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창> 노트 필기 대신 노트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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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창> 노트 필기 대신 노트 만들기
정만호(광주봉주초 교사, 미래교실네트워크 광주대표)
  • 입력 : 2019. 05.12(일) 14:12
  • 편집에디터
'기록되지 않는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만리장성이나 베르사유 궁전과 같은 웅장한 규모의 유물은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방대하고 치밀한 기록유산이 남아있습니다. 다빈치, 뉴턴, 정약용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위대한 이유는 그들은 꾸준히 기록했고, 그 기록물을 바탕으로 부가가치를 만들었기 때문이며 그 기록물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아이들, 갈수록 무언가를 쓰는 것을 싫어합니다. 특히 스마트기기의 발달로 꼭 기록해두어야 할 것도 그냥 사진으로 찍는 경우가 많아졌죠. 그러고는 나중에 찍어둔 사진이 생각나서 사진 모음을 뒤지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연필을 잡고 무언가를 쓰는 과정은 단순히 기록으로 남기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일단, 기록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정보에서 유의미한 것과 무의미한 것을 구별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유의미한 정보라고 해서 무조건 다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만의 언어로 간추리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공책에 한 자 한 자 적으면서 알게 된 정보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고, 이것은 공책에 적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의 머릿속, 나의 가슴 속에 적는 것과도 같습니다.

공부는 학생 스스로 하는 것이며, 그 시작은 바로 자기만의 공부 방법을 세우는 것에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자기 주도적 학습방법이라고 하지요. 자기 주도적 학습의 시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단연 학습장 정리라고 답하겠습니다.

그래서 매년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면 공책 정리가 왜 중요한지 이야기했고, 모든 아이의 공책을 매일 확인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공책 정리에 공을 들여온 저에게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학교마다 헌책, 헌 교과서를 수거하여 북한이나 개발도상국의 어린이에게 보내는 일이 매년 반복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많은 아이가 고생해서 쓴 공책을 거리낌 없이 헌 책들과 함께 휙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교사로서 정말 어이가 없었고, 학생들이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또한 매우 화도 났고요. 이런 학생 중에는 평소에 공책 정리를 잘한다고 칭찬하던 OOO도 있었습니다. 끓어오르는 화를 꾹 참고, OOO을 붙들고 물었습니다. "헌책이나 헌 교과서를 버리라고 했는데 공책은 왜 버리는 거니?" "공책을 다 써서 필요 없으니까 버려도 되는 줄 알았어요." "네가 1학기 동안 꾸준히 쓴 공책인데, 소중하지 않니?" "음. 소중하기는 한데, 다 쓴 공책은 다시 볼 일이 없어요." "볼 일이 없다고? 학교에서 단원평가나 수행평가를 준비할 때 공책으로 하면 좋잖아." "그때는 학원 문제집에 있는 요약정리를 보면 돼요. 제거 공책은 과목별로 섞여 있어서 찾기가 힘들어요."

그날 이후로 공책 정리에 대한 생각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헌 공책 버리기' 사건 이전에는 공책을 정리할 때 어떻게 하면 보다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면, 사건 이후에는 공책을 왜 써야 하는지 그리고 쓴 공책을 어떻게 하면 다시 활용할지에 대해 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빠짐없이 기록하고, 글과 이미지를 잘 조합하여 정리했다고 할지라도 다시 보고 싶은 매력이 없는 공책이라면 언제라도 주인에게 버림을 받을 운명에 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성껏 쓰고, 쓴 공책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학습장 정리의 방법을 고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김정운 교수의 '에디톨로지'라는 책에서 공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책에서 김정운 교수는 독일 유학시절 독일 학생들의 필기 방법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독일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과 다르게 공책 정리, 즉 노트 필기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노트 필기조차 하지 않는 독일의 학생들이 어떻게 어른이 되어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노트 필기 대신에 카드 정리(zettelkasten)를 하기 때문이라는군요. 독일 학생들이 쓰는 카드의 맨 위에는 인덱스, 즉 색인을 쓰게 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내용을 요약하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공부한 내용 중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 자신만의 인덱스와 요약정리 카드를 만드는 것이지요. 이렇게 인덱싱이 되어 있는 카드를 쓰고 계속 모으다 보면 어느덧 카드 상자가 만들어지게 되고, 만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덱스의 순서를 다시 조정한다든가 인덱스를 수정하는 작업을 거쳐 계속 편집 가능한 노트가 된다는 것입니다. 노트를 필기하는 것이 아니라 노트를 만든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수정할 수 있고, 모을 수 있는 노트라면 공책의 주인이 계속해서 손에 쥐고 있게 되고, 이것은 한 번 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편집 가능한, 생명력을 유지한 공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는 습관이라는 틀을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게 디자인돼 있지만, 새로운 목표를 즐겁게 추구하도록 디자인돼 있기도 합니다. 기존의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공책 정리 방법도 좋지만, 새로운 공책 만들기 경험을 우리의 학생, 자녀에게 권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물론 나부터 시작해보고요.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