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까도 까도 끝이없는 양파, 생성과 소멸은 한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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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까도 까도 끝이없는 양파, 생성과 소멸은 한뿌리
양파의 인문학||어쩌면 불교의 무아(無我) 자체가 양파 한 뿌리의 철학이자 인문학일지도 모른다.||아무리 잔인한 기억마저 움 돋는 4월일지라도, 까도 까도 빈 허공 같은 인생일지라도,||양파 한 뿌리 사랑은 돋아나는 것 아니겠나.
  • 입력 : 2022. 03.31(목) 15:59
  • 편집에디터

양파수확작업. 무안군 제공

양파를 끝까지 벗기면 무엇이 남을까? 마늘이나 쪽파도 마찬가지다. 씨앗이 들어있는 씨방이 나오는 것도 아니요, 무화과처럼 속으로 핀 꽃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다. 끝까지 가면 아무것도 없다. 분명 실체가 있어 벗겨 내려갔는데 마지막 종착지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만이 남아있다. 양파 하면 떠오르는 우화가 도스트예프스키의 '양파 한 뿌리(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이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 우화는 지옥에 대한 도스트예프스키의 생각을 함축하고 있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수호천사가 찾아낸 양파 한 뿌리가 희망일 수 있다는 뜻이다. 생전에 선행을 많이 한 사람들과 비교하면 불공정한 것처럼 보일수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누구나 양파 한 뿌리 정도의 희망이 있다는 뜻이라고나 할까. 물론 전제가 있다. 마지막 남은 희망일지라도 독식하지 않고 서로 나눌 수 있는 지혜 말이다. 졸저,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된 것들」(다할미디어, 2022. 3)에서 언급한 양파 이야기다.

양파의 인문학, 양파 한 뿌리

옛날 몹시 사악한 할머니가 살았다. 얼마나 사악했던지 생전에 한 번도 선행을 한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죽어 저승문에 도착하니 악마들이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렸다. 선행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한 수호천사가 지옥 밖을 지나가다가 할머니가 지옥불 속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수호천사가 신에게 애원을 하였다. "저 할머니를 구해주시오" 그러자 신이 말했다. "살아생전에 한번이라도 선행을 하였다면 그리해주겠다." 할머니의 일생에 딱 한 가지 선행이 있었다. 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뽑아서 거지에게 적선을 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신은 "양파 한 뿌리를 할머니에게 던져라. 할머니가 그 양파 줄기를 붙잡고 빠져나오면 천국으로 가게 해주겠다"라고 했다. 할머니가 지옥에서 반쯤 나오는데 지옥에 있던 다른 죄인들이 같이 가지고 매달렸다. 할머니는 화가 나서 "이것은 내 양파야!"라고 외치면서 다른 사람들을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양파가 똑 부러지고 모두 다 같이 지옥 불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도스트예프스키는 양파 한 뿌리의 우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평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화 속의 할머니는 이것을 천국으로 가는 티켓으로 오해했다. 다른 죄인들이 매달렸을 때, 발로 걷어차 버리는 행위가 그것이다. 결국 모두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고 만다. 많은 연구자가 이 우화를 통해 공동체와 선행 나아가 실천적 사랑을 읽어내고 있다. 도스트예프스키가 양파 한뿌리를 통해 읽어낸 것은, 증오를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양파를 까다 보면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양파는 까도 까도 끝이 없다. 벗겨도 벗겨도 마치 프랙탈 같은 구조의 동일한 텍스트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프랙탈이 같은 구조의 반복 확산인 데 비해 양파는 같은 구조의 소멸이란 점이 다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의 알고리즘이 결국은 같은 것이어서 그런 것일까?

