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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화순 출신 의병장 양회일과 쌍산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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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화순 출신 의병장 양회일과 쌍산의소

양팽손 후손 양회일 1907년 화순서 거병
을사늑약후 가산 정리 군자금 3천량 준비
의병본부 ‘쌍산의소’ 설립 의병부대 편성
화순 너릿재에서 왜병과 전투중 생포당해
석방·구금 반복하다 1908년 장흥서 순국

게재 2021-07-07 15:18:41
의병 발의지 '쌍산의소' (화순군 이양면 증리 증동마을 60)
의병 발의지 '쌍산의소' (화순군 이양면 증리 증동마을 60)
쌍산의소 막사터
쌍산의소 막사터
의병장 행사 양선생 회일 순의 기념비
의병장 행사 양선생 회일 순의 기념비
의병장 양회일 무덤
의병장 양회일 무덤

거의 자금을 마련하다

1907년 화순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양회일(梁會一, 1856~1908)은 화순 능주에 유배 온 조광조의 시신을 거둔 양팽손의 후손으로, 본관은 제주이며 자는 해심(海心), 호는 행사(杏史)이다. 1856년 화순 능주에서 태어난 후 1883년 화순군 이양면 쌍봉마을로 이사한다.

가세가 넉넉했던 그는 20대 초반, 서울을 오가며 과거를 준비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벼슬길을 접고 농사를 지으며 찾아오는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친다.

1904년에는 향약을 운영하는 도약장(都約長)의 직임을 맡는다. 당시 각처에서 일어나는 도적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방도대(防盜隊)를 조직하기도 했다. 1904~1905년에는 도둑들이 떼를 지어 일어났다. 도둑 수십 명이 양회일의 집에 들이닥치자, 동네 사람들은 모두 달아나 피했다. 이때 양회일은 "지금 민생이 도탄에 빠져 생계를 의탁할 길이 없다. 너희들도 춥고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서로 몰려다니며 도둑질을 하겠지만, 어찌 그것이 너희들의 본심이겠는가?"라고 타이른 후 뜰 앞에다 큰 자리를 깔고 밥을 지어 먹이고 베 몇필을 내어주니, 도둑들이 감격하여 돌아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905년, 양회일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빼앗기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할 마음을 굳힌다. 마음을 굳혔지만 노부모가 마음에 걸렸다. 이를 알아차린 부친 양재욱은 "동생이 있고 아들이 있으니 오직 의로움으로 왕사(王事)에 진력할 뿐 늙은 나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아들의 길을 열어준다. 부친의 뜻을 읽은 양회일은 1906년 가산을 정리하여 3천량의 거의 자금을 마련한다.

쌍산의소를 결성하다

1907년, 양회일은 보성 복내면과 화순 이양면을 가르는 계당산 증동마을에 의병 본부를 차린다. 쌍산의소(雙山義所)다. 화순은 물론 보성과 정읍, 남원과 구례 등지에서 2백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자 부대를 편성했다. 부장에는 신재의, 선봉장에는 이광선, 중군장에는 임창모, 후군장에는 노응현, 도포장에는 유화국, 총무에는 양열묵이 임명된다. 그리고 1907년 3월 9일, 양회일은 '서고군중문(誓告軍中文)'을 발표하여 동지들이 합심하여 이완용 등 을사5적을 섬멸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죽여 국가의 수치를 갚기 위해 서로 지켜야 할 바 5조를 발표한 후 거병한다.

양회일이 이끈 쌍산의소의 의병들은 4월 22일 능주의 관아와 주재소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린다. 이어 화순을 점령한다.

다음 목표는 전라남도의 도청소재지 광주였다. 광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너릿재를 넘어야 했다. 일군과 총격전이 벌어졌지만, 날이 어두워지면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의병들은 화순과 동복 사이의 도마치 고개 아래 민가에서 숙박 중에 일군의 공격을 받는다.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양회일은 선봉장 이광선에게 "샛길로 빠져나가 후일을 기약하라"라고 명령한 후 일군에게 외친다. "나를 죽여라, 내가 맹주다. 다른 사람은 죽이지 말라." 일군은 양회일을 사로잡기 위해 총성을 멈추었고, 중군장 임창모를 비롯한 5명의 부장들이 양회일을 에워쌌다.

이 전투에서 화순 출신의 정세현이 운명했고, 양회일을 비롯한 임창모, 안찬재, 유태경, 선태환, 이백래(이명 이윤선), 김대현 등은 체포된다. 이 중 김대현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또 옥중에서 순국한다.

양회일은 1907년 7월, 재판을 받는다. 재판장에서 그는 당당하게 거사의 뜻을 밝힌다. 그가 남긴 『행사실기(杏史實記)』에는 "너희는 승냥이와 이리보다 못한 놈들이다.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협박한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너희들은 한 하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적이다. 내가 장차 이토 히로부미의 목을 베고, 5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고자 했는데, 의는 크고 병사가 적어 이런 처지에 이르렀다. 비록 절의만으로 일어났지만 장차 지혜와 용기있는 용사들이 많이 나와 치욕을 갚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회일은 광주지방법원에서 15년의 유배형을 받고 목포 앞의 섬, 지도(智島)에 유배된다. 순종이 즉위한 1907년 순종의 즉위 은사(恩赦)로 풀려나지만, 일제는 1908년 5월 이백래가 주도한 호남 창의소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된다. 강진헌병대로 끌려간 양회일은 다음 달 장흥헌병대로 이관된 후 밥 한 톨까지 거부하며 항거하다 곡기를 끊은 지 일주일만에 "너희가 천하의 의사를 다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 세상을 뜬다. 1908년 6월 24일(음력)이었다.

