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60년 4월 19일, 광주는 학생들의 함성으로 가득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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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60년 4월 19일, 광주는 학생들의 함성으로 가득찼다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 광주서 최초로 열려||4월 19일 광주 시위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작||금남로·충장로 대대적 시위, 사망·부상자 발생||광주 시위 계기 목포 여수·순천 등 전남 확산||62년 광주공원에 ‘4·19 희생영령 추모비’ 건립
  • 입력 : 2022. 04.13(수) 17:16
  • 편집에디터

4.19 광주 학생 시위 최대 격전지인 광주경찰서(현 동부경찰서 자리)에 1천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들었다.

4.19당시 광주고 정문

곡 민주주의 시위

4.19혁명 기념탑

곡(哭) 민주주의 장송 시위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지자 광주의 민주당 전남 도당은 투표소 참관인의 철수를 지시한 후 '부정선거 규탄 거리 시위'를 하자는데 뜻이 모아진다. 그래서 제작된 플래카드가 '곡(哭) 민주주의'였고, 훗날 민주주의 장송(葬送) 시위(데모)로 불리게 된 이유가 된다.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장송 시위는 전국 최초의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였다. 당시 민주당 중앙 당사에서는 4시 30분 선거 무효를 선언했고, 마산에서는 이보다 앞선 3시 30분에 선거 무효를 선언한 후 시위가 시작된다. 그러나 민주당원이 중심이 된 금남로의 광주 시위는 이보다 앞선 12시 50분경이었다. 동아일보는 당시 시간을 12시 45분경으로 전남일보는 12시 50분경으로 쓰고 있다.

이날 광주 시위는 당시의 동아일보와 전남일보에 보도되었지만 15일 7시경에 일어난 2차 시위 당시 경찰의 발포로 시위 학생들의 피해가 속출한 마산항쟁에 곧 묻히고 만다. 당시의 민주주의 장송 시위 모습을 동아일보는 1960년 3월 16일자 조간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5일 낮 12시 45분경 이곳 민주당의 '민주주의 장송 데모대'는 민주당 전남 선거사무소장 이필호 의원의 '지프차'를 선두로 전남도 선거사무소를 출발, 도청으로 향하는 도중 무장 경찰 200여 명과 소방차의 출동으로 하오 1시 15분경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일대 충돌을 일으켰다. 이날 데모대는 선거를 포기한 민주당 참관인 70여 명과 100여 명의 당원이 장장(葬章)을 두르고 백건(白巾)을 쓰고 '민주주의는 절명하였다', '우리의 자유를 찾자'고 외쳤다. 천여 명의 군중이 따르는 가운데 도청으로 향하던 도중 YMCA 앞에서 급거 출동한 무장경찰대 300여 명의 난폭 속에 일대 수라장이 벌어졌다. 이 현장에서 이필호씨를 비롯하여 김석주, 염성웅, 오영수씨 등 4명이 강제 연행되고, 이 의원 비서 조계현씨가 장총으로 후두부를 맞아 피를 뿌리고 쓰러지는 등 5명이 부상을 입고 고(高)병원에 입원 치료 중에 있다. 동 데모는 1시 25분에 민주당 선거사무소로 소방차에 의해 강제로 쫓겨 옴으로써 일단 끝났다."

1천여 군중이 합세한 광주의 3·15 민주주의 장송 시위는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선거 무효를 선언한 전국 최초의 시위였고, 장총대로 후두부를 맞아 금남로에 흘린 조계현의 피는 4·19 혁명의 출발을 알리는 첫 피였다.

광주 4·19혁명 출발지, 광주고

4월 19일의 광주 시위는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작된다. 그 중심에 이홍길(3년)이 있었다. 18일, 이홍길은 시내 전남일보 벽보판에서 고대생의 데모를 알리는 호외를 접한다. 그리고는 저녁 무렵 그의 계림동 하숙집에 홍갑기, 김신담, 김병욱 등 10여 명이 모여 19일 시위를 모의한다. 여기에 조선대 부속고등학생인 전만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19일 1교시 난타의 종소리를 신호로 운동장에 집결하기로 약속하고, 종을 칠 타종수로 몸집이 큰 신강식과 조병수를 정한다. 그리고 19일 목이 터져라 외칠 구호를 만든다. 그날 밤에 만든 구호는 '3·15 부정선거를 다시 하라', '마산의 발포 경찰을 처단하라', '구속 학생 석방하라', '경찰은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 등이었다.

19일, 시위를 결의했던 학생들이 등교하자 낌새를 눈치챈 교장이 간부들과 주동 학생을 불러 자중하고 대학 입시에 전념하라고 훈계한다. 이홍길 등 주동 학생들이 교장실에 감금되고 울리기로 했던 종소리가 울리지 않자, 2교시 시작과 동시에 정원채(3년)가 오커 신발을 벗어 타종한다.

