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70> 앞으로 걷게 될 길 얼마나 많은가…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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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70> 앞으로 걷게 될 길 얼마나 많은가… 다시 '시작'이다
놀멍 쉬멍 걸으멍,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제주 올레길||끝이 다시 시작이 되는, 제주올레 21코스(11.3km) 하도에서 종달올레까지
  • 입력 : 2022. 02.10(목) 16:51
  • 편집에디터

밭담길 풍경

되새김 길

제주내륙에서의 올레 마지막 코스는 해녀 박물관을 등지고 제주해녀항일운동 기념공원을 가로지르면서 시작된다. 다른 코스에 비해 거리가 짧은 편이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뭔가 아쉬우면서도 특별하게 여기지는 길이다. 그래서일까. 해뜨기 전의 거친 바람까지 소중하게 생각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나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옛 봉화대가 있었다는 나지막한 연대동산으로 가볍게 들어섰다. 마을과 밭길, 바닷길, 그리고 오름이 각각 N분의 1씩 차지한다. 군살 없는 볼거리들로 오목조목 조합되어 있다.

워밍업을 하듯 연대동산을 지나서 면수동의 옛 이름인 '낯물'에 있는 밭길이라는 뜻의 '낯물밭길'로 들어선다. 겨울이어도 노란 무꽃과 유채꽃이 커다란 꽃다발처럼 밭 가득 피어 있어 밭담길은 흡사 계절이 실종된 풍경화처럼 화사하다. 무엇보다도 바람이 만들어놓은 구름이 광활한 하늘에서 추상화를 그린다. 화사한 밭을 렌즈에 담으면 그 절반의 주인이 하늘이다. 마을길 또한 집담 너머로 요염한 동백꽃이 지나가는 길손을 유혹한다. 마을과 밭담길을 빠져나오면 별방진이다. 우도에 접근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조선 중종 5년(1510) 하도리에서 진을 설치하고 성곽을 쌓았다고 한다. 성을 쌓을 때 흉년으로 기근이 심해 부역하던 장정들이 굶주리며 작업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현재의 나에게는 집담이나 밭담처럼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일종의 '담'처럼 느껴진다. 안내판을 보니 환해장성과는 별개로 축성됐다고 한다.

본격적인 해안길은 '석다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건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건물에 대한 기억이 있다. 6년 전, 처음 올레를 걸었을 때도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 석다원 옆 건물인 '리치망고'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창문 너머 쉼 없이 내게 덤벼드는 파도를 보면서 하이킹 초보자의 설렘을 메모한 적이 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면서 두렵기까지 했다.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오늘 밤 자야할 숙소는 잘 찾아갈지, 다음날 아침은 무사히 걸을 수 있을지 등. 그때는 조금만 걸어도 발가락에 물집이 생겼고 근육통에 시달렸다. 걷는 중에 다른 올레꾼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기까지 했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영업을 하지 않은 리치망고 창문에 눈을 바싹 들이대며 오래전 애송이가 앉았던 자리를 찾아보았다. 여전히 몇 년 전의 파도와 바람이 지금도 치고 불고 있지만 이제는 제법 단단해진 체력과 정신력으로 무장한 올레꾼이 한없이 이어져있을 것만 같은 2차선 해안도로로 들어섰다. 5분이나 걸었을까, '토끼섬'이라는 올레표지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토끼섬이 보이는 해안길

"처음 제주도로 왔을 때 우연히 토끼섬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어요. 실은 토끼섬이라는 이름조차 몰랐어요. 섬이 온통 하얀 섬인 거예요. 가고는 싶은데 어떻게 가는지를 몰라서. 그래서 토끼섬이 보이는 곳에서 하염없이 앉아 있었죠. 그때 마침 어떤 어부가 배를 끌고 오는 거예요. 내 마음을 알았는지 내 앞에 배를 대더니, 타라고 하는 거예요…"

토끼섬은 하도 어촌계 창고를 지나 천연기념물 19호로 지정된 문주란 자생지인 무인도이다. 여름에 하얀 문주란 꽃이 섬을 뒤덮는데 그 모습이 토끼 같기 때문에 토끼섬이라고 불린다. 멀리서 봐도 손바닥만 할 정도로 작다. 위의 이야기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오래전 사업에 실패한 한 남자가 제주도에서 생을 마감하려고 왔고 우연히 그 하얀 섬을 보고 가고 싶더란다. 마침 어부의 도움으로 간다. 어부가 데리러 오겠다는 3시간 동안 그 남자가 한 것은 하얀 꽃 사이로 정말 한 마리 토끼가 되어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그것도 벌거벗은 채로. 그 퍼포먼스가 효력이 있었는지,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그 남자는 제주도에서 숙박업을 하며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나는 토끼섬을 지나면서 또 다른 이야기 한 토막을 꺼내면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지미오름이 보이는 밭담길

땅끝, 지미(地尾)오름

옛날옛날에 목사가 제주도로 부임해왔단다. 목사는 제주도를 순시하게 되었는데 제일 나중에 간 곳이 종달마을이었다. 그 종달마을에 떡 하니, 오름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땅끝이라는 뜻으로 지미오름이라고 짓게 되었단다.

땅끝이라는 뜻의 지미봉을 오르는 것은 만만치 않다. 약 165.8m 높이지만 연속해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갑자기 나타난 정상에서는 반전을 만끽할 수가 있다.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시야에 들어온 풍경에 저절로 감탄사가 터진다.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우도와 성산일출봉을 기점으로 잘 바느질된 퀼트처럼 아기자기하게 펼쳐진 밭 풍경과 마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어머, 지미봉에 올라가지 않고 우회길을 택했다고요? 지미봉을 꼭 올라갔어야 했는데…"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을 정신없이 동영상에 담고 있을 때 첫 올레를 돌 때 묵었던 민박집 아저씨가 안타깝게 내뱉던 말이 소급된다. 그때는 몸 피곤한 것만 알았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오름이 다 비슷한 오름이고 앞으로 걷게 될 길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보다 더한 풍경을 볼 수도 있을 거라고 속으로 변명했었다. 그때의 생각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나는 그 다음 코스에서 예기치 못한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한 적이 여러 번 있다. 하지만 요즘은 들어서는 '지금' '이곳'이 항상 최고라는 생각을 한다. 예전보다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걷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피곤함을 넘어서는 그 무엇일 것이다. 그것은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자주 걷는 사람이 덜 걷는 사람에 비해 더 여유로울 것이라는 나만의 믿은 같은 것이다.

그 믿음이 있기에 나는 '끝'이라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늘 끝은 또다른 시작을 동반한다. 비록 제주 내륙 올레가 끝났지만 소품처럼 따라오는 우도, 가파도, 추자도를 어떻게 잘 걸을지, 걸음이 끝나가는 땅끝 오름에서 나는 또다시 시작할 하이킹을 준비한다.

집담길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