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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옛 사진(1979년 이전, 사진 '한국의 미 ⑲ 불상', 중앙일보사) 가체같은 나발 머리에 두르고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螺髮) 위에는 사발처럼 넓은 살 상투(肉髻)를 나지막이 얹어 과도하게 높아가던 비현실성을 극복하였다. 눈과 코·입술은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약사암 석불에 구현된 나발은 그동안의 8~9세기 불상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주목을 끌어왔다. 이마 위와 후두부 쪽에만 굵직하게 머리카락을 꼬아서 가체加髢 머리처럼 나발을 둘렀다. 이에 비해 머리 정중앙은 나발 형태가 희미할 뿐이다. 선정禪定의 경지에 이른 자비스러운 미소 반쯤 감은 눈과 편안한 표정의 얼굴에서는 선정禪定의 경지에 이른 자비스러움이 배어나고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양쪽 귓불은 더 길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끝이 모두 파손되었...
편집에디터2020.12.23 14:50무등산 약사암. 새인봉이나 중머리재를 가다가 한 번쯤은 물이라도 마시러 들렀음직한 암자. 그 암자 대웅전에 앉아계신 돌부처. 얼핏 경주에 계신 그 어떤 돌부처와 살짝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약사암 석불은 그동안 베일에 싸였다 할 정도로 그 정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 시대 문헌이나 일제강점기의 각종 자료나 문서, 심지어는 신문에서조차 그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약사암도 마찬가지다. 조선 후기 읍지에서 전혀 모습을 찾을 수 없다가 1911년 '조선지지자료'에서부터 雲谷里의 약사암으로 세상에 등장했다. 1879년 「광주읍지」에 실린 에는 '藥寺'로만 기록되었을 정도다. 이미 3년 전인 1921년 11월 9일 4면 '每日申報' 신문 기사에 '광주약사암낙성光州藥師庵落成'이라며 광주 증심사 약사암 낙성식을 지난 3일에 당시 주지 박병운朴秉云 씨와 치른 사실을 기록하...
편집에디터2020.12.10 12:441. 죽림사 괘불 전체(1622년, 사진 문화재청) 죽림사 괘불탱 세부 모습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에 등장한 임금의 귀처럼 팔랑거릴 것 같은 길게 늘어진 장대한 귀는 매우 인상적이다. 짧은 목에는 삼도를 선으로 가슴까지 내려오게 묘사하였다. 어깨는 당당하며 꽃무늬가 화려한 붉은 색 가사를 둘렀다. 승각기는 명치를 겨우 가린 정도이다. 그 위에 걸친 가사는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로 감아올려서 승각기 발아래에 감췄다. 가사 모서리는 도장으로 찍은 듯한 국화문을 촘촘히 장식하였다. 오른발을 왼 종아리 위에 얹은 반가부좌이다. 대체로 붉은색 기운이 괘불 전면에 감돈다. 가사와 키 모양과 광배 외곽 띠와 연화대좌 하단이 적색조이다. 광배 내부와 오색구름 일부와 가사 안쪽은 녹색조로 외곽의 붉은색 보색 효과로 색조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었다. 꽃무늬가 장식된 구름과 ...
편집에디터2020.11.26 12:481. 운흥사지 괘불지주 전경 1(17세기 초반, 사진 황호균) 괘불지주와 당간지주에 대한 찬란한 오해 괘불지주는 그 생김새가 당간지주와 비슷하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문화재 지표조사'나 '문화재 안내판(무위사)'에서 조차 괘불지주를 당간지주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그 둘은 위치나 개수, 크기, 심지어는 용도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당간지주는 절 초입에, 괘불지주는 대웅전 같은 중심불전 앞에 세우는 입지적인 측면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당간지주는 두 개의 돌기둥인 2점을 1조로 세운 데 비해 괘불지주는 두 개의 돌기둥을 좌우로 배치하여 모두 4점을 1조로 삼는다. 그 크기도 괘불지주는 사람 허리 높이 정도로 작지만 당간지주는 사람 키보다 더 큰 2m 이상이다. 당간幢竿은 당이나 깃발을 걸었던 장대이고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이러한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
편집에디터2020.11.12 10:161. 미황사 괘불탱 게시 원경(1727년, 사진 문화재청) 괘불탱과 괘불지주의 개수 불일치 지금까지 전해져온 괘불탱과 괘불지주의 조성된 개수가 서로 일치하지 않고 엄청난 차이가 발생한다. 이상하게도 이러한 현상에 대해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재 사찰이나 박물관 등에 전하는 괘불탱은 1945년 이전을 대상으로 하여 그 이전에 조성된 것이 2015년 12월 기준으로 117점으로 조사 되었다. 또한 현재는 전하지 않으나 문헌기록과 관련 유물, 괘불지주, 괘불궤, 복장 원문 등을 통해 괘불탱의 조성 사례도 20건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수치로 볼 때 괘불탱은 총 137점 이상이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괘불지주는 86조(괘불지주는 좌우 각 2점을 한 조로 계산) 296점이 조사되었다. 물론 괘불탱은 있지만 괘불지주가 파괴되어 제구실을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숫자상으로...
