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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항일운동의 성지, 해남 북평면 이진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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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항일운동의 성지, 해남 북평면 이진마을

군사·교통 요충지로 수군 萬戶鎭 설치
수군 재건중 발병한 이순신 곽란 치료
한말 심적암 전투치른 의병부대 결성지
‘전남운동협의회’ 결성해 항일운동 전개

게재 2022-06-15 16:01:40
이진마을 표지석
이진마을 표지석

항일운동의 성지, 이진마을

해남군 북평면에 위치한 이진마을은 완도군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마을 서쪽에는 달마산(470미터)이, 북쪽으로는 대흥사를 품은 두륜산이 보인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제주도와 내륙을 연결하는 포구로 이용되었다. 조선 후기 김정호가 만든 『대동지지』에는 "이진진(梨津鎭)은 한양에서 950리(약 37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성에는 해월루(海月樓)가 있다. 제주로 들어갈 사람은 모두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배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말과 함께 싣고 온 현무암이 지금도 이진마을에서 발견되고 있는 이유다.

제주도와 뭍을 연결하던 교통의 요지였던 이진마을은 한때 300호가 넘었다고 한다. 시골 마을 300호면 대단한 규모의 동네다. "북평면 면장할래? 이진마을 이장할래?"하면 이진마을 이장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다고 하니, 교역과 해산물을 통한 이진마을의 경제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진마을은 군사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선조 21년(1598) 이곳 이진에 진이 설치된 이유다. 인조 5년(1627)에는 종4품인 만호(萬戶)가 주둔하는 만호진으로 승격된다. 그리고 인조 26년(1648) 이진진성을 쌓는다. 성은 남쪽과 북쪽의 높은 구릉지를 이용해 쌓았고 중앙이 낮은 분지형으로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성안에 마을이 있는 것이다. 마을 안 서문 입구에 수군만호비가 서 있고 성벽과 옹성 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 마을 입구 북문에 남아 있는 옹성은 원형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당시 수군 만호가 머물던 해월루도 복원되어 있다. 해월루는 제주로 오가는 사신들의 객사로도 이용되었다.

이진마을은 군사와 교통의 요충지만은 아니었다. 정유재란 당시 토사곽란(급성위장병)이 난 이순신이 주민들의 노력으로 건강을 되찾은 곳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진마을은 한말 대흥사 심적암 전투를 치른 황준성 의병부대의 결성지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이진학원(일명 동광학원)과 김홍배 등이 중심이 된 전국 최대의 항일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의 거점이었다.

이진마을 만호비
이진마을 만호비

이순신을 살린 마을

칠천량 해전으로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박살나자 선조는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다시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이순신이 3도수군통제사를 임명받자마자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찾은 곳은 남도땅이었다. 구례, 곡성, 순천, 보성을 지나면서 식량을 얻고 군대를 모은다. 그리고 장흥 회령포(현 회진)에서 12척의 판옥선을 인계받고 군사들과 함께 죽기를 맹세한 이순신이 강진 마량을 거쳐 명량으로 가는 도중에 들른 곳이 이진이었다. 1597년 8월 20일(음력)로 명량대첩이 있기 불과 보름 전이었다.

오랜만에 배에 올라서인지 이순신은 머리가 심하게 아프고 구역질까지 하며 몸을 가누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난중일기』에는 "곽란이 나서 심하게 아팠다". "곽란이 심해 일어나 움직일 수도 없었다". "배에 머물 수가 없어 육지에 내렸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병세가 심해지자, 8월 23일 이순신은 배에서 내려 이진마을로 들어선다. 이순신 장군이 마을에 들어서자,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몸에 좋다는 것들을 가져와 이순신을 봉양했고, 그 덕분인지 몸이 거짓말처럼 나아진다. 이진마을 주민들이 이순신을 살린 것이다. 주민들의 도움으로 몸을 회복한 이순신이 나흘만인 24일 이진마을을 떠나 해남 어란포구에 이르렀고, 그리고 보름도 채 되지 않아 명량대첩(9.16)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항일운동의 성지, 해남 북평면 이진마을 전경.
항일운동의 성지, 해남 북평면 이진마을 전경.

