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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 천문점성술로 고려 초기 왕실 지켜낸 최지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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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 천문점성술로 고려 초기 왕실 지켜낸 최지몽

왕건의 삼한 통일을 예언한 최지몽
元甫 최상흔 아들로 영암에서 출생
경서·사서 섭렵, 천문·복서에 뛰어나
63년간 여섯 임금 섬기며 관직 생활
시해 위기 처한 혜종 목숨 구하기도
영암 군서면에 건립된 국암사에 배향

게재 2022-07-13 15:37:22
최지몽을 모신 사당, 국암사(영암 서구림리)
최지몽을 모신 사당, 국암사(영암 서구림리)
최지몽 위패(국암사 안)
최지몽 위패(국암사 안)
고려태사 민휴공 최지몽 유허비(영암 동구림리)
고려태사 민휴공 최지몽 유허비(영암 동구림리)

천문·복서에 정통

고려 태조 왕건의 꿈 해몽으로 유명한 최지몽(崔知夢, 907∼987)은 효공왕 11년(907), 전남 영암에서 원보(元甫) 최상흔의 아들로 태어난다. 영암 출신인 풍수의 대가 도선국사가 입적한 8년 후다. 지몽의 어렸을 때의 이름은 총진(聰進)이었다.

지몽의 가문이 어떠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부친의 품계가 원보인 것을 보면 영암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호족 집안으로 추정된다. 원보란 고려 초 건국 유공자 및 지방호족에게 주던 벼슬의 등급인데, 4품 하계(下階)로 16관계 중 제8위에 해당한다. 문종 30년(1076)에 제정된 경정전시과 규정을 보면 원보는 제13과에 속하여 전(田) 35결과 시(柴) 8결을 받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삼한 통일을 예언한 최지몽, 그는 2006년 방영된 사극 '태조 왕건'에서 시청자의 큰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최지몽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최지몽이 어떤 분인지는 『고려사』 '최지몽' 열전이나 『고려사절요』의 '졸기'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려사』는 최지몽을 "성품이 청렴하고 인자하였으며,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대광 현일에게 배워 경서와 사서를 두루 섭렵하였고, 특히 천문(天文)·복서(卜筮)에 정통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고려사절요』는 "성품이 청렴·검소하고 자애롭고 온화하였으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서와 사서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특히 천문과 복서에 뛰어났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최지몽은 두 사서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성품이 청렴하고 인자하였으며 경서와 사서를 모두 섭렵한 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주특기는 두 사서에 똑같이 언급하고 있듯이 천문과 복서(卜筮, 길흉을 점침)였다. 천문과 복서, 즉 별자리를 통해 길흉을 점치는 천문점성술은 그가 태조 왕건에서 발탁된 이유였고, 63년간 여섯 임금을 섬기면서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천문점성술로 고려 초기 왕실 수호

최지몽이 태조 왕건의 부름을 받은 것은 18세였다. 왕건은 총진에게 자신이 꾼 꿈을 점치게 하였고, 총진이 '삼한을 통솔할 꿈'이라고 대답(해몽)하자, 기뻐 이름을 지몽(知夢)으로 바꾸어 준다. 비단옷을 내리고 공봉(供奉)이라는 직책까지 제수한다. 왕건의 정벌에 동행하여 곁을 지켰으며, 왕건이 즉위한 이후에는 궁궐에 들어가 태조의 고문이 된다. 꿈 해몽 하나로 왕건의 신임을 받아 벼락 출세한 셈이다. 당시 왕건이 꾼 꿈이 어떤 꿈이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고려 2대 왕이 혜종(惠宗)이다. 혜종은 외가가 나주였고, 모친이 장화왕후이며 외할아버지가 나주 호족 오다련이었다. 혜종의 외가 세력은 미미했다. 혜종이 늘 왕권을 위협하는 도전에 직면해야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 혜종을 지킨 분도 최지몽이었다.

혜종의 가장 강력한 도전자는 두 딸을 태조의 15비와 16비로 보낸 광주(廣州)의 호족 왕규였다. 왕규는 광주의 호족 세력을 기반으로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 대광(大匡, 종1품)에 오르고 재신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16비인 소광주원부인에게는 왕자 광주원군이 있었다. 왕규는 이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려는 야욕을 품은 인물이었다.

왕규는 드러내놓고 두 번이나 혜종 시해를 도모하였다. 혜종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혜종이 병이 나 신덕전에 있을 때 왕규가 직접 왕의 침소로 쳐들어가 죽일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때 사천대(司天臺, 고려 때 천문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에 근무하던 최지몽이 점을 쳤는데, 왕에게 변이 생길 괘가 나온다. 지몽은 혜종에게 은밀히 중광전으로 거처를 옮기게 했다. 그날 밤 왕규가 일당을 이끌고 신덕전을 습격했지만, 혜종은 이미 피신한 뒤였으므로 허탕을 친다. 지몽이 혜종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2년 만에 혜종이 죽자 태조의 둘째 아들 요(堯)가 왕위에 오른다. 이가 고려 제 3대 왕인 정종이다. 정종은 최지몽이 왕규의 전왕(혜종)에 대한 위해를 사전에 알아내어 왕을 보위한 공을 인정, 노비와 은으로 장식한 안장을 얹은 말과 은그릇을 내려준다.

