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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몸과 맘… 스킨십은 연결이고 신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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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몸과 맘… 스킨십은 연결이고 신뢰다

ᄆᆞᆷ톨로지
"몸의 병과 맘의 병을 요가나 명상으로
치유하려는 수많은 사례를 본다.
한편으로는 옳다. 하지만 사람 자체가
관계의 동물이라는 점에서 부족하다"
"접촉은 서로를 연결하고, 가깝게 한다.
항상 친밀감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접촉의 몸짓이 공동체 감정을 매개한다"

게재 2022-08-04 15:16:39
2003년 덴마크 스톡홀룸 광장, 진도강강술래. 이윤선
2003년 덴마크 스톡홀룸 광장, 진도강강술래. 이윤선

"너를 어쩜 좋니/ 촉촉한 코를 내 얼굴에 대고/ 폭폭폭 숨을 쉬며 자는 너를(중략)/ 내가 뭐라고/ 나 같은 게 뭐라고/ 자그마한 생 전체를 맡겨두고/ 온몸으로 말을 걸어오는 너" 이토록 다정한 연인이라니. 대체 누구이길래 몸을 던져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 맘을 던져 사랑하는 것일까? 그것도 오로지 화자 한 사람만을 말이다. 이런 사랑이라면 사람의 삶이 어떤 한순간인들 무슨 상관있으랴. 그 순간을 영원처럼 살면 되는 것을. 하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 얘기가 아니다.

한건희의 '고양이는 서른 살, 개는 세 살'(부크크)에 나오는 시다.

사람이었으면 더욱 좋을 뻔했으려나? 반려동물과의 이런 관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깊고 넓다. 식용이 일반적이었던 복날 풍습의 정서와는 격세지감이다. 급류에 휩쓸린 차 안에서, 개를 먼저 구해달라며 구조에 응하지 않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애완견이 죽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미혼여성 이야기도 나온다. 펫로스 증후군(Pet Loss Syndrome), 일종의 마음 앓이 후유증이다. 반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주요한 원인이라나. 실제로 부모나 형제, 가까운 친구가 죽어도 그만큼 슬프지 않다. 그만큼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왜 그럴까? 다양한 분석들이 난무한다. '주인 바라기'적 특성을 주로 거론한다. 주인을 위한, 주인에 의한, 주인만의 삶을 살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여야 할 특성이 있다. 접촉과 스킨십이다. 반려견과 매일 같이 생활하고 산책하고 밥 먹고 놀고 잠을 잔다. 늘 호흡하고 살을 부대끼니 어찌 정이 들지 않겠나. 사람들과 부대꼈던 자리에 반려동물이 들어와 버린 것이지. 이게 어디 몸의 문제에만 국한되겠는가. 그렇다. 접촉과 스킨십은 몸의 일이지만 작용은 맘의 일이다.

동의보감 신형장부도
동의보감 신형장부도

접촉의 서사, 스킨십의 알고리즘

내 어렸을 때, 동네 할머니들이 아이들 '꼬추'를 만지는 것은 그저 평범하고 익숙한 일이었다. "우리 큰놈 꼬추 한번 따 먹어보자"라며 연신 내 사타구니를 쓸어올리시곤 "아따 그놈 실하고 맛있다"라며 연신 입맛을 다시지 않았나.

할머니들에게 수십 번 꼬추를 '따먹히고서야' 우리는 어린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두엄에 오줌을 누고 나서 꼬추가 빨갛게 부어오르면 누나가 빨아주어 낫곤 했다. 도농간 차이는 있겠지만 베이비부머 세대까지의 유년은 대체로 이런 풍경에 익숙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아이들 머리에 손만 올려도 성폭행으로 고발당하거나 비난을 받는다. 세상이 너무 삭막하고 험악해졌다. 성적인 문제들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접촉과 스킨십의 순기능을 말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 반려동물들과의 교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도 이유가 있다. 접촉이 그만큼 중요하다. 스킨십이 가진 무한한 기능을 다 열거하기 어렵다. 엄마와 아이의 스킨십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베르너 바르덴스는 '접촉'(황소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삶의 모든 단계에서 인간은 접촉에 의지한다. 피부 접촉은 근본적인 욕구이므로 우리는 항상 그 욕구를 만족시켜야 한다. 엄밀히 말해 접촉이 없다면 우리는 생존할 수가 없다. 관심과 애정을 충분히 받지 못한 신생아와 어린아이는 쇠약해진다. 접촉이 없으면 긴밀하고 신뢰할 만한 연대감이 사라진다. 신생아와 어린아이의 경우 만져주지 않으면 신체 발육이 떨어지며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면역력이 약해져 병에 쉽게 걸린다. 접촉 자극이 면역계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부닥친 몸의 병과 맘의 병을 요가나 명상 등으로 치유하려는 수많은 사례를 본다. 옳은 방향일까? 물론 한편으로는 옳다. 하지만 사람 자체가 관계의 동물이라는 점에서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어떤 게 더 필요할까?

