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정동리 정상에서 바라본 노화도 전경, 앞 바다에 펼쳐진 양식장 풍경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다리는 보길도와 연결된 보길대교다. |
인근섬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
너른 평야ㆍ김 수출 덕택 활기
IMF 이후 젊은이들 속속 귀향
미라리 마을 고소득 전복생산
동양최대 납석광산서 옥 생산
김ㆍ전복 등과 '노화도 특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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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의 고장 완도군 노화도를 가는 길은 두 갈래다. 완도 화흥포와 해남 땅끝 마을이 그곳. 80년대 이후 노화도 산양진항과 해남 땅끝을 통해 교류가 이뤄지고 있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노화도 이목항을 통해서 왕래했다. 이목항은 섬과 섬을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으며 보길도, 소안도, 넙도 등 주변 섬의 생활 중심지이자 상업중심지였다.
● 목선에 200명 탑승 목숨건 항해
60~70년 당시 오가는 길은 험난했다. 항해 장비도 없이 낡은 목선에 의지해 새벽 6시 완도항을 출발했다. 오로지 선장의 감으로 파도를 헤치며 청산도~소안도~노화도~보길도~넙도~해남 어란~진도 벽파진 등 3개 군의 포구를 거친 뒤 비로소 오후 5시 목포항에 도착했다. 장장 11시간의 멀고 험난한 뱃길이었다. 더우기 하루 한 척밖에 없는 목선이 육지로 나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76톤짜리 여객선 정원이 80명인데 섬을 돌고 나면 200명 이상이 타 있었다.
저마다 보따리 하나씩은 들고 탄 까닭에 배 하중에 무리가 따라 목숨 건 항해를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80년대 접어 들면서 100톤 이상의 철선이 등장했고 속력도 나아져 운행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도로의 발달로 목포 항로는 폐항됐고 이제는 추억 속의 뱃길로 남았다.
노화도는 작은 목포, 제2의 목포라 불리며 섬과 섬을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주변 섬의 물류 중심지였다. 지금은 인구4000여 명이 거주하는 소읍이지만 한때 2만명이 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해상도시였다. 개도 만 원 짜리를 물고 다녔다던 호시절이었다. 노전배(노로 젓는 배), 돛단배, 똑딱선, 통통배를 타고 모여 들었던 노화장은 많은 사연을 갖고 있다.
보길도 사람들은 장날 운행되는 도선을 타고 노화장을 찾았다. 인근 보길도, 소안도, 넙도, 횡간도, 흑ㆍ백일도는 물론 멀리 제주 추자도와 땅끝에서도 찾아왔다. 지금은 6시간 가는 목포 보다 도로로 50분인 해남 땅끝과 완도 화흥포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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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산물 풍부 '제2의 목포'라 불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노화도는 여느 섬들과 비교할 수가 없다. 섬의 크기와 육지와 적당한 거리, 해산물 대량생산 등 보배 섬이 됐다. 노화도를 '제2의 목포'라 불리는 데는 이러한 입지적 조건이 뒷받침 돼 있어서다. 오래 전부터 주변 섬의 중심지 역할을 한 데는 드넓은 농토 덕분이었다. 노화도는 섬이면서도 산지가 적고 도청들, 동천들, 충도들, 신양들 등 평야를 가지고 있다. 농토와 함께 바다라는 농장에서 50~60년대 지주식 김 양식을 시작했고 70년대 초까지 일본으로 수출하면서 높은 소득을 올렸다. 김 과잉생산으로 사양길로 접어들자 미역양식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90년대부터 전복양식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바닷가 어민 80% 이상이 전복 양식을 하고 있으며 전국 생산량 70%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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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대꽃 장관' 노화도라 명명
노화도는 400년 전 염등리에 전주이씨가 들어와 소금생산을 하면서 마을을 일궜다. 노화란 지금은 농경지와 염전으로 변한 염등리와 등산리 앞 갯벌에 갈대꽃이 피면 장관을 이룬다 해서 노화란 지명이 붙었다.