황준성 연합의진 결성지

이진마을은 한말 의병활동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전국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1908~1909년의 의병활동은 전라도가 중심지였고, 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북평면 이진마을이었다.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인 전라도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한다. 소위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이라 불린 군사작전이 그것이다. 그 여파로 전라도 의병활동의 근거지는 남해안 지역으로 내려오게 되고, 마지막에는 해남 두륜산 일대가 중심지가 된다. 1909년 해남 두륜산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의병활동은 각기 독립적인 부대를 형성하여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진마을 출신인 황두일도 40여 명에 이르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09년 7월 7일, 황두일은 군대 해산 당시 참령(參領)으로 군대 해산에 반대한 후 의병을 일으켰다가 완도로 유배왔던 황준성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연합의진을 결성한다. 그 연합 의병의 결성 장소가 이진마을이었다.

황두일의 의병이 중심이 된 연합 의병은 7월 9일 새벽 두륜산 심적암에서 들이닥친 장흥수비대 요시하라(吉原) 토벌대에게 큰 패배를 당하고 만다. 밀정의 밀고 때문이었다. 최후까지 저항하던 황두일은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체포된다.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었던 전라도의병을 제압한 일제는 1910년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南韓暴徒大討伐記念寫眞帖)』을 발행하였는데, 당시 붙잡힌 의병장 16명의 사진이 '폭도거괴(暴徒巨魁)'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이 사진 속에 의병장 황두일도 포함되어 있어 최후까지 장렬하게 저항하였던 호남의병장 중 한 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남운동협의회의 태동지

이진마을의 항일운동은 1933년 결성된 전남운동협의회 활동으로 이어진다. 이진마을에서 예비모임 후 결성된 전남운동협의회는 농민조합을 결성하여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 단체로, 1930년대 최대 규모였다.

1933년 5월 이진마을 출신 김홍배를 중심으로 농민운동을 대중적으로 지도할 기관이 필요하다는 목적에 의해 조직이 결성되었고, 이후 해남군과 완도, 장흥, 강진, 진도, 목포, 보성, 순천, 여수 등 전라남도 9개 군에 걸쳐 조직된다. 해남에는 북평면과 산이면, 현산면에 각각 지부를 두고 있었다. 활동이 노출된 후 9개 군에서 500명이 넘는 관련자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고, 이 중 57명이 치안유지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송치되어 49명이 재판을 받았다. 당시 동아·조선일보도 호외를 발행하기도 하는 등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이를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이라 부른다.

이러한 전남운동협의회가 이진마을에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동광학원과 사회주의 운동가 김홍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5년, 이진마을 출신인 김대홍·강기동 등은 사설학원인 동광학원을 설립하여 완도의 항일운동가들을 강사로 초청, 이진마을과 북평면 지역 청년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동광학원을 중심으로 항일의식을 배워 나갔던 이진마을에 1932년 일본으로 유학갔던 김홍배가 돌아오면서, 마을 단위 농민이 중심이 된 상부조직으로 전남운동협의회가 결성된다. 김홍배는 이진마을의 지주 김행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1930년 경성 사립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 재학 중 노동절 선전 삐라 살포 사건으로 퇴학을 당한다. 그가 1932년 이진마을로 돌아온 이유다. 그리고 완도의 황동윤과 이기홍, 북평면 오산마을의 오문현 등과 함께 전남운동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49명 중 해남 출신은 김홍배 등 10명이다. 이중 이진마을 출신의 김아기·김암우·문둔동 등이 동광학원 출신이었고, 완도 출신인 차태희는 동광학원 교사였다. 동광학원이 항일독립운동의 핵심 창고였음을 알 수 있다.

김홍배를 포함, 재판받은 49명 중 5명이 이진마을 출신이다. 이는 한말 황두일 의병장과 더불어 이진마을을 항일운동의 성지라 부르는 근거다.

이진마을 청년들이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설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역사적으로 이진마을은 왜적을 막아 냈던 수군진이 있었던 곳, 이순신을 살려낸 곳이라는 자부심과 동광학원에서의 항일 교육, 한말 황준성 연합의진의 결성지라는 역사의식도 한몫했다고 생각된다.

이진마을이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조선중앙일보(1935년 7월 10일자)에 '해남 청년 노력으로 집단농장을 건설'이라는 제목을 단 다음의 기사 "전남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는 전남도에서도 좌익운동이 맹렬한 곳이며 재작년 노농협의회 검거 당시에도 50여 명의 청년을 검거한 일이 있었으며 아직도 예심에 다수 청년이 들어가 있는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마디로 좌익운동이 맹렬한 곳이며 노농협의회 사건으로 50여 명의 청년이 검거된 마을이라는 것이다. 한 마을에서 50여 명의 청년이 검거된 마을, 그 마을이 이진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