17세기경 그려진 중국 내경도
17세기경 그려진 중국 내경도

몸의 수렴과 확장, ᄆᆞᆷ톨로지

몸은 맘을 담는 하드웨어이고 맘은 몸을 경영하는 소프트웨어다. 컴퓨터가 올곧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양자가 잘 조화되어야 한다. 선택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요조건이다. 양자를 합한 것을 컴퓨터라 한다.

'동의보감' 첫장 「내경편」의 「신형장부도」는 이제 익숙한 그림이 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림을 보면 장기들의 이름 외에도 니환궁, 수해뇌, 옥침관, 녹로관 따위의 이름이 나온다. 몸을 몸으로만 여기지 않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투사했다는 뜻이다. 신체 장기의 이름들이 도로나 하천 등 지리 공간의 이름들과 유사한 것은 사람의 몸을 작게는 마을에서 지구별로 또 우주로 확장하거나 수렴해서 이해했다는 뜻이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인식하는 지구별이 하나의 몸이다. 인간을 소우주로 보는 관점이나 가이아(지구가 하나의 생명체) 이론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신심이 높은 무당들은 산허리가 잘렸거나 무너진 벼랑을 보면 마치 자신의 사지가 잘린 것처럼 슬픔을 느끼고 울부짖기도 한다. 지금이야 너무 오염되어버렸지만 이를 회복하고자 하는 실천행위가 '굿'의 본질이다. 고미숙은

'몸과 인문학'(북드라망)에서 "바보야, 문제는 몸이야!"라고 말한다. 몸만 떼어 얘기한 것 아니다. 맘도 더불어 얘기한 것이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황제내경'의 인체 인식도 천인상응(天人相應)이나 음양오행적 관념을 토대로 하고 있다. 17세기경 그려진 「내경도」를 보면 어린아이가 수차를 돌리고 농부가 밭을 갈며 기암괴석이 솟아있는 숲을 그려 인체를 설명한다. 자세한 설명은 따로 하겠다. 그래서 근자에 내가 제안해왔던 용어가 'ᄆᆞᆷ'이고 'ᄆᆞᆷ톨로지'다. 나는 이를 강강술래와 풍물(농악)을 통해 설명해나가고 있다. 관련한 단행본을 집필 중인데, 아직 출판사를 정하지 못했다. 베르너 바르덴스의 말을 다시 인용해둔다. "접촉은 서로를 연결하고, 둘 사이를 가깝게 한다. 서로 잡고있는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런 행위에서 항상 친밀감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접촉하려는 몸짓 자체가 공동체 감정을 매개한다. 대다수 나라에는 원형으로 서서 손을 잡는 풍습이 퍼져있다. 이 풍습은 공동체의 보편적 의식으로 간주 되고, 무언가를 함께 이루어낼 수 있는 에너지와 감정을 증폭시킨다."

남도인문학팁

'ᄆᆞᆷ톨로지'란 무엇인가

'ᄆᆞᆷ'은 '몸'과 '맘'의 합성어다. 현재 우리말 아래아가 잔존하는 곳은 제주밖에 없다. 정신없이 변하는 언어 세계에서 이런 고대어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다. 이 용어는 몸과 맘의 복합적 혹은 중층적 개념을 지닌 호명일 수밖에 없다. 마치 '맛'과 '멋'이 'ᄆᆞᆺ'인 것과 같다. 이 또한 따로 풀어서 설명할 시간을 갖겠다. 비유하자면 '넋'은 '혼(魂)'과 '백(魄)'으로 구성되는데 'ᄆᆞᆷ'은 백(魄)에 가까운 것이다. 이를 운영하는 살림살이, 예컨대 소프트웨어를 구동하는 알고리즘을 나는 'ᄆᆞᆷ톨로지'라는 용어로 정리했다. 온톨로지(Ontology)에서 따온 말이다. 주지하듯이 온톨로지는 사람들이 세상에 대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서로 간의 토론을 통해 합의한 바를 컴퓨터에서 다룰 수 있는 형태로 표현한 모델이자 개념이다. 메타데이터 세트 혹은 메타데이터 요소 간의 호환성을 온톨로지로 유지시킨다. 'ᄆᆞᆷ톨로지'는 몸과 맘을 마치 컴퓨터처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이해하고 이를 운영하고 구동시키는 알고리즘 삼아 제안한 용어다. 혼백으로 이루어진 넋 등의 개념보다는 젊은이들이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용어라는 점 강조해두니 무림 고수들의 질정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