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일 ‘전환시대 농촌의 길’ 표지. |
![]() 둠벙. 담양인신문 김관석 기자 촬영 |
둠벙은 웅덩이의 전라도·충청도 방언이다. 못 따위의 작은 저수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둠벙보다 약간 큰 것을 포강이라 하고 더 큰 것을 저수지라 한다. 논농사를 위해 인위적으로 파기도 하지만 자연상태의 웅덩이도 있다. 생물 다양성의 보고다. 마을 공동체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생태자원이다. 자연생태만이 아니라 두레 공동체나 계모임 등 전통적인 문화 적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생태적 순환과 조화를 이루는 마을,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공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도식하자면 ‘자연-사람-공동체의 균형’이다. 이를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해 보면 첫째, 생태공동체로서의 농촌 지향, 둘째, 자치와 순환의 공간, 셋째, 지속 가능한 관계망 형성 등이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마하트마 간디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간디가 선호했던 마을 자치 즉 그람 스와라지는 판차야트라는 정치 체제와 연동한다. 각 마을이 자신의 일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분권화된 정부를 말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게 판차야트 라지, 완전한 정치권력을 가진 비폭력적이고 자족적인 경제 단위로서의 마을 스와라지이다. 간디의 저서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녹색평론사, 2006)의 서문에서 H.M. 비야스는 이렇게 말한다. “간디지가 생각한 마을 스와라지의 모습은 옛날의 마을 판차야트를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세계의 상호관계 안에서 독립적인 마을 단위인 스와라지를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다. 마을 스와라지는 정치학·경제학·사회학 분야에서 비폭력의 실제적 구현이다.” 이를 위해 반드시 인도의 조건과 전통에 기초를 둬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상일의 둠벙마을을 간디의 스와라지에 대입해 보고 싶은 것은 지향하는 가치와 방법 등이 서로 긴밀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조건과 전통에 기초를 둔 둠벙 생태와 주민자치를 강조하면서 관계인구의 시대적 의미를 끌어내고, 가족 중·소농을 지향하면서 현장 중심 직거래 플랫폼을 설계하는 등이 그것이다. 몇 개의 소제목들만 나열해도 의중이 읽힌다. 중앙정치 덫에 걸린 자치분권, 지방소멸론의 불편한 진실, 분별없는 광역통합과 메가시티는 농촌소멸을 부채질한다, 마을이 살아야 공동체가 살고 농촌이 산다, 둠벙마을 생태계 만들기, 관계인구 쪽으로 부는 시대 바람, 관계인구는 꿰어야 보배다, 농촌향기의 터무니를 찾자, 농촌 어메니티는 관계인구의 보물창고다, 이제는 가치농업이다 등 저자의 평생 화두가 절절하다. 한마디로 ‘전환시대 농촌의 길’은 간디의 그람 스와라지처럼 둠벙마을이라는 새 개념을 내세워 농촌의 생태적 가치와 공동체적 삶을 새롭게 조명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농촌을 단지 ‘살던 어떤 공간’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생태적 미래공동체로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인도에 간디가 있어 스와라지 운동이 세계적 명성을 얻었듯이, 한국의 박상일이 제창하는 둠벙마을 운동이 기후위기 시대의 농촌 및 미래공동체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남도인문학팁
둠벙의 가치, 문명전환시대의 마중물이 되기를
이 책이 나오기까지 코멘트 한 다섯 사람 중에 내가 끼게 되어 영광이다. 책에 수록된 나의 곁든 글을 옮겨두어 팁에 갈음한다. 우리 집 서마지기 아홉 배미 산전 옹타리에 둠벙이 있었다. 봄 가뭄이 심한 한반도 기후에 적응해 온 지혜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아버지가 마련해 놓으신 유산이라는 점에서 귀한 공간이다. 내가 아끼던 고 김병철 진도군 지산면 소포마을 이장은 계단논 배미마다 각각 1/10의 면적을 할애해 둠벙을 파고 연꽃을 심었다. 정화된 물이 아랫논으로 흘러 맨 마지막 논의 물은 농사 끝나고도 식수로 활용할 수 있다는 생태 농법이었다. 이 물이 장차 강과 바다로 흘러야 땅도 살고 물도 살고 사람과 숨 쉬는 모든 것들이 살 수 있다는 철학의 실천이었다. 광주시 지정 악기장 이준수씨는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만들 나무판을 마을의 오수 둠벙에 일정 기간 담가둔다. 최고의 악기를 만드는 비법 중의 하나이기도 한데, 뻘흙과 나무의 호흡이 상호 교섭해 공명의 질을 결정한다는 과학적 방식이기도 하다. 마을마다 동구 밖이나 어귀에 이런 둠벙들이 있었던 것은 수천 년 수만 년 이어온 우리네 공동체의 생태 기술이자 과학이었다. 기후위기에 봉착한 인류가 이제야 그린카본이니 블루카본이니 호들갑을 떠는 것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 산업사회의 개발 폭증으로 함께 사는 지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상일 대표가 내놓은 이 책이 무엇보다 귀한 것은, 하찮다고 여겨 메워버렸던 둠벙에서 지혜를 찾고 이를 관계인구와 가치농업으로 잇고 있다는 점에 있다. 둠벙 마을과 가치농업이라는 개념을 창안하고 몸소 실천해 온 것은 농어촌뿐만 아니라 우리네 공동체의 주민자치를 보다 근원적인 생태계로 복원하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다. 농민운동가, 농촌혁신운동가, 가치농업운동가 등 그에게 수여된 많은 이름이 이를 말해준다. 발로 뛰고 몸으로 실천하여 얻어 낸 현장의 이론이자 실현 가능한 방법론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의미가 웅숭깊다. 내가 늘 박상일 대표께 배우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 전공 분야로 바꾸어 말하자면 도깨비들의 서식처를 살리는 문화실천가라고나 할까. 도깨비들이 사는 곳이 사실은 둠벙과 늪과 마을 숲과 갯벌이다. 왜 우리네 선조들은 둠벙 등의 생태 공간에 도깨비 이야기들을 투사해 길이 전승했을까? 우리가 하찮다고 여겨 지워버렸던 우리네 공동체의 마음이 여기 있음을 알아차릴 때,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의 비중을 비로소 실감하게 될 것이다. 악기의 진솔한 울림을 위해 오수 둠벙에 나무판을 담그듯, 땅도 살리고 사람도 살리는 물을 위해 논배미마다 둠벙을 파듯, 이 책의 둠벙에 마음을 담가 장차 이를 문명 전환 시대의 공명(共鳴) 곧 더불어 울림을 꾀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