4·19와 관련된 전국적인 현상으로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타종(打鐘)이 있다. 시위를 계획하면서 신강식, 조병수를 타종자로 지목해놓은 것만 보아도 그 상징적 의미가 짐작된다. 타종이 곧 시위 시작의 상징임은 서울대 선언문의 한 구절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임을 자랑한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미 약속한대로 종소리에 맞춰 전교생이 운동장에 집합하고, 학생 대표들도 잠긴 교장실의 문을 박차고 나온다. 1960년 4월 19일, 10시 30분경이었다. 학생들은 운동장에 집결했지만 정문은 이미 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 이병렬 등이 앞장서 경찰서의 저지선을 뚫고 시내로 진출한 것은 10여 분 뒤인 10시 40여 분이었다.

거리로 진출한 학생은 100여 명, 계림동 앞길로 나오자 경찰이 곤봉으로 후려친다. 경찰의 곤봉 세례에 광고생들은 계림파출소와 경양방죽 쪽의 두 갈래로 나뉘어 시내에 진출,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일고, 광주공고 등 시내 고교를 찾아다니며 동참을 호소한다. 이에 광주여고생들은 판자울타리를 넘어뜨리고 시위대에 합류한다.

광주, 피로 물들다

오후 2시, 금남로는 몰려드는 고교생들로 물결을 이룬다. 일부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수천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광주 학생 의거 선배를 따르자"를 외치며 여러 갈래로 나뉘어 시내 곳곳의 파출소와 소방서를 파괴하며 경찰과 충돌한다. 그리고 광주 4·19 최초의 희생자가 발생한다. 19일 오후 8시경, 광주 학동파출소 앞에서 시위하던 강정섭(당시 17세)이 경찰이 쏜 총알을 맞고 좌우상박부 관통상으로 숨진다. 그의 신원은 10일이 지난 4월 29일이 되어서야 확인된다.

강정섭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졌지만 발포자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방치되다 1961년 2월, 특별검찰부에 의해 학동파출소 김남중 주임, 이용수·김해수 순경 등이 공소됨으로 그 진상이 드러난다. 공소장에 의하면 오후 8시경 파출소로 밀려오는 시위대 천여 명을 향해 김남중은 칼빈 실탄 6발을, 이용수와 김해수는 각각 3발과 4발을 발사한다. 그리고 그 중 한발이 파출소에서 7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강정섭에게 명중된다. 시위대들에 의해 전남대 병원에 옮겨졌지만, 그의 몸은 이미 식어 있었다.

학생 시위대의 최대 격전지는 광주경찰서였다. 천여 명의 시위대가 광주경찰서(현 동부경찰서 자리)로 모여들었고,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으로 이에 맞서고 있었다. 시위대와 경찰과의 밀고 당기기를 수차례, 9시 25분경 40명의 경찰 돌격대는 시위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탕, 탕, 탕, 경찰의 발포가 시작된다. 9시 40분경이었다. 여기저기서 시위대가 쓰러졌다. 경찰은 금남로로 후퇴하는 시위대를 끝까지 쫓아 와 사격을 해댔다. 순식간에 이귀봉(당시 18세)을 비롯하여 6명이 금남로·충장로에서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한다. 광주는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이며 19일 밤을 맞는다.

20일 오전, 농고생들이 합세한 전남대생들의 시위가 있었지만 무장한 군인과 장갑차의 공격으로 해산된다. 그러나 광주에서의 시위는 이후 목포 여수·순천 등 전남 일대로 퍼져나간다.

광주공원에 4·19혁명 추모비·추모탑 건립

1962년 4월 19일 광주공원에서는 「4·19의거 희생 영령 추모비」가 세워진다. 4·19 당시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고 4·19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맨 중앙에 4·19를 양각하고 우측에는 4·19 당시의 시위 모습을, 좌측에는 조지훈의 시를 새겼다.

자유여 영원한 소망이여.

피 흘리지 않곤 거둘 수 없는 고귀한 열매여.

그 이름 부르기에 목마른 젊음이었기에 맨 가슴 총탄 앞에 헤치고 달려왔더이다.

불의를 무찌르고 자유의 나무의 피거름되어

우리는 여기 누워 있다.

잊지 말자, 사람들아.

뜨거운 손을 잡고 맹세하던

아 그날 4월 19일을.

최근 추모비 뒤에 기념탑을 세웠고, 추모비 앞에는 당시 경찰의 발포로 숨진 7명 열사의 흉상이 서 있다.

전국 최초로 3·15 부정선거의 무효를 외쳤던 광주 3·15 장송 시위는 마산·서울을 돌아 다시 광주고생들이 중심이 된 광주 4·19혁명으로 타오르게 된다. 광주 4·19 혁명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5·18민주항쟁을 있게 했던 한국 민주 지형의 토대였고 허리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금남로에 흘린 피는 5·18 민주 항쟁을 거치면서 6월 항쟁으로 완성된다.

현 광주고 정문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