉의 재치 넘치는 글도 만난다.

‘동의보감’으로 알려진 허준과 유희춘의 남다른 인연도 알려준다. 허준이 유배에서 풀려난 유희춘을 정성껏 돌봤다. 하서 김인후가 아팠을 때 유희춘이 허준을 보내 돌보도록 했다. 허준을 내의원으로 추천한 사람이 미암이었다고 전한다. 유희춘과 김인후는 사돈으로 맺어진다.

미암박물관의 바깥 풍경도 한 폭의 그림이다. 미암과 덕봉이 살았던 마을이다. 선산유씨 종가가 있고, 미암과 덕봉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사당은 광해군 때 세워졌다. 전남민속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미암박물관이 들어서기 전까지 ‘미암일기’를 보관했던 모현관도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모현관은 1959년 화강암으로 지어졌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한국 전통의 원리에 따른 연못의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편액을 남종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이 썼다. 연못정원의 중심이 되는 석조건축물이다. 건물이 연못에 반영돼 비치는 모습도 환상적이다.

연못가에 고목 느티나무와 어우러진 누정 연계정도 있다. 연계정은 유희춘이 말년에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라고 전한다.

장산마을에 애국지사 김제중 기념비도 있다. 김제중 지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으다가 일제에 붙잡혀 8년간 감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이다.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정원이 아름답다고, 담양군에서 ‘예쁜정원’으로 지정한 집도 기념비 옆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환경과 인문학이 잘 어우러진 장산마을이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 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