지몽이 역모를 예견하는 점을 쳐 고려를 구한 것은 경종대에도 이어진다. 『고려사절요』 경종 5년(980)조에 나오는 "최지몽이 역모를 예견하여 관작을 올려주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당시 최지몽이 "객성(客星)이 제좌(帝座)를 범하였으니 왕께서는 숙위군을 거듭 경계하시어 뜻밖에 닥칠 사태에 대비하십시오"라고 말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왕승 등의 반역 음모가 적발된다. 경종은 자신을 지켜 준 지몽에게 어의(御衣)와 금 허리띠를 내린다.

경종의 사당에 배향

정종의 뒤를 이어 태조의 셋째아들 소(昭)가 왕위에 오른다. 그가 고려 제4대 임금 광종이다. 광종은 혜종·정종과는 달리 왕권 강화를 위해 개국공신과 재상 등 권문세족과 지방의 호족 세력 등 왕권에 방해되는 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지몽은 권문세족은 아니었지만 태조의 공신으로 혜종·정종대까지 3대를 섬겨온 중신이었다. 지몽도 자리 보전은 하고 있었지만, 좌불안석이었다. 그러던 차에 기어이 일이 터진다. 광종 21년(970), 지몽이 귀법사에 행차하는 왕을 호종하였는데 술에 취해 무례한 행동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외걸현에 유배된다. 무려 11년의 유배였다. 천문·복서에 능한 그였지만, 자신의 운명에는 장님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다시 조정의 부름은 받은 것은 경종 5년(980)이었다. 경종은 지몽을 대광 내의령 동래군후 식읍 1천호 주국(大匡 內議令 東萊郡侯 食邑一千戶 柱國)에 임명하였고, 은그릇과 비단 이불, 무소뿔 허리띠 등을 내려준다. 화려한 부활이었다. 그러나 경종의 치세는 6년으로 끝이나고 태조의 손자이자 경종의 사촌동생인 치(治)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고려 제6대 왕 성종이다.

성종은 자신의 정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지몽을 중용한다.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지몽을 좌집정 수내사령 상주국(左執政 守內史令 上柱國)에 임명하고, 홍문숭화치리공신(弘文崇化致理功臣)이라는 호(號)를 하사한다. 그의 부모도 작위를 받는다. 빛나는 말년이었다.

성종 3년(984), 78세가 된 최지몽은 네 번 사임을 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신 왕은 조회 참석을 면제해주고 내사방(內史房)에서 정사만 보게 하는 특전을 베푼다.

성종 6년(987), 그가 병이 나자 왕이 친히 문병하였으며, 의원에게 명령하여 약을 하사하고, 스님 3천 명에게 공양을 베풀며 지몽을 위해 기도하게 하는 등 정성을 쏟는다. 성종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그해 3월,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81세였다. 63년 동안 여섯 임금을 모신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성종은 지몽의 부음을 듣고 깊은 애도를 표한다. 부의로 베 1,000필, 쌀 300석, 보리 200석, 차 200각, 향 20근을 내린다. 장례도 국장으로 치르게 했다.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추증되었고, 태사(太師)가 추가 추증되었다. 민휴(敏休)의 시호를 받았으며, 성종 13년(994)에는 경종의 묘정(廟庭, 사당)에 배향된다. 고려 신하로서 최고의 대접을 받은 셈이다.

63년 동안 여섯 임금을 모신, 첨문점성술로 고려 초기 왕실을 지켜낸 최지몽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가 태어난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에는 1972년 낭주 최씨 문중에서 건립한 국암사(國巖祠)가 있다. 국암사에는 최지몽을 주벽으로, 고려가 멸망하자 은둔한 최안우, 구림대동계를 재 창건한 최진하, 정조 때 종2품 공조참판을 역임한 최몽안도 함께 모셔져 있다. 그리고 동구림리 왕인박사 유적지 안에는 2001년 건립된 '고려태사 민휴공 최지몽 유허비'도 서 있다.

최지몽, 그는 고려 최고의 천문학자였고, 첨문점성술로 고려 초기 왕실을 지켜냈으며, 63년 동안 여섯 임금을 섬긴 후 경종 사당에 배향된 인물이었다. 그가 63년 동안 여섯 임금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은 『고려사』 '최지몽' 열전에서 보듯 인자한 성품과 총명함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