편집에디터2020.10.29 12:231. 화엄사 영산회괘불탱(1653년, 사진 문화재청) 괘불은 전후 복구 중창 불사용으로 제작 괘불의 형식미에는 나라를 지켜냈다는 담대한 자부심에서 오는 미의식뿐만 아니라 임진 병자 양대 전란 후 사찰의 중창과정에서 복구가 채 되지 않은 상태로 야외(마당)에서나마 미리 예불을 보거나 재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긴급히 제작한 후불벽화의 야외 버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한 발짝 더 나가 전란 때 불타버린 불전이나 약탈당한 불상 등에서 입은 피해 의식이 이동이 어려운 벽화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두루마리형 걸개그림인 괘불탱을 탄생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상상해 본다. 특히 많은 시간과 경제력이 들어가는 벽화가 화재로 일시에 무참히 파괴되는 것을 본 뒤로부터 후불벽화는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괘불과 후불탱화가 그 빈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기 ...
편집에디터2020.10.15 14:021. 미황사 괘불재 모습(2018년, 사진 현대불교) 괘불은 당시 사회의 다양한 요구 반영 17세기 괘불에는 영산회・삼신불・장엄신・오불회五佛會 등 모든 형태가 다 등장하지만 점차 영취산의 석가모니불에 바탕을 둔 도상圖像이 다양한 의식의 교주를 통합할 수 있는 구심점으로 선호되었다. 무수한 시공간의 불세계에 대한 관념과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는 불신관佛身觀에서 석가모니불은 신앙의 중심에 지리하였다. 괘불은 법화신앙에 기반하면서 선종禪宗과 화엄華嚴・미륵彌勒 신앙 등 당시의 사찰・승려・신도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의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면서 독특한 도상을 창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을 축제에서 발전된 공동 행복 추구 괘불재는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보다 민속적인 색채가 오히려 더 강하다고 알려졌다. 일반 민중의 머릿속에는 괘불...
편집에디터2020.09.24 13:091. 내소사 영산회괘불탱 원경(1700년, 사진 황호균) 괘불, 세계 유일한 걸개그림 괘불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이 우리나라에서만 꽃 피운 걸개그림이다. 이러한 괘불이 왜 우리나라에서만 갑자기 조성되게 되었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임진왜란(1592년~1598년)・병자호란(1636년~1637년)이 끝난 후 대규모 천도의식薦度儀式이 활발히 개최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공교롭게도 괘불의 등장 시기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란을 거치면서 전소된 사찰들에 대한 재건 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의 시기와 일치한다. 특히 전란을 거치면서 승병의 활약으로 불교계가 다시 중흥을 맞이하며 큰 사찰들이 대규모로 중수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괘불은 사찰 전각 재건 후 불상이 봉안되고 후불탱화를 갖추게 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함께 조성되었다. ...
편집에디터2020.09.27 15:191. 운주사 석탑 문양 모음('운주사종합학술조사', 전남대학교 박물관, 1991.) 운주사 석탑 문양의 비밀 운주사 석탑의 몸돌에 표현된 기하학적인 문양은 어떠한 의미이며 무엇을 상징할까? 운주사 석탑에 새겨진 '마름모'(◇,□), '×' 교차(×, ××), '수직사절'(⟩|||||||⟨) 등의 문양은 우리나라 석탑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문양의 형태를 유심히 살펴보니 기본적인 도형은 마름모(◇)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냥 '◇'를 새기거나 '×'자를 중첩해서 마치 몽골전통 가옥인 천막집 게르(Ger)의 뼈대처럼 연결한 문양도 발견된다.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생각해 오던 것을 인도의 힌두교(불교) 사원 외벽에 장식된 다양한 형태의 마름모(◇) 문양을 보면서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
편집에디터2020.09.27 15:141. 운주사 '가' 석불군과 동냥치 탑이 어우러진 모습(사진 황호균)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 '중장터'가 '승시僧市'로 거론된 것은 '불교' 65·66 잡지에 실린 백양사 승려 안진호(필명 晩悟生)의 사찰 참배기인 '천불천탑을 참배하고서' 기사(1929년 11월 12월)에서 비롯되었다. 구체적으로 지역은 거론하진 않았지만 "조선시대에 사원寺院이 전성全聲할 때는 능주의 쌍봉사·운주사·개천사·팔랑사·석천사, 남평의 불회사·일봉암, 나주의 모모사某某寺가 합동하여 따로 승시僧市를 열고 장을 보았다 하며"라는 문장 구조로 보아 '중장터'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 역사상 '승시僧市' 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후 강동원의 '화순의 전설'(광일문화사, 1982년)에서는 좀 더 다양한 내용이 등장한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편집에디터2020.08.13 17:081. 운주사 미완성 석불좌상과 입상(일명 와불, 사진 황호균) 천불천탑 깎고 다듬고 운반하여 세우고 서쪽 산 중턱에는 불상을 제작하기 위해 채석한 흔적이 10여 군데 보인다. 그 가운데 칠성석에서 와불 쪽으로 가는 사이의 암반에 그 흔적이 가장 뚜렷하다. 여기에 전체 길이 560㎝, 현재 너비 140㎝의 돌감을 캐간 듯 패인 흔적이 보인다. 머리와 어깨로 이어지는 연결 부분과 반듯하게 쭉 뻗는 하체 부분 등을 고려해 볼 때 대형 석불입상의 돌감을 떼어낸 흔적으로 판명되었다. 운주사의 모든 석불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형 좌상을 제외한 대부분의 입상은 앞면과 네 방향의 옆면만 조각하고 다듬어졌을 뿐 뒷면은 옷주름을 조각하거나 심지어는 다듬어지지도 않았다. 이러한 특이한 현상과 속칭 와불과 시위불, 채석장의 대형 석불입상 채석자리, 석불입상 형태의 원석 등을 주목하면서 언젠가는 석...
