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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었다. 며칠 밤낮 동굴에 몸을 숨겼다가 연두색 바람이 시작하는 날에야 간신히 동굴을 나왔다. 동굴 안의 그이를 불러낸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나서였다. 연푸른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새로 난 일곱 색깔 바람들이 엉키기 시작했다. 애무하는 것인지 밀어내는 것인지 난무(亂舞)의 행로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바람에게 색깔을 입힐 수 있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이런 서술이 가능하리라. 어디 바람뿐이랴. 하늘에서 내리는 빛이야말로 사실은 색깔 자체 아니던가? 빛의 삼원색에서 색의 삼원색이...
2025.02.06 17:15북소리 둥둥 징소리 꽝꽝/ 장구는 동당동당 각(角)은 뛰~뛰/ 깃발은 펄럭펄럭 춤은 사뿐사뿐/ 짐승 얼굴 사납고 호랑이 모자 드높네/ 집뜰 우물 부엌에서 우렛소리 땅을 울리며/ 나아갔다 물러났다 조수처럼 분주하네/ 문호(門戶)의 신령께 새로 치성을 더하니/ 숲과 시내 도깨비들 도망가기 바쁘네/ 종규(鍾馗)가 눈동자를 움켜쥐고 서서 먹고/ 피를 뿜어 불 만들어 온몸을 태우네/ 귀신도 간 있다면 떨어지고 말았을 터/ 살려달라 애걸하며 머리를 조아리다/ 후다닥 정신없이 문밖으로 도망쳤나/ 천지가 말끔하고 달과 별이 찬란하네/ 징을 치고 ...
2025.01.30 18:23을사년을 푸른뱀의 해라고 하니 푸른색이 어쩌고 뱀이 어쩌고 호들갑을 떨었다. 예외 없이 질문이 들어온다. 그거 음력 설날 기점 아닌가? 맞다. 갑오개혁 이후 태양력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니, 본래 음력 설날이 육십갑자 구성의 기점 아닌가 말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2025년 시작되던 날 본 칼럼을 통해서 을사년과 뱀의 의미를 말한 바 있다. 설날이라는 기점이 동짓날, 양력 설날, 음력 설날, 입춘, 심지어 삼월삼짇날까지 변화해 왔다. 설날이 고정되어 있던 게 아니다. 물론 오랫동안 음력을 사용해 왔으니 그...
2025.01.23 17:52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체포하는 것으로 응원봉 혁명이 일단락됐다.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성명을 발표해 우리를 지지했다. “미국은 한국 국민에 대한 지지를 확고히 한다. 법의 지배에 대한 우리 공동의 약속을 재확인하고, 한국과 한국 국민이 헌법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기울인 모든 노력에 감사한다.” 윤 수괴의 계엄령 선포와 의회의 해제 가결 이후 헌법적 절차대로 꾸준하게 진행되는 민주 질서 회복에 대한 지지 성명이다. 미국뿐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모토 삼는 세계의 여러 나라가 이른바 응원봉 혁명의 과정을 생중계하듯 지...
2025.01.16 18:202024년 12월3일 오후 11시, 대통령 윤석열에 의해 위헌·위법한 계엄이 선포됐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10월 유신 이후 52년 만에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이자 내란이었다. 다행히 국회의 계엄해제 가결로 일단의 수습을 했지만, 온 국민 모두 가슴을 쓸어내린 시간이었다. 계엄해제에 대해 여러 분석이 있다. 그중에서도 발 빠르게 대처했던 국민들의 마음이 핵심이라는 게 중론이다. 전남대 박구용 교수는 이를 학습된 효과라고 말한다. 동학으로부터 5·18에 이르는 시민들의 학습과 경험이 일촉즉발의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2025.01.09 18:05육십갑자로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은 음력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굳이 따질 필요 없다. 양력이 보편화됐기 때문이다. 설날이라는 기점이 동짓날, 양력 설날, 음력 설날, 입춘, 심지어 삼월삼짇날까지 변화해 왔음을 상기한다. 동짓날이 고대의 설날이었다는 점은 팥죽 한 그릇 먹어야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관념을 통해 알 수 있다. 나는 고대 마한의 설날이 씨뿌리는 오월 며칟날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설날이 4월의 송끄란(물 축제하는 날)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무엇이 시작이고 무엇이 마무리인지, ...
2025.01.02 18:19어느 자리에서 목포대 강봉룡 교수가 ‘역사도 문학이다’라고 언명한 데 대해 나는 이렇게 호응했다. ‘문학도 역사다.’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답한다. ‘갯돌도 역사다. 피 터지는 목청으로, 울부짖는 몸부림으로, 마치 해마다 당산목에 새로 감기는 왼새끼줄처럼 비틀고 꼬아서 맨땅에 써 온 남도의 역사다.’ 10여년 전 마당극패 ‘갯돌 30년사’의 헌사(獻辭)를 이렇게 시작했더랬다. 그로부터 다시 한 순(旬)을 넘긴 모양이다. 지난해 ‘갯돌 40년 대본집’이 출판돼 나왔다. 대전의 ‘우금치’, 광주의 ‘신명’, 부산의 ‘자갈치’, 진주의...
2024.12.26 17:05지난 동짓달 그믐, 국립남도국악원에서 큰 잔치가 열렸다. 진도학회 창립 4반세기 기념 국제학술난장, 학회 설립을 주도했던 이토아비토 교수와 전경수 교수 두 석학이 진도군수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이토아비토 동경대 명예교수, 2024년 올해까지 53년째 한 해도 거스르지 않고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를 찾았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곳을 촬영하고 기록했다. 그래서 나는 이 학술난장을 기획하며 ‘어느 외국인이 사랑한 진도사랑 반백 년’이라는 카피를 썼다. 한국과 진도 관련 저술이 많지만 그중에서 이번에 번역되어 나오는 ‘문화인류학자의 한...