정부는 1909년, 그에게 애국장을 추서한다.

쌍산의소 현장을 찾다

한말 전라도는 최대 의병항쟁지였다. 1909년의 경우 전투 횟수의 47.2%가, 참여 의병수의 60.0%가 전라도서 일어났고 전라도 사람이 참여했다. 한말 전라도 의병의 거점이 남도 땅 곳곳에 남아 있는 이유다. 그중 하나가 화순군 이양면 증리, 계당산 자락에 위치한 쌍산의소다. 예로부터 계당산 일대는 쌍산, 쌍봉 또는 쌍치라 불리었다. 양회일 의병의 의진을 '쌍산의소'라 부른 이유다.

양회일 의병부대의 훈련장과 막사터가 있었던 쌍산의소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철감선사 승탑을 품고 있는 절 쌍봉사 건너편 계당산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을 뿐 아니라, 들어가는 길 자체가 좁고 패어 있어 차를 타고 들어가기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쌍산의소를 찾아가는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쌍봉사 입구 앞에서 쌍산의소 의병 발의지와 무기제작터가 있는 증동 마을을 통해서 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쌍봉사 입구에서 화순 방향으로 조금 오르다 오른쪽 산자락 길을 따라가는 방법이 있다. 의병 발의지가 있는 증동마을과 막사터는 계당산 자락의 앞뒤로 위치하고 있는데, 조그마한 임도(林道)로 연결되어 있다.

4킬로미터를 달리자 화순은 물론 보성·정읍·남원·구례·순창 등지에서 몰려든 의병들을 수용하기 위한 막사터와 훈련장이 나왔다. '막사터' 표석과 '안내판'이 서 있다. 0.5~1미터 높이의 돌담 흔적과 원형 또는 사각형의 크고 작은 석축 막사터 20여 기가 남아 있다. 막사로 이용된 석축 바깥으로는 길다란 석축이 수백미터 잇대어 있다. 일종의 막사와 훈련장을 보호하는 의병성으로, 적군의 기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막사터 입구에는 '만세 바위'라 불리는 두 개의 너럭바위가가 있다. 훈련 중 의병들이 올라가 만세를 불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바로 곁에 지석천의 시원인 개울물이 흐른다. 의병들은 이 물로 목을 축이고, 주린 배를 채웠으며, 취사에도 사용했으니 생명수인 셈이다.

쌍산의소는 이와 같은 입지 때문에 남도의 후기 의병을 주도했던 안규홍·임창모·안찬재 등의 의병부대들도 늘 이용하던 장소였다. 물론 이곳은 6·25전쟁 당시 빨치산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임도를 따라 고개를 넘어가면 양회일이 최초로 거병을 모의했던 의병 마을인 증동마을이 나온다. 당시 마을 주민들을 의병들을 위해 식량을 제공하고 막사를 지을 때 필요한 돌을 날랐다. 지금 마을은 5가구도 채 남지 않은 조그마한 산촌이지만, 1907년 이곳은 의병들로 북적되던 마을이었다. 마을 주차장 곁에는 의병마을답게 의병들의 혼을 기리는 '쌍산의병사(雙山義兵祠)'라는 사당이 건립되어 있다. 사당 뒤로 돌아가면 양회일이 1906년 12월경 거병을 결의했던 임노복의 집이 복원되어 있다.

여기서 데크로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 300여 미터를 돌아가면 무기제작 장소였던 대장간 터가 나온다. 대장간 터 북쪽 최상부에는 높이 1미터 길이 7미터의 석축 흔적이 남아 있는데, 제철공정을 지휘했던 건물지로 추정된다. 주변에는 쇳물덩어리(슬래그)가 여기저기 널려 있어, 200여 의병들이 무장한 화승총이나 천보총의 탄환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대장간 터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왼편 날개자락에는 무기 제조의 원료인 유황을 보관했던 유황굴도 있다. 현재는 굴 내부가 무너져 확인할 수 없지만, 이곳에 유황을 쌓아놓고 무기 제조시 꺼내어 사용했다고 한다.

이처럼 계당산 자락과 증동마을 일대에는 의병 모의지를 포함, 무기를 제작했던 대장간과 유황굴, 의병들의 훈련장과 막사터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의병들의 막사와 훈련장, 무기를 제작한 대장간이 함께 존재하는 곳은 매우 드물다. 2007년 쌍산의소 일대가 사적 485호로 지정된 이유다.

쌍산의소를 이끈 대장 양회일의 흔적은 또 있다. 그가 살았던 화순군 이양면 쌍봉마을 입구에는 2002년 건립된 '의병장 행사 양선생 회일 순의기념비(義兵將杏史梁先生會一殉義紀念碑)'가 서 있는데 태극기가 새겨져 있어 뭉클하다. 순의기념비 옆에는 학포 양팽손 신도비와 1946년 건립된 '행사 양공 회일 순의비(杏史梁公會一殉義碑)가' 함께 서 있다.

그의 순의비가 서 있는 앞산에 그의 무덤이 있는데, 묘비석에는 "대한 순국 의사 행사 양공지묘(大韓殉國義士杏史梁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여흥민씨와 파평윤씨 등 두 부인과 함께 잠들어 있었는데, 응달이어서인지 무덤 봉분이 무너지고 풀이 나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