노화도의 관문은 이목항이었으나 지금은 산양진과 동천항으로 그 중심이 옮겨갔다. 면소재지인 이목항에는 보길도 청별항 과 2008년 개통된 보길대교와 620m의 다리가 있다. 이 다리의 등장으로 뭍에서 보길도를 찾는 여행객들은 시간과 뱃삯을 절반으로 줄이면서 노화도까지 들러볼 수 있게 됐다. 보길대교의 가치는 천문학적인 가치가 있다.
노화도에서 가장 큰 마을인 이목항은 '작은 목포'라 불린다. 국가어항인 이목항은 전형적인 어촌형 소규모 도시다. 대부분 식당과 횟집들이지만 특히 항구답게 다방이 많다. 식당이나 모텔 혹은 여관은 부두를 따라 한 줄로 서 있다. 식당은 대부분 횟집이다. 허름한 여관부터 제법 번듯한 모텔까지 숙박업소가 여럿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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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마을 미라리 '전복으로 대박'
이곳에는 '당'자가 붙은 마을이 4곳이나 있다. 그만큼 당산제 신앙의 뿌리가 깊다은 곳이다. 대당리는 마을 뒤편 낮은 구릉에 위치한 나무숲 사이에 웃당이 있고 건너편 저지대에 아랫당이 있다. 1560년께 입주해 큰 당을 만든 후 대당마을이라 명명했다. 이곳 당산나무는 400여 년된 팽나무로 고사를 지내며 풍어와 마을의 평년을 기원했다. '거리제' '들제'라 하는 이 제사는 음력 정월 초하루 자정을 기해 지내는데 소머리, 산채, 막걸리 등이 제물로 올려진다. 대당리에는 1884년에 세워진 관찰사 조강하 송덕비와 함께 7기의 지석묘군이 있는데 남방형 고인돌로 도서지방 선사시대의 연구에 기초자료가 된다.
이목항 다음으로 주목 받는 마을이 미라리다. 일명 전복마을이다. 미라리 해안은 온통 갯벌이다. 그러나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붉은 벽돌로 지은 으리으리한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엿한 부자마을이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보잘 것 없는 미라리를 살린 건 전복이었다. 1996년부터 전복 양식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자 고향을 떠났던 사람이 하나 둘 돌아왔다. 2002년 소득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마을 주민 모두가 전복을 양식하고 있다.
비싼 가격이라 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바다의 산삼' 전복. 대량양식 성공으로 대중화 길을 연 데는 미라리 마을 청년들의 고생과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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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 최대 납석광산서 옥 생산
동쪽 마을인 구목리는 양하리ㆍ석중리와 함께 연간 수천톤의 납석을 생산하는 탄광이 있다. 특히 옥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생산한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그다지 크지 않은 마을인데 골목의 돌담이 인상적이다.
이 마을에는 동양 최대 납석광산이 있다. 연간 65만톤을 동남아에 수출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납석광산이 개발돼 광석을 일본ㆍ대만에 수출하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옥은 품질이 뛰어나 김ㆍ전복과 함께 노화도 특산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노화도의 자연 환경은 김,미역, 전복 양식을 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동남쪽에는 보길도와 소안도, 북쪽에는 횡간도, 서쪽에는 노록도와 넙도가 노화도를 감싸주며 방파제 역할을 해준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전복양식이 내리막길에 접어 들었다. 밀식과 대량 양식으로 물의 흐름이 정지되고 바다가 썩어 폐사율이 높다고 한다. 하루속히 대책이 필요한 때다.
이재언 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
●개요
노화도는 완도군 노화읍에 딸린 섬으로 면적 25.01㎢, 해안선 길이 41㎞, 개압산(160m), 1701가구에 4550명이 산다.
●지명 유래
염등리 앞 갯벌에 갈대꽃이 피면 장관을 이뤄 갈대 노(蘆), 꽃화(花)를 써 노화도라 했다.
● 가는 길
완도읍 화흥포항 청해진 카페리호 ↔ 노화읍 동천항 1일 수시(50분 소요). 061)552-1171.
해남 땅끝서 정보고호 ↔ 노화 산양진 수시로 (50분 소요), 061)535-4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