2024.12.19 16:44지난 2023년 5월 6일~7일 김지하 시인 추모 1주기에 열린 기념 학술회의 자료가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채희완 교수의 발제를 받아 토론한 졸고도 함께 실렸다. 석학들과 함께 할 수 있어 큰 영광이다. 내 토론의 일부를 여기 오려 붙여 출판을 기념한다. 목포 나들목 건너편에 용당리가 있다. 김지하의 초기 시, 어쩌면 그의 생애 첫 번째 시상이었을지도 모를 ‘용당리에서’를 떠올린다. 김선태가 쓴 ‘김지하의 첫 시집 황토와 목포’에 의하면, 4·19혁명 참가 후 고향 목포로 숨어들어 항만과 도로공사판 인부로 일하며 도피 생활을 하던 ...
2024.12.12 18:08흙이 숨을 쉰다. 인간은 죽어서 흙이 된다. 죽어서 흙이 된 인간은 흙의 숨을 쉰다. 지난 진도학회 25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부대 행사로 열린 김대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흙의 숨, 진도 이야기’의 카피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밭 한가운데에 무덤구덩이를 파고 사람이 드러눕는 장면이다. 흙과 이산화탄소를 다룬 과학 다큐멘터리 영화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가 더 많이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인문 다큐멘터리다. 깊게 판 구덩이에 들어가 누우면 어떤 느낌일까? 웅덩이의 크기만큼 시야가 좁아지니 신경이 한곳에 모일 수...
2024.12.05 17:23고문헌으로만 접하였던 마한의 소도(蘇塗)를 실제 확인하였다. 지난 6월 1차 보고 때만 하더라도 거칠마 토성이었고 그 안에 있는 제단이 발굴되었다고 했다. 이제 토성이 아니라 마한 소도로 바꾸어야 한다. 그간 발굴되지 않았던 환구(環溝) 및 기둥을 세웠던 구멍들이 마치 집터를 이룬 것처럼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소도의 텃자리를 찾은 최초의 사건이다. 나는 거칠마유적 발굴조사가 시작된 이래 국민대 변남주 교수와 함께 두 차례 현지답사를 실시하였고 자문을 하였다. 변교수와 여러 번의 토론을 거치면서 생각을 정리하였다. 나는 왜 해남 거칠...
2024.11.28 16:21현재 판소리 장단은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세마치, 엇모리, 휘모리, 엇중모리 정도가 사용된다. 판소리의 장단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신재효(1812~1884)의 에는 진양조와 중머리의 두 가지 장단이 등장할 뿐이다. 현존하는 창본 중 장단 명칭이 사용된 것 가운데 가장 시기가 오래된 허흥식 소장 창본에는 진양, 중머리, 엇모리, 우조, 평장단, 진장단, 세마치, 삼궁져비, 삼궁졔, 후탄 등이 사용되고 있다. 현재 사용하지 않는 장단 명칭들이 보인다. 1920년대 에 연재되었던 심정순의 창본이나 이선유의 (193...
2024.11.21 17:58경남 거창 수승대 발효마을에서 열린 제2회 장문화축제 포럼에서 나는 남도의 장광을 음악에 비유해 발효의 아우라를 발표한 바 있다. 살림집이 하나의 음악이라면,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의 연주라고 한다면, 몸채와 사랑채와 안뜰과 뒤뜰과 외양간과 곳간과 그리고 장광이 연주하는 리듬과 장단과 혹은 색깔들을 상상해봤다고나 할까. 축하 공연을 했던 임동창과 그 그룹들이 펼친 팔도 아리랑을 겨냥한 대목이었는데 실제 그들과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장독대 아리랑 등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풀어보기로 한다. 그저 오...
2024.11.14 18:07일군의 아이들이 연주하는 악기 소리가 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거문고 소리 같기도 하고 가야금 소리 같기도 하였다. 혹은 이 둘을 합쳐놓은 듯한 음색이랄까. 아직 숙달되지 않은 솜씨지만 한 줄 한 줄 뜯고 튕기는 소리를 따라가노라니 2천 년 전 마한의 어느 도읍에 도달한 듯하였다. 눈을 지그시 감으니 작은북과 토용들을 매단 대형 솟대가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역죄인들이 도망을 와도 잡아가지 못한다는 신성한 공간, 바로 소도(蘇塗)였다. 지금의 광주 신창동, 당시 영산 바다 갯가에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
2024.11.07 17:41“이 서사시 장르의 레퍼토리는 슬픈·평화로운·장난스러운·극적인 장면들이 교차하는 우회적인 이야기로 구성되며, 때때로 소리꾼이 몸짓 연기를 하며 공연한다. 소리꾼의 옆에서는 온몸으로 세계를 맞이하는 ‘고수’와 그의 소리북이 전 우주의 리듬을 바꾸어 놓는다. 줄거리가 펼쳐지는 이동식 무대 ‘마당’이라는 물리적 한계 안에서 공연되는 ‘판소리’는 그 자체로 특정한 표현 ‘공간’을 구성한다. 기후 변화 시대의 예술가들이 공간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전시를 만들고자 하던 중 예기치 못하게 맞닥뜨린 ‘판소리’, 이 한국 민속의 한 분야는 오늘날...
2024.10.31 1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