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괄 콘텐츠 디렉터 김홍탁의 '인사이트'>창조론,진화론,그리고 시뮬레이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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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칼럼
총괄 콘텐츠 디렉터 김홍탁의 '인사이트'>창조론,진화론,그리고 시뮬레이션론
  • 입력 : 2021. 03.07(일) 14:17
  • 편집에디터
김홍탁 총괄 콘텐츠 디렉터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 '파이트 클럽', 그리고 '매트릭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선 개봉 연도가 같다는 점이다. 이 세 편의 영화는 1999년에 개봉됐다. 세 영화 모두 기존의 영화 문법을 파괴한 독특함으로 관객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에 왜 이렇게 독특한 영화 세 편이 한꺼번에 등장한 것일까? 이들 영화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기 전 마지막 해의 영화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백년을 맞이하는 시기에도 뭔지 모를 두려움이 만연하는 세기말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백년을 열 번 겪은 후 연도수의 맨 앞자리가 2로 시작되는 밀레니엄을 맞아 희망보다는 두려움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1999년엔 세상을 구동하는 디지털 시스템이 붕괴되어 대혼란이 올 것이라는 Y2K의 예언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 세 영화가 묘사한 혼돈의 세상은 그 이전의 영화에 등장했던 디스토피아적 SF와는 사뭇 성격이 달랐다. 이 세 영화는 한 마디로 인간의 정체성의 혼란을 다루고 있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는 현세에선 존재할 수 없는 7 1/2층에 숨겨진 문으로 들어가 말코비치의 의식 속에 살게 되는 가상현실이 존재하는가 하면, 파이트 클럽에서는 이중인격을 가진 주인공의 분리된 자아가 환영으로 등장 한다.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현실과 매트릭스의 세상을 왔다 갔다 한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의 존재론적 의문을 갖게 되는 형국이 펼쳐진다. 영화를 비롯한 모든 창작물은 시대의 맥락과 관계없이 탄생하지 않는다. 당대의 환경과 그 시기를 관통하는 인간의 집단 의식·무의식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마주 했던 새로운 천년은 인간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크게 핵심을 벗어나지 않는다.



정체성의 혼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시뮬레이션이라는 인식으로 확장됐다.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실재하는 세상인가라는 의문의 확산이다. 스웨덴 철학자 닉 보스트롬 Nick Bostrom 이 이 논제에 불을 지폈다. '세상은 매우 진보된 문명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정밀한 시뮬레이션' 이란 가설이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논지다. 인간은 거대하고 정교하게 직조된 시뮬레이션 세상 속에 살고 있는 프로그램일 뿐이란 가설은 창조론이나 진화론에 익숙해 있던 우리를 소름 끼치게 만든다. 이 시대의 인플루언서 일런 머스크는 한 인터뷰에서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냐? 라는 질문에, "이 세상이 진짜 현실일 가능성은 10억 분의 1"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빅뱅을 밝혀낸 존 아치볼드 휠러John Archibald Wheeler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우주는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닌 데이터 덩어리다." 우리는 오래 전 장자의 호접몽의 세상을 그대로 이어 살고 있는 것이다.



허구라고 느껴지는 이 논지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만만치 않다. 그 중 가장 소름 돋았던 과학적 증명은 양자역학의 이중 슬릿 실험이었는데, 이 실험에 의하면 이 세상은 데이터로 존재하는 데 우리가 어떤 현상을 목격할 때만 그것이 현실 이미지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는 디지털 데이터의 최소 단위 0과 1의 조합이 시뮬레이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상황과 똑같다. 이 과학적 증명이 참이라면 엄청나게 빠른 순간에 데이터가 랜더링 되어 우리 눈앞에 현실 같은 이미지로 나타난다는 것인데, 그런 순간 치환은 그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인간보다 억만 배 뛰어난 지적 생명체가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지적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주를 창조한 신이 프로그래머 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세상이 생겨난 원리를 창조론과 진화론 두 가지로 설명해왔다. 그 둘이 각각 종교적 차원과 생물학 측면에서 논의 됐던 것이라면, 시뮬레이션론은 전자학과 물리학의 입장에서 세상의 창조를 설명한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TV같은 대중매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현실을 압도한다는 의미의 시뮬레이션을 주창 했을 때는 그래도 행복했다. 명쾌하게 이해되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프로그램화된 것이고 그 시뮬레이션의 세상 속에서 마치 모든 인간이 영화 '트르먼쇼'의 주인공처럼 살고 있다는 가설은 섬뜩하다. 음모론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미 우리는 AI가 제조해내는 수많은 시뮬레이션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그 시뮬레이션이 점점 더 증식하고 정교해 진다면, 나아가 시뮬레이션 속에서 또 다른 시뮬레이션이 만들어지는, 마치 꿈 속에서 꿈을 꾸는 세상이 펼쳐진다면 정말로 우리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시뮬레이션에서 살게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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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