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함과 진솔함으로 빚은 거리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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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함과 진솔함으로 빚은 거리의 목소리
  • 입력 : 2020. 10.22(목) 11:12
  • 박상지 기자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

성프란시스대학 편집위원회 (엮음) | 삼인 | 1만9000원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출간되는 노숙인 문집이라는 데 있다. 노숙인들의 글쓰기가 갖는 함의는 분명 다른 계층, 다른 계급의 글쓰기가 갖는 그것과는 사뭇 다른 사회적 변별성을 가진다. 문자가 고안된 이후 전통적으로 글쓰기의 주체는 당연히 '지식인'과 '문인'으로 표상되는, 사회 주류 계층으로 인식돼왔다. 문(文)과 학(學), 또는 서(書)와 필(筆)은 동과 서를 막론하고 오랜 학습과 교육 체제의 산물이고 이런 기회를 부여받은 이들이 지배해온 영역으로 받아들여져 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성장과 학습의 과정에서 뚜렷하게 불리하고 불우한 기회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노숙인들이, 낙인처럼 몸속 깊이 찍힌 정신적 열패감과 물리적 궁벽의 공포라는 족쇄를 풀고 글을 쓴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문집으로 묶어 펴낸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다짐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노숙인들이 책을 펴내면서 자신의 실명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작품을 발표한 것은 이같은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 책이 가지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바로 이 부분에서 다시 촉발된다. 이 책에 실린 텍스트는 그 어떤 기록이나 르포, 보고서보다 노숙인의 삶의 현장을 정밀하게 묘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당연히 관찰한 자의 기록이 아니라 치러낸 자, 겪어낸 자, 감당한 자의 그것이다. 길바닥을 집 삼고 하늘을 지붕 삼아, 보고 듣고 피부로 느끼지 않는 한에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세부적 진실이 작품의 편편마다 푸른 멍처럼 빛을 발한다. 이 푸른 멍의 기록은 필자들에겐 당연히 치부로 간주돼온, 숨기고 싶고 지우고 싶은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노숙인들은 인문적 각성에 힘입어 자신들이 겪었고 겪고 있으며, 겪고 나갈 이야기들이 사회적으로 공유될 가치가 있다는 믿음 아래, 다시 말해 공적인 언술이 될 수도 있다는 믿음 아래 온몸으로, 그 압도적인 진실함의 힘으로 글을 써내려간다.

편집위원회의 긴밀한 기획과 구성 아래, 전체 4부 및 부록으로 배치된 이 책의 수록작들은 예외 없이 극사실주의나 마이크로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극명한 체험과 각성의 미학이 스며 있다, 여기엔 애초 장식으로서의 문학적 레토릭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평자나 독자를 염두에 둘 때 드러나기 마련인 인정에 대한 욕망도 보이질 않는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는, 차마 기억하기도 싫은 고통스러운 체험을 다루고 있으면서 이제는 인문적 성찰의 힘과 자활의 의지로 이를 극복하려는 노숙인의 고투가 빚어낸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일반 독자들에게도 예사롭지 않게 다가가야 하는 것은 노숙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언제든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집과 가족을 잃고 길바닥을 떠도는 삶을 살 수도 있음을, 불행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평범하지만 놓치기 쉬운 진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박상지 기자 sangji.park@jnilbo.com