사월이여, 그대는 어이하여 다시 오는가/ 아름다움으로 족한 건 아니다/ 그대는 이제 끈끈하게 움트는 작은 이파리의/ 붉은빛으로 나를 달랠 수 없다/ 나는 알 것은 안다/ 크로커스 꽃 무더기를 바라보니/ 목덜미에 햇살이 따사롭다/ 흙 내음도 향긋하다/ 죽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땅 아래에서는 사람들의 뇌수가/ 구더기에 먹히고 있지 않느냐, 그뿐인가/ 삶 자체가 허무요/ 빈 잔이요, 융단 깔리지 않은 층계다/ 해마다 이 언덕으로 사월이/ 천치처럼 흥얼흥얼 꽃을 뿌리며 온다 한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피천득이 엘리엇의 시 '황무지'의 한 소절과 함께 소개했던 말레이의 시다. 1920년대 미국의 낭만과 허세를 전형적으로 그려낸 여류작가라는 평이 붙어 있다. 봄철의 새 생명에서 오히려 죽음을 예감한 시이니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라고 노래했던 엘리엇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흥얼흥얼(babbling)거리는 것을 보니, 어쩌면 남도 소리의 토대라 할 수 있는 '흥그래 타령' 한 소절과 닮아 있는 듯도 하다. '엄매엄매 우리엄매/ 멋할라고 나를 나서/이 고상을 시키는가~' 시집살이 한평생에 대한 애환을, 어머니를 매개로 풀어냈던 우리 남도 여인네들의 진하고 깊은 선율 말이다. 물론 반전이 있다. 장송곡처럼 우는 이 울음이 사실은 삭임과 극복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불교적 '공(空)' 혹은 무애(無碍)를 떠올린다고나 할까. 현상계를 유전하는 모든 존재가 인연의 화합으로 생멸하는 존재라는 철학이니 어찌 고정불변하는 자성(自性)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주지하듯이 '공(空)'은 힌두교의 브라만(梵)과 니르바나(涅槃)의 상징이기도 하고 불교의 근본 사상이기도 하다. 마치 양파 한 뿌리를 까고 또 까서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 어쩌면 불교의 무아(無我) 자체가 양파 한 뿌리의 철학이자 인문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같은 땔나무꾼에게는 불교의 차원 높은 교리는 언감생심이요, 말레이의 '융단 깔리지 않은 층계'는 너무 현실적인 문학이다. 그저 막걸리 한 잔 마시고 나물 먹고 춤추며, 조운파 작사, 박시춘 작곡, 남진의 '빈잔' 한 곡 부를 따름이다. 아무리 잔인한 기억마저 움 돋는 4월일지라도, 까도 까도 아무것 없는 빈 허공 같은 인생일지라도, 그래도 양파 한 뿌리의 사랑은 돋아나는 것 아니겠나. "그대의 싸늘한 눈가에 고이는/ 이슬이 아름다워/ 하염없이 바라보네/ 내 맘도 따라 우네/ 가여운 나의 여인이여/ 외로운 사람끼리/ 아, 만나서 그렇게 또 정이 들고/ 어차피 인생은/ 빈 술잔 들고 취하는 것/ 그대여 나머지 설움을/ 나의 빈 잔에 채워 주~"

양파수확작업. 무안군 제공

남도인문학팁

황토골 무안 양파

「무안문화」 제6호(2006)에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양파의 최초 재배지가 무안이라는 주장이었다. 정병춘(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 목포시험장)의 「목화, 고구마의 한국 전래와 무안 양파의 시배 역사」라는 글이 그것이다. 이를 인용해두고 공부자료로 삼는다. 우리나라에 양파가 전래된 경로와 소비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이 없다. 1908년 조선농회보 제6권에 원예모범장의 양파 경종성적이 기록되어있다. 1906년 뚝섬에 원예모범장이 설치되면서 양파연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67년 10월 30일 발간한 1905년부터 1966년까지의 농사시험연구결과요람(농촌진흥사업 60주년 기념발간)을 보면 양파관련시험연구 결과가 여러 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양파 재배는 1932년 무안군 청계면 사마리 강동원씨로부터 비롯된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 양파재배농가에서 체류할 때에 양파 종자 1홉을 구입하여 고향의 숙부 강대광씨에게 전달한 것이 최초의 무안 전래이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몇 년간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재배면적이 늘고 생산량이 늘어났으나 소비처가 없어 문제가 되었다. 고심하던 그는 양파를 마차로 수송하여 목포 중앙시장에 내놓고 팔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양파가 소득 높은 작물로 소문이 나자 성남리 인근 지역에서 재배하려는 농가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무안지역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양파 개별농가 재배 성공사례다. 무안군에서는 양파를 황토양파로 이름 짓고 무안 특산물 중의 하나로 홍보하고 있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