편집에디터2020.07.30 13:381.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불우조 운주사 기사 다중이용시설 야외 예배 전용 공간 운주사 천불천탑은 그냥 아무렇게나 무질서하게 여기저기에 세운 것만은 아니다. 주변 지형을 최대한 고려하고 불상과 탑을 함께 예배하려는 듯한 설계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전통적인 가람 배치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운주사 천불천탑들은 어쩌면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을 한국식으로 변형해서 수용한 결과로도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골짜기 안에 펼쳐지는 탑과 불상의 배치 방식을 유심히 살펴보면 수도하는 기능보다는 부처님의 무덤인 탑과 부처님의 몸인 불상에 예배하는 기능을 매우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설계된 점이 눈에 띈다. 골짜기 초입 옛 건물터에 자리한 목조기와 건축물은 수도와 거주 기능이 위주이고 골짜기 안에 배치된 돌탑과 돌부처들은 예배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방성에 ...
편집에디터2020.07.16 12:441. 운주사 절터와 골쩌기 원경(사진 황호균) 운주사 출토 범자 진언 막새는 티베트 후기밀교의 산물 운주사의 수수께끼는 어쩌면 석탑이나 석불에서 보다 절터에서 출토된 범자 진언 암・수막새에서 찾아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운주사에서 출토된 범자 기와는 '옴마니반메훔' 육자진언과 '옴파람' 종자진언이 표현된 암・수막새이다. '육자진언'은 관세음보살 본심미묘진언의 상징문양이 아니라 중앙에 흐리히(hrih)자가 없는 육자대명왕진언의 표현방식을 나타낸다. '종자진언'인 옴파람은 옴마니와 더불어 당시 진언공덕신앙의 한 면을 보여주는 주술어이다. 범자 암・수막새는 밀교 성격의 티베트불교에 사상적 기반을 둔 진언眞言임과 동시에 티베트 지역에서 성행한 주어呪語이다. 이러한 '범자 진언' 기와의 등장은 티베트 후기밀교後期密敎가 성행한 원나라 불교의 직접적인 영향(원의간섭기:1270년~1356년)...
편집에디터2020.07.02 13:071. 석조불감과 남북에 놓인 쌍탑 풍경(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4년 촬영) 학계의 연구 현황 도선의 풍수도참설風水圖讖說을 계승한 승려가 '산천비보진압설山川裨補聳員壓說'의 이론적 배경으로 현종대 이후인 고려 초기에 운주사를 창건했다거나 고려 중후기에 천불신앙을 바탕으로 이른바 천불이 조성되고 대승불교 경전인 화엄경과 밀접하게 결부된 불탑신앙에 근거해 천탑이 만들어졌으며 칠성석의 신앙적 배경인 칠성신앙도 밀교신앙의 한 형태라는 견해는 차라리 일반적인 해석에 가깝다. 석탑 탑신부의 문양에 착안하여 해석을 시도한 몇 편의 글들이 눈길을 끈다. 의상의 법성게정진도法性偈精進圖에 기원을 둔 십파라밀정진도十波羅密精進圖가 밀교화·주술화되어 나타나는 이른바 화엄과 밀교의 결합으로 파악하는 새로운 견해가 등장하였다. 원나라 군부가 고려 백성...
편집에디터2020.06.18 13:301. 운주사 "가" 석불군 전경(사진 운영녀) 신라 경대왕대의 중국 모방정책 우리는 석굴암의 본존불 앞에 서면 인류 최고의 조각예술품으로 감탄에 감탄을 더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경덕왕대의 사회상이 떠올라 찜찜해진다. 그 당시 경덕왕은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탓에 주변 신하들이 왕 흔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여기에 불안을 느낀 왕이 중국의 위세(威勢)를 동원하려 한 것이 이른바 漢化政策인 것이다. 토착적인 관직의 명칭이나 주·군·현의 지명을 우아한-말에 폐단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 당시 지식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한자 어휘나 중국식으로 바꾼다든지 하는 중국 모방 정책 속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이 이루어졌다. 요사이 걸핏하면 미국의 힘을 동원하려는 정치인들이나 미국말 하나 지껄이지 못하면 병신 축에 들게 만들어버린 美化政策(미국모방정책)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말이다....
편집에디터2020.06.04 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